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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플레이어-77화 (77/244)

00077  윤석아. 나 좀 안아줄래?  =========================================================================

* * *

한 가지 확실해진 게 있었다. 중원의 9대문파나 5대세가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아마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짐작된다- 판타리아의 12마탑에 소속된 길드원은 길드퀘스트를 수행하다가 사망하면 마도사의 자격이 박탈된다는 것이었다.

" 그래서... 난 죽으면 안됐던 거야. "

윤석은 조금 복잡한 표정으로 커피를 마셨다. 직접 만나보니 예전의 얼굴이 많이 남아 있었다. 10년이 지났다. 10년전 9살이었던 꼬맹이는 벌써 훌쩍 커서 19살이 되어버렸다. 19살답지 않은 앳된 외모지만, 그래도 게임 내에서만큼 어려보이지는 않았다.

설하와 꼭 닮은 외모. 자그마한 얼굴에 큼지막한 눈, 눈꼬리가 약간 아래로 처져서 선해보이는 인상이다. 얼핏 보면 코알라나 강아지 같은 인상인데, 윤석은 그녀를 보고 예나 지금이나 무척 귀엽다고 느꼈다. 머릿결은 굉장히 고왔다. 짧게 단발로 정리해서 그 고운 느낌이 제대로 살지는 않았지만 단발은 단발 나름대로 귀여웠다. 전체적으로 둥글둥글해 보이면서도 굉장히 말라서 키가 작은 유럽 모델에게 귀여운 얼굴을 붙여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 나 진짜 그 때 너무 고마워서 눈물이 날 뻔 했어. 그리고... 거기서 만난 오빠가 오빠라서 진짜 진짜 다행이었지 뭐야. "

그녀는 어릴 때 윤석에게 그랬던 것 처럼 편하게 반말을 하면서 헤헤- 웃었다. 붙임성 있고 깜찍했던 꼬마가 이렇게 컸다는게 신기하기도하고 또 재미있기도 했다.

윤석이 피식 웃었다.

" 그래도... 밝게 컸네 너. 꼬맹이 주제에. "

" 헹! 나 이제 꼬맹이 아니거든? 19살이거든? 이제 예비 어른이라고? "

그녀는 발끈했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 나라도 밝아야지 않겠어? 오빠도 울 언니 성격 알잖아. "

" 하긴. "

10년 전이다. 정확하게 모든 것들이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래도 설하의 성격도 기억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매사에 진지하고 조용하고 생각이 많았었다. 차분하고 정적인데, 지나치게 걱정이 많은 성격이기도 했다. 오죽하면 10년 뒤에 꼭 다시 만나자는 약속까지 했을까.

윤석이 아까부터 궁금했던 말을 결국 입 밖으로 꺼냈다.

" 설하는... 잘 지내? "

" 언니... 몸 약하잖아. "

그래... 하고 윤석은 커피를 한 입 마셨다. 오늘따라, 시럽을 넣지 않은 아메리카노가 무척 썼다. 지금 앞에 앉아있는 설아가 기특하기도 하고, 괜스레 흐뭇하기도 했다.

" 왜 그래? 그렇게 아저씨 같은 눈으로 쳐다보지 말아줘. 변태같단 말이야. "

" 뭐? 변태? "

윤석이 쿡쿡 웃었다. 나이차이가 무려 10살이나 나는데도 별로 어려워하지 않는 모습이 오히려 기꺼웠다.

" 까분다 아저씨한테. "

윤석은 그녀의 정수리에 손을 얹고서 딱 두번 쓰다듬었다.

" 나 이제 어린애 아냐 오빠. 날 좀 더 성인취급해줘도 돼. 민증도 나왔어 나. "

" 아. 그래 그러냐. "

윤석은 대충 대답하고 설아를 다시 한 번 쳐다봤다. 설아의 이야기를 듣다가 가슴 한켠이 무거워졌다. 예전부터 그렇게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다는 건 알았지만 그렇다고 또 아주 못사는 집안도 아니었다. 그냥 평범한 가정이었다. 그러다가 어느날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해서 거리에 나앉을 뻔 했단다.

설하는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고 일을 시작했고, 고등학생이던 설아도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단다. 그래서 어찌어찌 위기를 넘겼고 지금에 이르렀단다. 설아는 친구의 제안을 받아 유토피아를 직장으로 삼고 플레이하던 중, 12마탑에 소속되게 되었고 덕분에 벌이가 굉장히 많이 늘어서 가족의 생계에도 도움이 많이 되고 있다고 했다. 빚도 많이 갚았단다.

설아는 종이컵에 갈색 빨대를 꽂아넣고 쪽쪽 빨았다.

