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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플레이어-78화 (78/244)

00078  윤석아. 나 좀 안아줄래?  =========================================================================

* * *

주랑은 생긋 웃었다.

" 싫어요. "

대답은 빨리 나왔다. 주랑은 윤석의 손을 꽉 붙잡고서,

" 이렇게 멋없는 프로포즈 같은 거 안 받을거에요. "

하고 말한 뒤 차라리 제가 더 멋지게 하고 말 거에요. 라면서 은근슬쩍 불만을 표시했다. 고개를 숙이고 발 끝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 제 일생에 딱 한번 밖에 없을 프로포즈인데... 너무 멋 없잖아요. "

윤석은 피식 웃었다.

" 그래. 결혼하지 말자. "

그 말에 주랑이 고개를 휙 쳐들었다. 어찌나 빨리 고개를 드는지 목뼈가 걱정될 정도였다. 그녀의 길다란 생머리가 흐트러짐과 동시에 달콤한 향기가 풍겨나왔다.

" 나중에 제대로 프로포즈할 테니까. "

주랑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급격한 반응을 보이는 주랑을 보면서 윤석은 또 피식 웃고는 주랑의 허리에 손을 감쌌다.

" 들어가자. "

" 자, 잠깐만요. "

주랑은 윤석을 문 밖에 세워놓고 도망치듯 들어가 정리를 한답시고 땀이 삐질 새어나올만큼 빠르게 움직였다. 안 그래도 깨끗한 방이긴 했는데 그래도 그녀는 신경쓰이는 듯 했다.

' 예쁘게. 예쁘게. 예쁘게! '

그리고 화장대로 쏜살같이 달려가 화장을 고쳤다. 제대로 메이크업을 하는 수준은 아니고 그냥 번진데는 없는지, 한번 살펴보고 파운데이션을 한번 더 바르고 향수를 뿌리고 윤석이 좋아하는 분홍색 틴트를 덧칠하는 것 정도. 사실 그 만큼만 해도 -그것 조차 하지 않아도- TV에 나오는 어지간한 연예인보다는 예뻤지만 그래도 윤석에겐 조금이라도 더 예뻐보이고 싶은 게 그녀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문을 열었다.

" 미안해요. 오래 기달렸죠. "

" 응. 오래 기다렸어. "

기다린 시간은 대략 3분정도 되지 않았을까 싶다. 윤석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 잠깐만요. 이, 일단 씻어... 꺅! "

윤석은 주랑을 안아들고 침대로 향했다. 씻어야한다면서 주랑은 작은 발버둥을 쳤지만 별로 소용은 없었다. 침대 위에서 한차례 뜨거운 시간을 보낸 뒤 언제나 그렇듯 윤석과 주랑은 서로를 부둥켜 안고서 이런저런 얘기를 털어놓았다. 서로에게 더 충실해지고 솔직해지는 시간이다.

" 오빠. 그래서 누구에요? "

" 뭐가? "

" 이를테면... 첫사랑이라던가... 아니면 22살때 그 분과 많이 닮은 사람이라던가... 어쨌든... 지금 오빠 마음 싱숭생숭하게 만드는 사람이요. "

윤석의 몸이 움찔했다. 윤석과 완전히 밀착된 상태로, 윤석의 가슴에 귀를 대고 있는 주랑은 윤석의 상태를 쉽사리 알아챘다. 두 팔로 윤석의 허리를 감싸안아 윤석을 더 꽉 끌어안았다.

윤석이 머뭇거리고 있을 때에 주랑이 말했다.

" 다녀오세요. "

" 뭐? "

" 전 언제나 여기. "

윤석의 가슴을 콕콕 찔렀다. 옆구리도 한 번 콕 찔렀다.

" 오빠 옆에 있으니까 노란불에 머뭇거려도 괜찮고 빨간불에 잠깐 멈춰서도 괜찮아요. "

" 주랑아. "

주랑이 배시시 웃었다.

" 아까부터 뭘 그렇게 망설이는 거에요? "

내 상태가 그렇게 티가 났나, 하고 윤석은 씁쓸하게 한 번 웃었다. 주랑의 비단결 같은 머리카락 속에 손가락을 넣고서 주랑의 목뒤에 손을 얹고 끌어당겼다.

