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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플레이어-145화 (145/244)

00145  중원도 슬슬 움직이고.  =========================================================================

* * *

수희는 억울해했다. 벤치에 앉아 발을 동동 구르며 괴상한 소리를 냈다.

"으아아! 으부버버! 아부다다다!"

억울한데 공원의 날씨는 이상하리만치 좋았다. 햇빛이 약간 뜨겁기는 했으나 불쾌할 정도는 아니었고,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왔다. 하늘은 높았다. 에메랄드에 가까운 파란색이 도화지처럼 넓게 펼쳐져 있었다. 공원에는 산책 나온 사람들이 꽤 많았고 한 쪽 켠에는 배가 땅땅하게 부른 비둘기들이 쉴 새 없이 무언가를 쪼아먹는 중이었다. 따뜻한 영화의 처음 오프닝 장면처럼, 공원은 평화롭기 그지 없었다.

그래서 더 억울했다. 한 번 억울하면 뭐든지 다 억울한 법이다.

"그니까 왜 갑자기 이상한데서 튀어나와선 방해하냔 말이야."

수희의 모습에 주랑은 빙그레 웃고선 자판기 커피를 한 입 홀짝였다. 흔히들 주랑쯤 되는 여자는 스타벅스같은 곳에 앉아 도도한 모습으로 커피를 마실거라 생각한다. 완전히 틀린 말이다. 주랑은 그립커피도 좋아하지만 자판기 커피도 좋아한다. 그리고 종이컵 하나를 들고 공원에 앉아 누군가와 수다를 떠는 것도 좋아한다. 하물며 그 대상이 사랑해 마지않는 남자친구의 여동생이면 말 다했다.

수희와 주랑은 은근히 잘 맞는 대화상대였다. 수희는 말 하는 걸 즐겨하고, 주랑은 듣는 걸 즐겨했으니까. 사실 주랑은 어딜가나 환영받는 대화상대이기는 했으나 어쨌거나 주랑은 수희와 대화하는 걸 재미있어했다.

"진짜 하여튼 도움이..."

주랑이 수희의 이마를, 검지손가락으로 아주 살짝 톡 건드렸다.

"오빠 생일 때문이지?"

"으, 응?"

주랑의 눈이 가느다랗게 변했다. 사실 이벤트에 참여하는데엔 별로 제한이 없다. 카오(*범법을 저질러 게임 플레이시 여러가지 불이익을 받는 상태) 여도 괜찮고 레벨이 낮아도 상관없다. 이벤트는 이벤트일 뿐이다. 따라서 윤석처럼 가명을 사용해도 되고, 혹은 아예 네임드 유저라고 거짓말을 해도 된다. 이름을 도용당한 유저가 이의를 제기하는 건 별개의 문제로 치고 말이다.

그런데 굳이 '오빠주거'의 닉네임을 까발리면서 이벤트에 참여했던 건 아무래도 닉네임을 공개하면서 얻는 이득때문 일거라 생각했다. 그 이득도 엄청난 건 아니다. 상대의 기를 꺾고 긴장하게 만드는 것 정도. 어쨌든 승리의 확률을 높여주긴 할 거다.

"언니가 조금 알아봤는데... 여기저기 많이 참여했더라...?"

"버, 벌써 알아봤어?"

주랑은 빙그레 웃었다. 말을 돌리지는 않았다.

"돈이 필요하구나?"

수희는 따, 딱히 그런 건 아냐...하고 부정했다가도 이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한테는 진짜 거짓말을 못하겠어. 이건 반칙이야."

반칙이었다. 주랑에게는 거짓말도 못하겠고 심한 말도 못하겠다. 주랑이 무언가를 말하면 왠지 그 말을 믿어야할 것만 같은 괴상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내가...빌려주는 건 싫지?"

"......."

수희는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빌리려고 했으면 진작에 빌릴 수 있었다. 하지만 빌리지 않았다. 윤석 앞에서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말이지만 주랑 앞이라서 말했다. 솔직해졌다.

"오빠한테... 내 힘으로 뭔가 해주고 싶어."

주랑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수희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수희는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난 맨날 짐만 되고 민폐만 끼치고, 오빠한테 뭐 받기만 하는 막둥이니까..."

