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플레이어-84화 (84/244)

00084  10억이 갑자기 아까워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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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로는 안다. 이들은 지극히 당연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지금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건 다른 문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들에게 없는 것이 윤석에게 있다.

" 오빠... "

수희는 못내 걱정이 되는지 윤석의 옷자락을 잡았다. 윤석이 말하고 나서, 부모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척 보니 백수건달, 할 거 없는 그냥저냥 그런 놈팽이처럼 보인다. 머리는 까치집, 낡아빠진 티셔츠, 회색 츄리닝에 운동화를 구겨신은 그의 모습은 전형적인 백수 날건달의 모습이었다. 적어도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고,

한 남자가 말했다.

" 너무 한 게 아니라 당연한 거죠. 그쪽 젊은 분이 보호자이신지? "

특히 '젊은'에 악센트를 줬다. 확실히 그들 눈으로 보면 윤석은 젊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어리다. 윤석이 이번에 잠깐 트러블을 일으켰던 소년(강한힘)은 16살. 윤석과 12살 차이였다. 이 곳에 모인 부모들과 윤석의 나이차는 적게 잡아도 20살 이상은 차이가 날 터였다. 그런 상황에서 날건달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으니, 아무래도 얕잡혀 보일 수 밖에 없다.

" 예. 그렇습니다만. "

누군가 말했다.

" 보호자시면 책임을 지셔야죠. "

또 누군가가 목소리에 힘을 보탰다.

" 그래요. 책임을 져야합니다. 이건 당사자들끼리 해결을 봐야하는 거라니까요? "

윤석이 피식 웃었다.

" 책임이요?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

그 태도가 다소 건방졌다. 다소 건방진 게 아니라 매우 건방졌다. 시비걸듯 말했다.

" 따지고보면 제 동생도 그냥 구경만 하고 있었는데요. 그렇게따지면 그 누구야... 제 동생한테 고백을 하겠다던 그 사람이 책임져야하는 거 아닌가요? 제 동생이 뭘 했는데요? 가만히 보고 있기만 한 건 매한가지 아니에요? "

말하다보니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 보자보자하니까 별 같잖지도 않은 이유로 몰아가지 말란 말입니다. "

윤석의 삐딱한 태도에 아니, 이 사람이! 하고 부모들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 그리고 그 사람도 뭐 혼자 준비했겠습니까? 다른 친구들 동의 구했고 같이 준비했겠죠. 그리고 동창애들끼리 모여서 좋게좋게 해보자해서 모였는데, 꼭 부모님들 나서서 이렇다 저렇다 편 가르기 해야 속이 시원하겠습니까? 그게 부모라는 사람들이 지금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입니까? "

부모들이 인상을 잔뜩 찡그렸다. 자식들간의 교우문제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지금 당장 닥친 문제가 훨씬 중요하다. 이런 문제에선 어떻게든 빠져나오는게 좋다. 괜히 의리랍시고 끼어들었다가 좋은 꼴 못 본다. 그게 여지껏 삶을 살아오면서 얻은 교훈이었다.

윤석도 만약, 여유가 없었다면 이렇게 당당하게 나가지도 못했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저 사람들과 똑같이 반응했을런지도 모른다. 어차피 누군가 피해 입을거. 딱 한명 물고 늘어졌을지도 모른다.

' 하지만 이젠 아냐. '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제 동생이 사고친 거 정도는 얼마든지 덮어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과거의 김윤석이 아니다. 힘이 있다. 김수희가 곤란해하면, 그 곤란함 정도는 얼마든지 타개해줄 수 있다. 그게 내면적인 성숙과 관련한 문제가 아니라 바깥의 문제. 그러니까 현실적인 문제라면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고 또.

' 도와주고 싶기도 하고. '

도와주고 싶다. 누가 뭐래도 하나뿐인 동생이다. 누군가 말했다.

" 지금 그런 얘기 하자는게 아닙니다. 친구관계라도 잘잘못은 분명히 가려야죠. "

" 그걸 왜 부모님들이 관여를 하죠? 성인들 아닙니까? 이 분들이 부모님들께 편 갈라달라고 했습니까? 한 명한테 죄 몰아달라고 했습니까? 치사하고 더럽군요. 이런 거. "

" 치사하고 더러운 게 아니죠. 그쪽분이 아직 젊어서 세상을 잘 모르시나 본데... 친구라고해서 죄까지 같이 공유하는 건 아닙니다. "

" 지금 자녀분들이 부모님께 원하는게 뭔지 물어보기는 하셨습니까? 편가르기해서 네가 잘못했다 몰아주는거. 그거 원하고 있는 겁니까? 얘들이? 이미 벌어진 일, 나만 아니면 장땡입니까? 한심하기 이를데가 없네요. 구역질이 날 만큼요."

운동화를 구겨신은 그는 불운해... 나는 불운해...중얼거리고 있는 남자 앞에 서서,

" 피해액은 얼마죠? "

물었다. 하지만 남자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 듯 했다.

