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8 남자는 역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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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는 휠체어에 앉아서, 그리고 설아는 침대위에 엎드려서 울었다. 그래도 폐암 선고를 받고서 6개월이나 살았다.
휠체어에 앉은 설하는 말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대신 엄마가 누워있는 침대를 덮은, 하얀색 침대보를 손으로 잡았다. 그렇게한다고해서 이미 저 멀리 훨훨 날아가버린 저 사람을 붙잡을 수 있는건 아니지만 그렇게라도, 조금이라도 더 잡아보고 싶었다.
비쩍마른 몸도 괜찮고 혼자선 아무것도 못해서 대변 소변 다 받아내도 괜찮고, 가끔 이상한 곡소리를 내도 괜찮고 다 괜찮으니까, 그냥 심장만 쿵쿵대면서 옆에 있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원비가 많이 들고, 해줄 수 있는건 그저 빨리 죽는 거 뿐이라고 숨을 헐떡대서 사람 괴롭게 만드는 능력밖에 없는 사람인데, 그냥 보고 있기만 해도 힘든 것 같았는데.
" 엄마!! "
설아가 다시 한 번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흐느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엄마였다. 분명 아무것도 해주는게 없는 사람인데 자꾸만 눈물이 났다. 무언가 줄 수 있지는 않지만,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힘이 되던 사람이 이제 없어져버렸다. 희미하게나마 뛰던 심장도 맥박도 이젠 조용했다. 초록색 선이 일직선이다.
" 왜 죽냐고! 왜! 왜 죽냐고! 허락도 없이 누가 죽으래! 열심히 살거라며! 산다며! 산다며! 산다고 나랑 약속했잖아! "
설아는 엉엉 울면서 소리 질렀다. 살아있을 땐 짜증도 많이 내고 신경질도 많이 냈었는데 막상 옆자리에 없게 되니까, 없어지니까. 그제야 좀 알겠다. 왜 이 사람의 이름이 엄마인건지. 현숙씨보다 설아엄마라는 이름이 왜 훨씬 더 귀에 익고 가깝게 느껴지는건지 이제야 좀 알겠다. 19살이면 다 컸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상처 같은 건 안받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오히려 많이 알게 된 만큼 더 아프고 더 슬펐다.
설하는 울지 않았다.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 나... 화장실 갔다올게. "
휠체어를 밀고서 병실 밖으로 나갔다. 화장실 안에 들어갔다. 입을 틀어막았다. 휠체어를 밀던 두 손으로 입을 꽉 막았다.
' 난 안 울어. '
어릴적엔 울보였다. 그런데 이제 울기로 약속했다. 그 것도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랑 약속했다. 그 약속을 맺은 사람은 이제 세상에 딱 한명 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었다.
' 난 안 울어! '
한 손으로 변기물을 내렸다. 쏴아- 물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고, 그 소리에 숨어서 조금 울어보려던 설하는 이내 울음을 터뜨렸다.
' 이건... 우는 거 아니야. '
변기소리라고, 변기가 물을 내려보내는 소리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속여봤다.
' 근데... 왜... 안 끝나... 왜 물이 계속 내려가. '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팠다.
' 이건 아파서 우는거야. '
입술을 깨물어서, 너무 아파서 저절로 눈물이 난다고 생각했다. 아파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는건 우는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 여기가 더 아파. '
설하는 가슴을 움켜쥐고 몸을 수그렸다. 결국 으허엉- 울음이 터져나왔다. 울지 않으려고 약속 지켜보려고 그렇게 노력하고 힘내봤는데 결국 실패했다. 한참이나 울고나서 그녀는 다시 병실로 들어갔다. 오늘따라 휠체어가 왜 이렇게 무거운건지 모르겠다. 너무 무거워서 앞으로 나아가질 않았다.
방금전까지는 분명 세 사람이 있었을 병실엔 이제 두 사람 밖에 없다. 두 사람과 하나의 인형만 놓여있었다. 말도 못하고 심장도 안 뛰는 인형. 방금까지는 36.5도만큼 뜨거웠을 인형이 지금 누워있었다.
화장실에서 그렇게 울었던 설하는, 병실 안에서 울지 않았다. 언니는 안 우냐고? 안 슬프냐고 설아가 따졌다. 어딘가에라도 화풀이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고 아무렇게나 신경질이라도 내야할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다.
설하가 말했다.
" 나는 안 슬퍼. 하나도. "
엉덩이 아래로 손을 집어넣었다. 설아가 보지 못하게 엉덩이를 꽉 꼬집었다.
" 엄마는 좋은데 갔어. 그니까 난 안 슬퍼. "
그리고 그녀는 또 밖으로 나와버렸다. 화장실 갔다올게. 그렇게 말을 하고서 나왔다.
그리고 병실 밖에서, 누군가를 봤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말했다.
" 또... 우냐? "
* * *
아버지의 병세는 많이 좋아졌다.
애초에 '나는 입원 따윈 필요 없어!' 라고 말했을만큼 겉보기로는 정정했던 아버지였다. 요즘은 VIP실로 옮겨서 왕 부럽지 않은 환자노릇을 하고는 있다만, 어쨌든 윤석은 적어도 1주일에 한 번은 아버지를 찾아와 인사를 드렸다. 오늘도 여태까지처럼 시끄러워 이 놈아. 이러고 있을 시간에 나가서 일이나 해! 라고 말씀하시는 아버지를 뒤로한 채 밖으로 나가다가 누군가를 발견했다.