적어도 선물 정도는 내 힘으로 내가 벌어서 해주고 싶은 마음이다. 적어도 그 정도는 하고 싶었다. 그녀도 안다. 자신이 어리광쟁이라는 것도 알고 오빠한테 짐이 되면 됐지, 힘은 못 된다는 걸 안다. 그래서 작은 거라도 해주고 싶었다.

"근데 내가 잘하는 게 이거 밖에 없어서..."

괜히 주랑과도 비교가 되어 슬퍼졌다. 보통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을 만나게 되면 질투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뛰어난 정도가 너무 심각하게 차이나면 질투가 아니라 선망하게 된다. 다른 사람에게는 어떨지 몰라도, 수희에겐 주랑이 선망의 대상이었다.

주랑이 빙그레 웃었다. 괜스레 수희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줬다.

"그런 소리 오빠앞에서 하면 엄청 혼날걸?"

나이차이가 30살 쯤 나는 것도 아닌데 수희는 마치 어린아이로 되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린아이가 된 자신의 머리를 엄마가 쓰다듬어 줄 때의 포근한 느낌이었다.

"뭔가 보답을 바라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잖아?"

"그래도..."

그건 수희가 잘 안다. 20년을 넘게 같이 살아왔는데 그 정도도 모를 리 없다.

"수희 너한테 뭔가를 해주는 건... 뭔가를 해주는 거 그 자체가 그 사람한테도 행복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한 번쯤 해봤으면 좋겠어."

그게 뭐야. 바보 같아. 그런 건 그냥 호구라고 하는 건데. 수희는 억지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라도 생각 안하면 자신이 너무 초라해지는 기분이어서 그랬다.

"네가 스스로 뭔가를 해서 선물하고 싶어한 것 자체가 아마 오빠한텐 가장 커다란 선물일거야."

그리고 수희의 속마음을 단번에 간파한 주랑이 말을 덧붙였다.

"가족한테 조금 호구 되면 어때? 내가 그 호구 잘 아는데... 아마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호구일걸?"

* * *

유토피아.

전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게임. 이젠 단순히 게임이 아닌 새로운 세상으로 완전히 잡아버린 그 것은 현실에도 많은 변화를 불러왔다. 다른 것들은 둘째 치고서 새로운 '회사'가 많이 생겼다. 유토매니아도 그 중 하나라고 보면 됐다.

혹자는 그럼 유토피아가 세계에서 제일 잘나가는 재벌그룹이고 유토피아의 사장이 세계 최고의 거부가 된 거 아니겠느냐고 하는데, 막상 따지고보면 그렇지도 않았다.

유토피아 쯤 되는 가상현실을 구현하는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전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천재들 중 천재들이 합심하여 만들어냈다. 천재들만 있다고 떡하니 가상현실세계가 나타나느냐하면 그것도 아니다. 영화감독 있고 영화배우 있다고 영화 만들어지는 거 아니다. 영화를 제작할 자본이 있어야한다. 영화감독이 부자라면야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스폰서의 존재는 필수다.

유토피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세계로부터 투자를 받았다. 초기개발비용만 수십 조를 가뿐히 뛰어넘었다. 수십 조가 얼핏보면 엄청나게 큰 돈이지만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데 들어가는 돈으로는 그리 큰 돈이 아니다.

유토피아는 대단히 성공한 것은 틀림없지만 유토피아의 사장이 지분을 모조리 갖고 있는 게 아니다. 세계에서도 내노라하는 수많은 부자들이 조금씩 나눠갖고 있고 유토피아로부터 나오는 이득은 투자자들에게 골고루 분배된다.

이득 분배만 해도 그런데, 유토피아를 돌리고 유지시키는데 또 엄청난 비용이 들어간다. 유토피아의 서버를 유지시키는데 발전소 세 개가 필요하다는 속설이 있을 정도다. 뿐만 아니라 엔지니어를 비롯한 직원들도 셀 수 없이 많으며 개발자들에게도 또 따로이 수익이 돌아간다. (거대 게임인 유토피아답게 개발자들의 수도 세자리 수가 넘는다.)

