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2 사업도 슬슬 시작해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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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윤석은 기분이 좋다. 콧노래가 절로 나오고 저도 흥분해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곤 했다.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달밤에 나가 조깅을 한 적도 있을 정도다.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유토피아인지 모르겠다. 연봉 1억만해도 능력자다 해주는 세상이다. 그런데 월봉 5000억이다. 물론 이 돈은 현실의 화폐는 아니다. 게임내 화폐인 '코드'로 5000억이라는 소리다.
아이템 중개사이트에서 수수료를 떼고 현실에서도 세금을 떼면 - 게임으로 번 돈은 세금을 무려 50퍼센트 이상 떼게 될 거라는 소문도 심심찮게 들려왔다 - 금액이 많이 떨어지기도 하고, 게임내 화폐코드를 월 1조 5000억 이상 현금으로 교환이 가능할지는 미지수다.
인플레이션이나 코드가치 하락등의 몇 가지 해결되어야만하는 문제점들도 남아있다. 그래도 일단 1조 5000억이다.
일단 군에게서 받을 돈은 한달 뒤에 입금되지만, 와이투리스를 사냥해서 번 돈은 즉시즉시 결제가 되어 대략 순익으로 2억 코드가 생겼다. 겨우 10일동안 번 돈이 그랬다.
' 그러고보니... '
윤석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다시 한번 만세를 불렀다.
게임내에서 10일이다. 현실에선 3일이 조금 넘는 시간이다. 현실과 게임 속 시간의 차이를 생각해봤을 때,
' 월봉 5000억이 아니라 1조 5000억! '
모두 현금화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제 아무리 동시접속자 5억이 넘는 -지금은 5억 3천만을 넘어섰다 - 엄청난 게임이라고는 해도 1조 5000억을 단숨에 현금화하기는 어려울 게 확실했다. 그래도 일단 그건 차후문제다.
1조 5000 억이라는 그 말도 안 되는 숫자에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 중심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쇼파에 쿵! 부딪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으하하하! 웃었다.
" 오... 오빠... "
요즘 수희는 걱정이 많다. 가만히 있다가 만세를 부르질 않나 덩실덩실 춤을 추질 않나. 킬킬대고 웃질 않나. 드라마속에서 봤던 미친사람의 전형이었다.
" 수희야. "
" 어, 엉? "
" 떡볶이집 사줄게. 뭐가좋아? 죠스? 아딸? 뭐? 말만해. "
" 오빠야..."
" 말만 하라니까. 오빤 부자야. "
백수로 너무 오랜 시간을 지낸게 아닐까 싶다. 결국 수희는 너무나 걱정이 된 나머지 주랑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한번 만나보고 얘기하자고 했다.
서울 시내의 고급까페.
일반적으로 '비싸다'고 평가되는 스타벅스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사람키만한 돌벽이 울타리처럼 까페를 감싸고 있는 한적한 건물. 밖에서 보면 까페인지 아니면 고궁인지 제대로 분간이 안 됐다. 기와가 올려진 한옥식 건물인데 아이러니하게도 현판에는 'Lelouch Arabica' 영어 필기체가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것이 그렇게 위화감을 느끼게 만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한옥과 조화를 이루어 마치 품격있는 산수화를 그대로 들어 옮겨놓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와... 저 이런데 처음 와봐요. "
현관에 들어서자 오솔길처럼 생긴 돌길 좌우로 그리 높지 않은 정원수들이 위풍당당하지 않은 자태를 뽐냈다. 높지도 않고 두껍지도 않지만 어떠한 규격과 규칙을 가지고 가꾸어졌는지, 까페와 어우러져 한 폭의 수채화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 쪽에는 인공적으로 만든 개울에 맑은 물이 흐르고 있고 그 얕은 물에는 주황빛 물고기 몇마리가 헤엄치고 있었다.
주랑이 생긋 웃고는 말했다.
" 여긴 국화차가 정말 맛있어서 자주 오곤해요. "
수희는 그 모습을 보면서, 저 여자가 오빠한테는 너무 과분한 여자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쁘기도 예쁜데 웃는 모습은 더 예쁘다. 같은 여자인 자신이 봐도 넋을 잃고 볼 만큼.
그리고 대학생인 수희의 눈에 비친 , 정장과 히이힐을 매치한 주랑은 세련되고 이지적인 도시여성 같았다. 그러면서도 차갑고 도도한 느낌이 아닌 것이 신기했다. 착하고 기품있고 아름다운데 무시하기는 힘든, 하여튼 묘한 매력을 가진 여자였다. 수희는 조금 신기한 눈으로, 차를 홀짝이고 있는 주랑을 한 번씩 훔쳐 봤다. 보면 볼수록 참 신기했다. 묘한 동경이 생길 정도였다.
