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1 별이 보인다 =========================================================================
* * *
" 우와! 우와~! 넓다 넓어! "
사실 그렇게 넓은 건 아니었으나 -넓기야 11인승 승합차가 훨씬 넓다- 민서는 호들갑을 떨었다. 뒷자리에 앉아 엉덩이를 이쪽 저쪽으로 움직이며 연신,
" 넓다 넓어! 엄청나! 엄청나다고! "
하고 감탄에 감탄을 더했다. 민서가 리무진같이 커다란 차도 아닌데 저런 반응을 보이니, 윤석은 내심 어이없으면서도 그리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거울로 뒷자리를 힐끗 살펴보고서 피식 웃었다. 그녀는 앉은 상태에서 두팔을 쭉 펴고 의자와 몸을 밀착시키고, 볼마저도 의자에 밀착시킨 채, " 네가 그 이름도 유명한 고급차니? " 하고 의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 안 그래도 부잣집 딸내미가 왜 저러나 몰라. '
안 그래도 차를 새로 뽑아서 기분이 좋던 차에, 리액션마저 매우 휼륭하니 -윤석은 저런 엄청난 리액션을 예능프로그램이나 드라마에서밖에 보지 못했다-, 비록 다소 과장스런 반응일지라도 괜스레 흡족한 마음이 들었다.
" 우리집도 차 바꿨으면 좋겠다. "
민서는 혼잣말을 중얼거린 뒤 입술을 잘근 깨물고는 분한 듯 중얼거렸다.
" 구두쇠 아빠. "
딸이 게임 내에서 장사한다고 1억코드나 대주는 사람이 구두쇠일 리 없잖냐. 윤석은 또다시 피식 웃었다.
' 게임 내에선 화통하지만 현실에선 구두쇠 타입도 있는건가... '
고개를 갸웃했지만 어쨌든 남의 가정사다. 오래 생각하지는 않았다.
" 그나저나 정말 나 기다리고 있던 거 맞아? "
의자와 볼을 맞대고 있던 민서가 벌떡 일어섰다.
" 물론이죠. "
수희가 옆에서 정곡을 찔렀다.
" 아냐. 쟨 나 기다리던 중이었어. "
" 네, 네가 잘 못 알았을 걸? 분명히 그럴 걸? "
" 그 오빠 바람 맞았네. 불쌍해. 아까 네가 그 오빠 표정 봤어야 되는 건데."
동생과 민서의 대화는 그렇다 치고서, 윤석은 괜스레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대화 내용은 분명 평온하기 그지없는, 일상적 대화였는데.
' 수희 기분이 왜 안 좋아 보이냐... '
수희 기분이 나빠지면 피곤해진다. 그냥 티격태격 할 때는 이 쪽이 언제나 '갑의 위치'인데, 저 쪽에서 삐치거나 화가 단단히 났을 땐 저 쪽이 '갑'이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딱 한 번 밖에 없던 일이지만 수희가 울고불고 난리를 치면 윤석으로선 속수무책이다.
' 뭐... 화가 난 표정은 아닌데. '
그걸로 위안 삼기로 했다. 일단 수희의 상태는 보류하고서, 지금 귀찮은 건 바로 민서였다.
" 오빠. 어떻게 절 버리고 울 아빠랑 계약할 수가 있어요? "
" 치맥 사줄게. "
" 한 번으로는 도저히 용서가 안 돼요. "
" 그럼 몇 번 사줄까? "
민서는 짐짓 화난 표정을 유지하고서, 그녀 스스로가 생각하기에 이글이글이라고 짐작되는 듯한 눈빛으로 윤석의 뒷통수를 노려보다가 큰 맘 먹고 말했다.
" 열 번! "
그리고 침을 꿀꺽 삼키고 주먹을 꽉 쥐고서 대답을 기다렸다. 대답은 무척이나 빨리 나왔다.