어쨌든 유토피아는 그렇게 운영되고 있고 그에 따른 회사들이 많아졌다. 윤석에게 접근해온, 이런 정보상인단체도 그 중 하나다.

"정보원들 평균 레벨이 80이 넘으며, 중원 내에서 최고의 정보단체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한국이 아니라 중원 내에서요?"

"예. 이번에 습격받은 것도 이미 파악하고 있습니다. 단체 이름은 일월. 꽤 이름있는 살수단체로 평균 레벨 90이 넘는 상위 랭커들입니다. 그 중 유저들을 이끄는 가두리는 살수장 '월영'의 첫째 제자로서 히든클래스입니다."

"미끼를 던지시는 군요."

"그 외에도 저희가 파악하기로 7개의 살수단체에서 중장살해 퀘스트를 받았고 그 중 3개 단체가 일주일 내로 움직임을 보일 겁니다."

"흠..."

게임의 문제를 현실로 가지고와, 현실에서 거래한다. 그것도 회사까지 차려서 말이다. 옛날 같았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이젠 버젓이 일어나는 일이다.

"사실 알만한 사람들은 아는 얘기지 않습니까? 유토매니아의 사장이 현대의 중장유저라는 건."

대외적으로 확실하게 맞다고 발표가 안 되어서 그렇지 이미 알만한 사람은 안다. (수정의 친구이자 M매거진의 기자인 나영역시 짐작하고 있던 사실이고 그녀는 지금도 윤석에 관해 보도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적어도 아는 사람보단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겠죠."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저희의 정보력을 과시하고 싶었던 마음이 있던 건 사실입니다."

"가장 먼저 제게 접촉해오셨죠. 그건 칭찬해드릴만 하네요."

확실히 계약을 맺게 되면 편하긴 할거다. 중원에 대한 최신 정보도 빠르게 입수할 수 있을거다. '정보'라는 것은 현대전이나 과거전이나 언제나 중요한 자산이었으니까.

"계약조건을 가져왔는데 보시겠습니까?"

"아뇨."

윤석은 고개를 젓고서 일어섰다. 거래를 성사시킬 수 있다고 확신했던 최종욱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혹시 정체를 대놓고 까발려서 기분이 나쁜 건가. 아주 잠깐이지만 눈 앞이 아득해졌다. 상대가 젊은 사람이어서 일부러 호기롭고 솔직하게 다가갔는데 역시 비즈니스에선 그런 게 소용 없는건가 싶었다.

종욱은 침을 꿀꺽 삼켰다. 위축된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으나 이건 그에게 일생일대의 기회나 다름없었다. 이쪽 일은 입소문이 굉장히 중요하다. 유토매니아의 김윤석과 거래하게 되면 아마 엄청나게 유명해질 거다. 종욱은 절실했다. 그는 이 기회가 마치 마지막인 것처럼만 느껴졌다.

'제발...'

종욱은 윤석의 눈치를 살핀 뒤 말했다. 아뇨란다. 가슴이 타들어갔다.

"보시면 분명 만족하실 겁니다."

진짜입니다. 진짜로 만족하고도 만족하고도 만족할 만한 내용이라니까요! 속으로 굉장히 초조해졌다. 확실히 저쪽에 유리한 내용을 많이 넣어놨다. 이 쪽은 유토매니아와 계약하는 것만으로도 큰 부수효과를 누릴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욕심은 부리지 않았다.

기회를 놓칠 수 없는 그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이 조항을 살펴보시면..."

"제 변호사에게 얘기해놓겠습니다. 세부조건은 함께 상의해 주세요."

사실 그런거 보기 귀찮아서요. 뒷 말은 삼켰다. 종욱은 무척 밝은 표정으로 서류를 챙겼다. 감사하다고 허리를 꾸벅 숙여보였다.

"감사합니다!"

윤석은 괜히 미안해졌다.

============================ 작품 후기 ============================

"전 너무나 절실해여. 제발 한 번만 봐주세여."

"변호사랑 얘기하세요.(귀찮아요.저리가요. 난 주랑이랑 알콩달콩 놀고 싶단 말이에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ㅠ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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