" 저는 그깟 돈 몇 푼 아까운 거 보다 제 동생이 인간관계에서 상처받는게 더 싫거든요. 다른 분들은 돈이 더 중요하다고, 현실의 장벽이 더 높고 중요하다고 말하실지도 모르겠지만. "

다분히 비웃음을 담아 피식 웃었다.

어쩌면, 가진 자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오만한 소리일 수도 있다. 능력이 있으니까. 몇 억 몇십억 정도는 그냥 휙휙 내던질 수 있는, 그런 건 그냥 간식값처럼 허비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있으니까 할 수 있는 자만심 가득한 소리일 수도 있다.

그러나저러나 상관 없었다. 중요한 건 그에게 능력이 있다는 거고, 다른 사람들처럼 벌벌떨지 않아도 된다는 것. 이 상황을 쉽게 타개할 수 있는 능력이 그에게 있다는 거다.

" 책임 같이 지고 싶은 사람? "

윤석이 말했다. 나이차이가 불과 6살 밖에 나지 않는, 수희의 오빠를 쳐다봤다. 뭐랄까. 어떻게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어떤 여유를 갖고 있는 것 같았다. 윤석이 말했다.

" 솔직하게 손 들어. 지금 손들면 봐줄테니까. "

겉모양새는 허름하기 그지없는데, 자신감에 가득찬 모습이랄까. 수희가 윤석의 뒤에서 손을 조금 들어올렸고, 이내 친구들은 한 명, 한 명, 눈치를 보면서 천천히 들어올렸다.

윤석은 피식 웃었다.

생각보다 22살이란 나이는 많이 순수한 나이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보니 22살땐 나 스스로도 많이 순수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토록 순수해서 어쩌면 그토록 뜨거운 사랑에 빠질 수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스치는 바람처럼 사라져갔다.

결국 전부 손을 들었다. 흡족해진 윤석이 말했다.

" 젊은 날의 친구만큼, 그 때의 인간관계만큼 솔직하고 이해관계 없이 우정을 나눌수 있는 관계가 또 있을까요? "

순간 민혁을 떠올렸다. 중학교때부터 이어진 질기고 긴 악연이자 인연. 윤석은 가끔 지나가는 말로 말하곤 했었다. 너 같은 놈이 내 인생에 하나쯤 있어서 아주 가끔은 다행일 때도 있다고.

" 전 겨우 돈 몇 푼때문에 제 동생한테서 그 훌륭한 가치를 빼앗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거든요. 꼴랑 몇 억? 그게 그렇게 대수입니까? "

그깟 돈 몇 푼. 제가 보상해드리죠. 그는 그렇게 말하고서 수희를 한 번 쳐다봤다. 그리고 주위도 한 번 둘러봤다. 부모들은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두 눈을 꿈뻑거렸다.

" 까짓거 몇 억. 겨우 그깟걸로 애들한테 상처주지 말란 뜻입니다. 이 따위 한심한 작태가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

윤석도 알긴 안다. 저 사람들은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을 보였고, 또 제 자식을 위하는 마음이 앞섰다는 걸 안다. 지금 당장 닥친 이 일이 자식에게 해가 될까봐서, 그래서 앞다투어 변호하고 잘못을 타인에게 넘겨버리려고 한 거다. 저들은 지극히 현실적인 관점에서 이 일에 접근한 거고, 윤석은 어쩌면 이상적인 관점에서 접근한 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는 10억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더 현명한 해결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돈 안들이고 해결하는 방법이 있을 수도 있고, 그도 아니면 수희까지 싸잡아 매도하던 사람들을 엿 먹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하지 않았다.

수희 친구들의 부모님이어서 그랬다. 꼴랑 복수심에 이들 엿먹이는 건 어렵지 않겠지만, 그런 것 보단 수희가 더 중요했다. 어떻게할까 고민하다가, 수희의 친구들이 전부 손을 들었을 때 마음을 정했다.

' 지금 그 마음... 나이 먹고서도 잊지마라. '

한 번 킥, 웃었다. 아참. 하나 까먹은 게 있었지. 하고 윤석은 상운 앞에 걸어갔다.

" 네가 내 동생한테 고백하려고 했다고? "

아직도 얼굴이 하얗게 질린 상태인 상운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 백만년은 일러. 짜식아. "

" 오, 오빠! "

수희가 말렸지만 윤석은 아랑곳않고 말했다.

" 이런 문제 생겼을 때, 내 동생 엄청 덜렁거리는거는 못 막아도... 그건 천성이니까. 어쨌든 그러다가 실수해서 일 생기면 막아줄 능력있고 어리광 받아줄 수 있고 그런 착하고 능력있는 놈 아니면 넘볼 생각도 하지마. 이걸 콱 그냥. "

추리닝 차림의, 겉보기로는 백수인 윤석이 인상을 잔뜩 찡그렸다. 주먹을 들어올려서 겁주는 척 하려다가 파란색 옷을 입은 아저씨들을 보고 참았다. 생각해보니 여긴 지구대다. 윤석이라고해서 경찰아저씨가 아예 안 무서운 건 아니었다.