" 어맛? "

" 나. 첫사랑이랑 만나기로 했어. "

" 그냥 단순히 만나는 거죠? "

" 응. 그냥... 신경 쓰이더라고. 몸이 좀 안 좋은가봐. "

주랑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 그런데 오빠, 궁금한 게 있는데요. 첫사랑이란 건 어떤 느낌이에요?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막 설레고 신경쓰이고 막 그래요? "

" 너는 어떤데? "

주랑은 머뭇거리다가 이내 윤석을 흘겨봤다. 입술을 뾰루퉁 내밀었다.

" 몰라요. 그런 거. "

" 왜? "

" 여기 이 사람이 제 첫사랑이니까... "

주랑의 목소리가 사그라들었다. 그 부분은 오히려 조금 자신 없었다.

" 저... 매력 있는 거 맞죠? 다른 사람말고 오빠한테는 매력 있었으면 좋겠어요. "

정말 매력있고 예쁜 사람들은 연애도 많이 해봤을 것 같다. 적어도 주랑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당신이 첫사랑이다.'라고 말하는 게 그리 당당하지 못했다. 여지껏 그 흔한 남자친구 한 번 사귀어보지 못했고, 그건 다른 말로 하면 '매력없는 여자'처럼 느껴질까봐 그랬다.

" 네가 너무 예뻐서 아무도 접근하지 못한 거야. "

윤석은 주랑의 정수리에 코를 묻었다. 오늘 씻지 못해 걱정이라곤 하지만 여전히 체취는 달콤했다.

" 거짓말... "

하고 주랑은 부정했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은지 배시시 웃었다. 예쁜 여자도 예쁘다는 칭찬을 들으면 기분이 좋은건가보다, 하고 윤석은 자꾸만 피식피식 웃었다.

" 나는요... 오빠가 좋아요. 소중하구요. 사랑하고 있어요. 그래서요... "

윤석이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자 주랑이 황급히 검지손가락을 들어올려 입술을 막으면서 쉿! 쉿! 소리를 냈다.

" 아이참. 이 부분에서 끊으면 창피해서 말 못한단 말이에요. "

변명을 했다.

' 이미...네가 끊었잖냐. '

그 쉬운 사실을 주랑은 인지하지 못한듯 다시 말을 이었다. 눈치없는 윤석도 이번엔 굳이 '말 끊어지면 창피해서 말 못한다며?'라고 콕 집어내지는 않았다.

" 그래서 지금의 오빠가 있게 만들어준 그 모든 것들을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니까요 전 괜찮으니까요. 만나보세요. "

* * *

자고가겠다는 윤석을, 주랑은 굳이 돌려보냈다. 오늘 집에서 무척 중요한 일을 해야한다고 했다. 안그래도 주랑에게 또 빚 하나를 얻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던 윤석은 알았다고 대답하고서 집 밖으로 나왔다. 주랑은 얇은 옷차림에 점퍼 하나를 입고서 오피스텔 밖까지 따라나와 밝은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윤석의 벤츠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던 그녀는 이내 한숨을 쉬었다.

" 오랜만이에요... 아빠. "

" 저 남자. 낯이 익구나. "

" 언론에서 보도 많이 됐거든요. "

주랑이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 추워요. 집에 들어가서 얘기해요. "

" 그래. "

집 안에 들어왔다. 남자는 주위를 한 번 둘러봤다.

" 지금 시간까지 같이 있었니? "

주랑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방금 집 밖으로 나가는 걸 봐놓고선 굳이 묻는다는 건, 약간 추궁의 의미도 담겨져 있었으니까.

" 아냐. 괜한 걸 물었구나. 그나저나... "

그는 주랑의 얼굴을 보면서 한숨을 푹 내쉬고서 말했다.

" 표정이... 안 좋구나. "

" 아니에요. 그냥 조금 피곤해서 그런가봐요. 새 어머니는 어때요? "

" 그냥... 뭐... "

남자는 씁쓸해졌다. 주랑에게 술이 있느냐고 물었다.