" 알았어. "
그러자 민서는 조금 아쉬워졌다. 대답이 너무 쉽게 나와서 힘이 쭉 빠졌다. 욕심을 조금 더 냈다.
" 여, 열 한 번? "
" 알았어. "
욕심을 조금 더 내기로 했다.
" 여, 열 두번! "
수희가 옆에서 인상을 찡그렸다.
" 야! 울 오빠 돈 없어! 어디까지 뜯어 먹으려는 거야? "
참고로 윤석은 유토매니아의 사장이다. 하루 거래되는 코드의 양만 전세계적으로 수 억에 이른다.
" 여, 열 두번은 너무 했나? "
수희가 단호하게 말했다.
" 열번으로 줄여. "
" 너, 너희 오빠가 열 한 번은 된다고 했어. "
" 내가 안 돼. "
아니. 이럴 수는 없어. 나는 인정할 수 없다고. 라고 말하는 듯, 민서는 억울함을 담아 구원의 눈빛을 윤석에게 보냈다.
" 수희 허락 받으면 20번도 사줄 수 있어. "
윤석의 말에 민서는 희망을 품었지만.
" 절.대.안.돼. "
라는 수희의 말에 희망은 부질없이 깨지고 말았다. 입술을 삐죽였다.
" 너무해... 남매끼리 짠 거 아냐? 난 계획된 범죄에 이용당한 가련한 여주인공이었던 걸까? "
* * *
수희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난데없이 오빠가 돈이 생겼다며 아빠를 굉장히 좋은 병실로 옮겼고, 난데없이 새 차. 그 것도 딱 보기에도 엄청 비싸보이는 자동차를 끌고 왔다. 그것 자체로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수희가 걱정하는 건 따로 있었다. 돈이 없다가 갑자기 생기면 오히려 그 돈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고 그 돈에 잡아먹혀버리는 경우가 태반이라고 들었다. 흥청망청 쓰다가 오히려 도박빚에 오른 사람, 가정이 파탄나는 경우, 주변 인간관계가 완전히 망가져버린 경우. 그런 경우를 이미 온갖 매스컴과 책을 통해 알게 됐다.
사실 다른 사람이 그러거나 말거나 어차피 수희는 상관 없다. 그런데 오빠가 그 당사자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 오빠. 나랑 얘기 좀 해. "
" 왜? "
집에 돌아온 윤석은 바지를 벗고 츄리닝으로 갈아입는데 느닷없이 쳐들어온 수희때문에 찔끔 놀랐다.
" 노크는 좀 하지? "
" 그게 중요한 게 아냐. "
" 그럼? "
" 오빠. 로또 됐어? "
도대체 수희가 무슨 말을 할까, 어깨에 힘을 꽉 주었던 윤석이 이내 힘이 빠져 침대에 철푸덕 주저앉았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 어. 로또 됐다. "
로또보다 더한 로또다. 그러고보니 밖의 일이 바쁘다 뭐다 하면서 수희에겐 제대로 알려준 적이 없다. 그저 우린 부자다! 라고 외쳤을 뿐이고 그것만으로는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했을 거다.
" 그래서 나 떡볶이 집 사준다 그러고 차 사고 아빠 병실 옮겨주고 그런거야? "
" 어. 맞아. "
윤석이 쿡쿡 웃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대박이었다. 앞으로 승승장구해 나갈 자신이 있었다.
" 오빠. "
" 왜? "
" 나 괜히 걱정하는 거 맞지? "
무슨 말을 하는건지 알겠다. 안 그래도 수희는 복권을 조금 싫어하는 편이었다. 윤석이 가끔 로또를 사서 번호를 맞추고 있을 때마다, 로또 같은 건 사람 잡아 먹는 괴물이래! 라면서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늘어놓곤 했었다.
본의 아니게 요즘 하고 있는 사업에 대해 감추어버린 꼴이 되어버렸지만 굳이 숨길 생각은 없었던 윤석이 말했다.