어쩌면 윤석의 사랑하는 방법도 틀렸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주 많이.

사람들이 많아서, 수희는 버럭 소리지르지는 못했고 아무도 모르게 윤석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속으로만 소리쳤다.

' 지나친 간섭이라고! 나 성인 된 지 2년이나 지났다니까! '

한편, 윤석이 정말로 폭발한 건 그로부터 며칠 뒤였다. 알아보니 상운이란 놈은 곧 군대에 입대하게 되고, 그 전에 수희에게 고백을 했단다. 방금까지 쇼파에 앉아 수희와 대화를 나누던 윤석이 벌떡 일어섰다.

" 이 새끼를 그냥! "

그의 입장에선 별로 아깝지 않은, 조금 비싼 부르주아 껌값인 10억이 갑자기 아까워졌다.

" 이 새끼 N등분해서 한 천만원쯤 내놓으라고 그래! 아니. 전화번호 뭐야? 이 새끼가 벌써 보험팔이 시작했나. 넌 뭐했어? 그 때 싸대기라도 날렸어야지. 군대가는 놈 새끼가 뭐? 고백? 이 새끼가 진짜! 약을 빨았나! 새끼가 양심이 있어야 할 거 아냐! "

젊은 날 인간관계에 대한 중요성을 설파하던 윤석은 길길이 날뛰었다.

* * *

별로 넓지 않은 집. 그나마 요즘 유토피아를 플레이하면서 차곡차곡 돈을 모아가고는 있지만 아직까지도 빚을 다 청산하지 못했다. 설아와 설하는 이층침대. 즉, 같은 방에서 잠을 같이 잔다.

동생인 설아는 그걸 싫어했었다. 남들은 다 자기 방이 있는데 자기만 내 방이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언니와 많이 다투기도 했다.(그녀 혼자 화를 냈었고 설하는 동생의 화를 묵묵히 받아주기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젠 자기 전, 침대에서 도란도란 얘기 나누는 걸 좋아했다. 10살이나 차이나는 언니는 그녀의 말을 잘 들어주었고 때때로 위로도 해주었다. 언니는 많은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설아에겐 의지할 수 있는 언니였다.

1층에 누워있는 설하에게, 설아가 말했다.

" 언니. 이대로도 괜찮아? "

아래에서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방 안에서, 저 혼자 스스로 열심히 달리는 초침의 째깍-째깍-소리와 이불이 부스럭 거리는 소리만 설아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 난 언니 진짜 이해 안 돼. "

부스럭- 이불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설하의 대답도 들려왔다. 대답은 싱겁기 그지없었다.

" 응. "

설아는 아오 진짜 화 나! 하고 신경질적으로 사다리를 타고 내려와 설하의 침대위에 앉았다.

" 진짜 그걸로 되는 거야? 언니? 화도 안 나? 분하지 않아? "

설하는 분해하는 설아의 손목을 붙잡았다. 물끄러미 설아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 언니는... 괜찮아. "

" 내가 안 괜찮아. 언니가 자꾸 이런 식으로 미적미적거리면 그 오빠 그냥 내가 꼬셔버릴거야. 언니 밍기적거린 거 엄청 후회하게. "

그리고 인상을 찡그렸다.

" 왜 웃어! 진짜야! 와따시와 혼또니 야메떼 레알 트루 진심 데쓰네! 언니 막 후회하도록 내가 꼬실거야. 아이참 . 진짜라니까! 우씽. 그만 애기취급해. 나도 18살이라고. 18살이면 다 컸어. 에이 진짜! "

그랬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언가 중요한 걸 잊고 있었다.

" 아니. 19살이었지. 아 싫어! 머리 쓰다듬지 마! "

설아는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설하의 손길을 거부하면서, 얼굴이 뻘개진 채 사다리를 성큼성큼 타고올라가 이불을 뒤집어 썼다.

" 진짜 진심이야. 언니가 자꾸 그러면 내가 콱 꼬셔버릴거니까 각오해. 이래봬도 19살이라니까! "

아래에선, 또 성의없는 대답이 들려왔다. 여태까지의 대화와는 별로 상관이 없는듯한 말이었다.

" 응. 고마워. "

결국 설아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 잘 자! 멍청이 언니. "

설아가 대답했다.

" 응. "

약간 시간이 흐르고나서, 설하가 물었다.

" 언니. 또 접속할거야? 또 만날거야? 또 그런 바보짓 할거야? "

한참이 지나고 대답이 들려왔다.

" 나 자는 중이야. "

============================ 작품 후기 ============================

이제 진짜진짜 비싸질테다.

[띠링. 연참조건으로 추천수 200이 발동되었습니다]

200나오면 연참한다. 후... 200 정도면 안전빵이겠지.

" ㅁㅊ놈이 그냥 추천받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해. 연참은 꼭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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