" 2001년산 페트뤼스... 있어요. 아빠는 별로 안 좋아하지만. "

" 페트뤼스... 여전히 입맛이 변하지 않았구나. "

" 드실래요? "

" 그래. "

남자는 코로 먼저 그 향을 맡아보고, 이내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그는 와인의 맛을 음미하듯 눈을 감고서 한참을 있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여전히 눈은 감은 상태다.

" 여전히 네 얘기는 하지 않는구나. "

" 아버지의 얘기가 궁금해서요... "

딸은 언제나 그랬다. 자기 얘기를 하는 것보다 남의 얘기를 들어주는 걸 좋아했다. 남이 얘기하면 그것에 맞장구쳐주고 그것에 동화되고 같이 웃어주고 같이 울어주고. 그녀는 항상 그랬다.

" 주랑아. "

" 네. "

" 아까 그 남자... 사랑하니? "

대답은 무척이나 빠르게 돌아왔다.

" 네. 죽을 만큼이요. "

" 그래... 그렇구나. "

그는 그제서야 눈을 떴다. 주랑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주랑이 자기 생각을 저렇게 똑부지게, 그것도 '죽을 만큼'이라는 극단적인 단어까지 써가면서 자신을 주장하는 걸 거의 처음 보는 것 같다.아까 그 남자에 대한 호기심도 피어오르고, 그 남자가 딸을 이렇게 변화시킨 것인가에 대한 의문도 뭉클뭉클 샘솟았다.

그렇게 부녀는 오랜시간 눈을 마주치고 서로를 쳐다봤다. 이내 그는 손을 들어 주랑의 눈가에 댔다.

" 별로 아비로서의 자격은 없지만... 이거 하나만은 말해주고 싶다. 주랑아. 너무 완벽해질 필요 없어. 너무 좋은 모습만 보여줄 필요도 없어. 네 자신을 조금... 주장할 줄도 알아야한다. 가끔은 화도 내고, 가끔은 질투도 하고, 가끔은 어리광도 부리고, 응석도 부려야해. 사랑한다면... 그래도 되는 특권을 얻는 거거든. "

그의 손에 물방울이 하나 닿았다. 아마도 눈물이리라 짐작되는 투명한 물방울이 손에 닿자 그는 한숨을 푹 쉬었다.

" 아비가... 아비로서 잘난 거 하나없고 자격도 없는거 알아. 그래서... 할 수 있는 말이야. 그 못난 길을 여태까지 걸어와봤으니까. 그러니까... "

주랑이 남자의 손목을 잡았다. 테이블 위로 살포시 내렸다.

" 오늘... 여기서 주무시고 가면 안 돼요? "

주랑이 입술을 깨물었다. 남자의 손목을 잡은 주랑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 나... 옛날처럼 어리광 좀 부려도 돼요? "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 그건 자식한테 허락된 권리야. 이미 허락받은 거니까... 일일히 허락받지 않아도 된다. "

그 날 밤.

주랑은 많이 울었다. 그냥 울고 싶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하는 말인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인지 모르는 말을 자꾸만 했다.

" 난... 질투같은 거 안해요. 그냥 옆에만 있어주면 돼요. "

그리고 정말로 모르겠어서 아버지에게 물었다.

" 근데... 나 왜 자꾸 눈물이 나요, 아빠? "

아버지가 대답해주었다.

" 네가 그 놈을 아주 많이 좋아하나보다. "

주랑은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맞아요. 정말이에요. 정말 너무너무 좋아해요. 몇 번이나 그 말을 중얼거렸다.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충고해주었다.

" 조금은... 솔직해져도 된단다. "

============================ 작품 후기 ============================

종류: 레드와인

생산국: 프랑스

생산지: 보르도 > 포므롤

품종: 메를로95%, 카베르네프랑5%

빈티지: 2001 (작중)

알코올도수13.5%

가격은 뭐... 정해져있지는 않지만 대략 400만원선. 원래 이런거 묘사 많이 하는편인데... 향기도 맡아본적이 없으므로 묘사를 제대로 못했다는 것이 함정... 봐주세요. 저런 고가의 와인은 구경도 못해봤어요. 가난한 서민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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