"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
" 그럼? "
" 엄연히 내가 피땀 흘려 번 돈이라고. "
' 진짜 피땀 흘려서 돈 버는 사람들이 들으면 좀 화낼지도 모르지만. '
어쨌든, 처음의 그 불같던 흥분은 주랑 덕택에 많이 가라앉힌 상태고 지금은 비교적 냉정을 유지할 수 있는 상태다.
" 네가 입이 닳도록 얘기하던 불행한 일들은 일어나지 않을거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
윤석이 간만에 수희와 얘기를 나누었다. 얘기를 끝까지 듣고 난 수희가 벌떡 일어섰다.
" 딱히 그런 건 아냐. "
" 뭐? "
" 난 딱히 오빠를 걱정한 건 아니라고. "
" 그래. "
윤석은 킥, 한 번 웃고는 수희의 머리를 헝크러뜨렸다. 수희는 인상을 잔뜩 찡그렸다. 하지만 윤석의 손길을 피하지는 않았다. 어깨를 움츠렸다가, 이내 벌떡 일어섰다.
" 난 그냥 오빠가 막 방황하고 그러면 또 울 엄마아빠 마음 고생 엄청 하고 그럴거니까 그게 걱정 돼서... "
그렇게 말하는 수희는 6년전에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다.
" 아씨. 하여튼 난 갈거야. 피곤해. "
" 그래. 쉬어. "
수희가 몸을 돌려 걸어갔다.
" 야 수희야. "
" 아 왜! "
윤석이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 미안타. "
윤석도 민망해져서 천장만 쳐다봤다. 애초에 이런 말 하는 게 익숙하지 않기도 했고. 수희는 흐, 흥! 코웃음치고 빠른 걸음으로 나가버렸다. 윤석이 힐끗 보니 걸음이 갑자기 빨라진 느낌이다. 아니나 다를까.
거실에서, 으악! 내 새끼발가락! 하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동생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윤석은 피식 웃었다.
' 나참. 이리도 미덥지 못한 오빠라니. '
그런데 그럴만 하다. 6년전엔 정말 한심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냥 그런,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오빠로였다. 뭔가 달라졌다거나 그런 건 없었고 그냥 물 흐르듯 살아왔던 것 같다.
' 괜히 걱정이나 시키고 말이지. '
하으으- 하고 기지개를 쭉 폈다. 졸음이 밀려들었다.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 이젠 걱정말고 항상 기대만 해라 동생아. "
피식 웃었다.
" 기대만 해도 괜찮을 사람이 되어줄테니까. "
으으- 으으윽- 하고 스스로 손가락과 발가락을 오므렸다 폈다. 나참. 진짜. 몸을 부르르 떨었다. 동생이 앞에 있으면 절대로 못할 말이고, 혼자서 중얼거리듯 해도 이토록 낯간지럽다. 시쳇말로 오그라들었다. 그래도.
' 그래도... 기분은 제법... '
눈꺼풀이 감겼다.
' 제법... '
잠에 빠져들었다.윤석이 잠들어 있는 사이, 다수 정예회에 넘겼던 스킬포토. 그러니까 군인으로써의 전직조건(중복클래스)에 충분한 양의 스킬포토가 군에게 넘겨졌다.
유토피아 세계 최초였다.
판타리아도 중원도 아닌, 얼스의 '공기관'에 몸을 담는 유저가 생겨나는 순간이었다.
============================ 작품 후기 ============================
" 너무해... 남매끼리 짠 거 아냐? 난 계획된 범죄에 이용당한 가련한 여주인공이었던 걸까? "
작가:
" 미안. 넌 엑스트라. "
" 헐! 구라치지마 이 작가 [email protected]^%$^ 야! 날 여주인공으로 격상 시켜달라!!!"
" 그럼 주랑이를 넘어서보던지;;; "
지못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