" 달다 달아. 역시 카라멜마끼야또가 최고인 것 같아. "

그리고 그 맛을 음미하듯 눈을 감았다. 두 손을 기도하듯 포개어 볼에 대고 고개를 기울였다. 맛있다 맛있어... 달다 달아... 라고 4500원짜리 카라멜 마끼야또의 맛을 음미하는 설아의 모습을 보며 윤석은 또 피식 웃고 말았다.

" 왜 비웃어? "

" 그냥. "

기분 나빠. 진짜 아저씨 같아. 미소가 이렇게 아저씨틱한 사람이 있다는 거 처음 알았어. 하고 설아는 무척 언짢은듯한 표정을 지었다가 커피잔에 시선을 고정했다. 갈색 빨대를 손가락으로 잡고서 커피잔 안에 담긴 내용물을 휘휘 저었다.

" 그 날... 우리 언니 12시까지 기다렸어 오빠. "

" 게임에서 말해줬잖아. "

" 오빠는 안 갔었어? "

윤석은 커피잔을 들어올렸다. 아메리카노가 입 속으로 들어왔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게 적당히 식어버린 아메리카노는 아까보다도 더욱 썼다.

" 안 갔어. "

" 그래. 그렇구나. "

설아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빨대를 입으로 물고서 쪽쪽 빨았다.

" 왜 안갔어? "

" 깜빡 했어. "

그 말에 설아는 또다시 빨대를 쪽쪽 빨았다. 볼이 홀쭉해졌다.

" 오빠. 나 하나 더 먹을래. "

그러면서 교복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 까분다. 내가 사줄테니까 지갑 넣어. "

19살 꼬맹이 다운건지는 모르겠다만 토끼가 그려진 분홍색 장지갑을 꺼낸 설아는 인상을 찡그렸다.

" 사준다면 사양하지 않겠지만 이게 왜 까부는거야? 내가 내거 내돈주고 사먹겠다는데. "

까분다고 말한게 아무래도 불만인 듯 했다.

" 네 나이땐 좀 더 앙탈부려도 돼. 사달라고. 그게 어릴 때의 특권이니까. "

우에... 진짜 아저씨 같다. 못 본 사이에 진짜 아저씨 됐어. 기분 나빠. 설아는 그렇게 말했지만 이내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 잘 먹겠습니다. "

윤석에게 카드를 받아들고서 카운터로 갔다. 그 뒷모습을 보면서 윤석은 마음이 복잡해졌다. 12시까지 기다렸단다.

' 몸도 약한 애가 무슨... '

지금은 모르겠지만 예전엔 정말 몸이 안좋았다. 잔병치레하는 일도 많았고, 다치는 일도 잦았다. 설아의 모습을 보니, 설하의 얼굴이 자꾸만 오버래핑됐다.

윤석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그 땐 그 때일 뿐이야. 그냥 어린 날... 장난스레 했던 약속... 그런 거. '

갑자기 떠오른 첫사랑의 기억에 흔들린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 기억에 흔들릴 만큼, 겨우 첫사랑 같이 추상적인 것 때문에 마음이 흔들릴 리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신경쓰이는 건 설하가 그날 12시까지 기다렸다가 돌아가서 앓아누웠다는 것 정도.

' 몸도 안 좋은 애가 무슨... '

그게 솔직히 조금은 신경쓰였다. 왜 12시까지 기다렸을까. 어째서. 그냥 단순히 기다렸던 것 뿐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을까.

" 오빠. 무슨 생각해? 일단 이건 엄청 고마워. 내가 나중에 성인 되면 꼭 보답할게. "

설아가 자리에 앉았다. 윤석은 갈등했다.

' 그냥... 번호만 물어보는 것 뿐이니까. 별다른 의미는 없어. '

친구 번호를 묻는 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냥 친구의 번호를 묻는 것. 딱 그 정도라고 생각했다.

" 오빠. 왜 자꾸 입을 열려다 말고 열려다 말고 열려다 말고 그래? "

방금 사온, 갈색 카라멜 마끼야또 사이에 투명하지만 분명 눈에는 보이는 네모난 얼음들이 빨대라는 노에 마구 휘저어져 딱딱대고 부딪쳤다. 갈색 액체는 중력을 무시하고 쭉쭉 빨려올라가 설아의 입속으로 들어가, 꿀꺽 목젖을 타고 다시 내려갔다.

" 그게... "

설아는 또다시 카라멜마끼야또를 쪽쪽 빨아올린 다음 핸드폰에 번호를 찍어 윤석에게 주었다.

" 우리 언니 번호야. "

" 아니. 난 딱히... "

필요 없어? 설아가 그렇게 물었고 윤석은 이내 그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번호를 저장했다.