저번에 자동차 안에서 한 번 봤었다. 휠체어를 타고 있는 여자였다. 화장실에서 나오는걸 봤었다. 눈이 새빨개져 있었다. 잘못봤나 싶어 그녀가 들어간 병실문을 저도 모르게 쳐다보고 있는데, 그녀가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 모습이 뭐랄까. 애처롭다고 해야할까.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과거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결국 윤석이 말했다.
" 너... 또 우냐? "
휠체어 앉은 그녀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 안 울어. "
윤석은 피식 웃었다. 옛날에 울지 않기로 약속했던 게 기억났다. 하기야 그건 다 옛날 일이고, 10년전 추억일 뿐인데 이딴 걸 떠올려서 어따쓰냐. 하고 윤석은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말했다.
" 오랜만이야. "
" 응. "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선 고개를 꾸벅 숙여보이고서 지나가버렸다. 거기서 끝이었다. 뭔가 더 있을리도 없고 더 할 얘기도 없었다.
' 묘하게... 오랜만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인데. '
이상한 기분이 들기는 들었다. 분명 직접 대화하는건 10년만인데 최근에 만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 기분 탓인가.'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걸음을 멈췄다.
' 내가 뭐라도 도와줘야 하나...? '
병실쪽을 쳐다봤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난 것 같다.
" 아오씨... 너무 신경쓰지 말자. "
내 참. 오지랖도 병이군. 중얼거렸다. 과거의 인연은 과거의 인연일 뿐이다. 저쪽도 분명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다. 밤 12시까지 기다렸던 것은 설하가 워낙 약속을 중요시하는 성격을 가져서 그런거라고 생각해버렸다. 만약 이쪽의 도움이 필요했다면 먼저 손을 벌렸겠지. 윤석은 그렇게 애써 생각하면서 다시 걸음을 옮겼다.
유토피아에 접속했다.
접속만 했다하면 난리였던 -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스나와 날 선 신경전을 벌이던 - 색기 흐르는 NPC. 최근에 이름을 알게된 '언더스노우'가 오늘따라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며칠동안 그 NPC는 보이지 않았다.
* * *
포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 긁...적. 긁...적. "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손을 좌우롤 천천히 흔들었다.
" 아냐... 나는... 아무 말... 안 했다 스나. 나는... 결백...해. "
하아... 농도 짙은 신음소리가 방문을 투과해 이 쪽까지 들려왔다. 포가 자신의 결백함을 다시 한 번 주장했다.
" 난... 아무...말도...안 했어... "
스나가 대답했다.
" 예. "
" 진짜...야. "
" 알겠습니다. "
포가 울상을 지었다.
" 진짠...데... "
" 예. "
그리고 물었다.
" 왜... 화 났...어? "
스나는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눈동자로 포를 쳐다봤다. 예의 그 무미건조한 표정이다. 포는 스나의 눈을 피하고서 하..하하..하하...하고 느리게 웃었다.
" 임무가 늦어지고 있습니다. "
" 임...무...? "
임무를 받기는 받았다. 판타리아인들과 중원인들을 죽이라는 명령이었다. 그러나 사실 스나는 그 명령에 아주 목매달지는 않았다. 윤석이 가면 가고 안가면 그만이고. 거의 그런 수준이었는데 오늘은 유독 임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는 듯 했다.
" 저 여자가 수상합니다. "
포가 매우 느릿하게 고개를 갸웃했다.
" 수...상? "
" 예. "
또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 그렇지...않...아. 확실...해. "
" 그렇습니까? "
" 으, 응... "
포는 헤벌쭉 웃었다.
" 이쁘...잖아. 엄...청. "
" 그렇습니까. "
'예쁘면 확실하게 수상하지 않은 겁니까' 라든가' 예쁘면 끝입니까?' 등의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스나는 방문을 쳐다봤다.
방안에선 가느다란 신음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스나는 저 신음소리에 마치 운율 비슷한 무언가가 있다고 느꼈다. 그저 단순히 하아- 하윽- 소리를 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소리로 남자를 옭아매는 듯한 무언가, 자신은 가지지 못한 무언가가 있다고 느꼈다.
스나의 심각해진 표정을 보면서 포가 응원해줬다. 그 커다란 주먹을 느릿느릿 꽉 쥐었다.
" 괜...찮아... 연습하면 돼... "
" 뭐가 말입니까? "
포의 얼굴이 붉어졌다. 분홍빛 돼지가 되어버렸다.
" 노래도... 연습하면 잘하...잖아... 사격도...그렇고. 뭐든지... 연습하면... 다... 잘해. "
스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 역시 수상합니다. "
스나가 문 앞에 섰다. 노크했다.
" 들어가도 좋습니까? "
안 쪽에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나만 들어와. 라고 말했다. 스나가 문 안쪽으로 들어가고 소총이 말했다.
" 허벌나게 부럽다. "
포도 고개를 끄덕였다.
" 남자는... 역시... 별은 되야 하나...봅니다. "
소총도 고개를 끄덕였다.
" 역시 남자는 장교가 갑이다. "
============================ 작품 후기 ============================
여성향...이리라 짐작되는 '아린이가 간다!'는 일반연재로 연재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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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제목을 '건 오퍼'로 바꿀까하는데... 독자분들의 생각은 어떠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