* * *

주랑은 운전하고 있는 윤석을 옆모습을 힐끗 쳐다봤다. 그리고선 다시 앞을 쳐다봤다.

윤석을 한 번 불러봤다.

" 오빠. "

" 응? "

" 아니에요. "

시간이 조금 흘렀다.

" 오빠. "

" 응? "

" 아니에요. "

시간이 또 조금 흘렀다.

" 오빠. "

" 응? "

시간이 또 조금 흘렀다.

" 그냥 불러보고 싶었어요. "

" 그래. "

시간이 또 조금 흘렀다.

" 오빠. "

" 응? "

" 가끔 다른 생각해도 괜찮아요. "

신호가 빨간색으로 변했다. 잠깐 한눈을 팔았던건지 윤석이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윤석과 주랑의 몸이 앞으로 확 쏠렸다.

" 미, 미안. 놀랐지? "

주랑은 고개를 저었다.

" 가끔은 빨간불도 있는걸요 뭐. "

" 응? "

" 도로에는 초록불도 있고 노랑불도 있고 초록불도 있잖아요. "

윤석은 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 잠깐 생각에 빠져들었다가 결국 물어봤다.

" 무슨 뜻이야? "

" 그냥... 그렇다구요. "

주랑은 배시시 웃었다. 핸들위에 올려진 윤석에 손에 손을 얹었다. 윤석은 주랑의 손이 참 따뜻하다고 느꼈다.

" 빨간불보다는 초록불이 훨씬 길어요. 저는 제가... 오빠의 초록불이었으면 좋겠어요. "

윤석이 피식 웃었다. 갑자기 무슨 선문답인지 모르겠다.

" 무슨 말이야? "

" 그런데 초록불만 있어서는 사람들이 제대로 다닐 수가 없어요. "

초록불로 바뀌었다. 주랑은 운전에 방해되지 않도록 손을 뗐다.

주랑이 말했다.

" 저... 당분간 몹시 바쁠 거 같아요. 죄송해요. 오빠랑 연락도 자주 못할 거 같아요 일이 무진장 밀렸지 뭐에요? "

주랑은 무척 미안하다는 듯 배시시 웃으면서 자신의 머리를 한 대 콩 때렸다.

" 그래도 금방 끝날거에요. 그니까 며칠만 보고싶어도 참기. 알았죠? "

아... 난 오빠 보고 싶어서 어떻게 참지...하고 주랑은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그래...하고 대답한 윤석은 운전에 집중하려고 했다. 그런데 집중이 잘 안 됐다. 아까 민혁이 보내온 연락을 떠올렸다.

- 인마. 내가 주랑이 억지로 내보냈거든. 너무 몸 혹사시키는 거 같아서 3일 억지 휴가줬으니까... 네가 알아서 해라. 제수씨 좀 알아서 챙겨.

주랑의 집 앞에 도착해 윤석도 내렸다.

" 아이참... 안 내리셔도 되는데... "

주랑이 또각또각 걸어와 윤석의 가슴팍에 손을 얹고 윤석의 입술에 살짝 키스했다.

" 주랑아. "

" 네? "

" 잠깐... 할 말이 있는데. "

주랑이 활짝 웃었다.

" 안에서 하실 거에요? "

윤석이 피식 웃었다.

" 그래. "

주랑은 윤석에게 팔짱을 꼈다. 주랑의 표정이 무척 밝아졌다. 머리를 기울여 윤석의 어깨에 기대었다. 아... 좋다. 하고 행복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엘레베이터 안에서 윤석은 주랑의 손을 꽉 잡았다. 손가락 사이사이에 손가락을 꼈다. 집으로 올라가는 짧은 시간이지만 왠지 그러고 싶었다.

엘레베이터 문이 열리는 띵- 소리와 함께 윤석이 말했다.

" 결혼... 할래? "

============================ 작품 후기 ============================

헷갈리시는 분들을 위해..ㅋㅋ

확실한 첫사랑은 22세 때에 했고, 그 전 사랑인지 아닌지도 모를 애매한 풋풋한 감정의 시기. 18살 때  연애를 했었다고 잠깐 내용이 나옵니다. 처음 벤츠를 뽑은 날 수희의 대학교(홍대)로 가던 날에 잠깐 설명이 나왔었죵 ㅡㅡㅋ

오늘 강촌 당일치기 여행을 갔다왔는데 최고였습니다.

구곡폭포→엘리시안스키장(카드 50프로세일)→사륜바이크시승(1인 2만원)→닭갈비/막국수. 연인 혹은 가족과 함께 정말 추천할만하네요. 차로 가는 것보다 색다르달까...랄까...랄까... 덕분에 연참은...쿨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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