' 나랑 나이 차이도 많이 안나는데... '
조금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 저... 언니. "
" 네? "
" 그... 말씀 편하게 하셔도 되는데... "
" 아... 그래요. 고마워요. 신경써줘서. "
그리고선 눈웃음을 짓는 주랑은,
" 오빠한텐 너무 과분할 만큼 예쁘시네요. "
정말 예뻤다. 애인의 동생이 진심으로 해주는 칭찬에 머쓱했는지 주랑의 볼이 조금 발갛게 물들었다.
" 고마워...."
까페 - 사실 수희는, 이 곳이 까페라기보다는 유서 깊은 전통 한옥집에서 심심풀이로 차를 대접하는 곳 같은 느낌을 받았다. - 안에서 주랑과 수희는 따뜻한 국화차를 마셨다. 안 쪽은 특이하게도 통유리로 되어 있어서 바깥의 풍경이 보였다. 보기 좋은 숲을 아주 작게 축소해서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정원의 정취를 느끼면서 마시는 따뜻한 국화차의 맛은 커피와는 또다른 즐거움을 선사해주었다.
국화차를 한 모금 마시고서 우물쭈물해하는 수희를 보고 주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 오빠 때문에 보자고 한 거... 맞지? "
" 네... "
주랑은 빙그레 웃었다. 윤석의 호들갑 떠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래서 저절로 웃음이 나와버렸다.
" 좀 이상해 보인다거나... 정상은 아닌 것 같다거나... 그렇지? "
" 네... 좀... "
주랑은 여전히 그 예쁜 미소를 지우지 않고서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 요즘 좋은 일이 있어서 그래. 아마 앞으로도 며칠은 더 그럴테니까 그 때까지는 그냥 지켜봐줘. 나중에 아마 오빠가 다 설명해줄거야. "
사실 윤석은 동네방네 다 소문 내려고 했다. 내가 월봉 5000억코드의 엄청난 능력자다. 사실 윤석이 아니라 그 누구라 할지라도 자랑하고 싶어할만큼의 성과다. 연봉 1억만 해도 주위에서 우와- 대단하다! 라고 떠받들어 본다. 자랑하고 싶지 않을래야 자랑하고 싶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그걸 주랑이 입단속시켰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기로 단단히 약속을 받아냈다.
윤석이 집 안에서 히죽히죽 웃거나 만세를 부르거나 덩실덩실 춤을추는 등,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 건 아마 자랑하지 못해 답답한 속이 그러한 행동으로 표출되어 나오는 것이리라고, 주랑은 그렇게 생각했다.
' 그런 거... 알려져봤자 좋을 게 없으니까... '
처음에는 대단하다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올려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너 돈 많잖아, 조금만 빌려줘. 그렇게 나온다. 그건 확실했다.
처음엔 괜찮다.
윤석은 돈이 많다.(많아질 예정이다.) 하지만 그게 한 번이 되고 두 번이 되면 사람들은 그게 당연한 건 줄 안다. 그럼 안 된다고 당연히 생각하지만 '나 하나쯤이야 뭐.'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사실 한 두 명이면 괜찮다.
한 두명에게, 한 두번은 호의로 500만원 쯤, 100만원 쯤, 좀 더 크게는 몇 천만원쯤은 빌려줄 수 있다. 친척인데 뭐. 친구인데 뭐. 그 정도는 대수롭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게 계속되면 곤란하다. 호의가 계속되면 사람들은 당연한 건 줄 안다. 그러면 안되는 걸 알면서도 그런다. 인간인 이상 어쩔 수 없다.
주랑은 더 멀리 봤다.
돈이 많아졌다는 것을 알림으로써 얻게될, 부러움의 시선에는 별로 가치를 두지 않았다. 그보다는 윤석이 갑자기 생긴 그 재물에 익숙해지는 시간을 갖게 해주고 싶었다. 익숙해지고 그 것을 충분히 다스릴 능력이 생긴 다음에, 그 때 알려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다.
잠깐 생각에 빠졌던 주랑이 생긋 웃었다.
" 그래도 오빠 생각해서 따로 시간 내고 그럴 정도면... 오빠를 많이 생각하나봐. "
그 말에 수희는 얼굴이 약간 붉어져 국화차를 들이켰다가.
" 아, 아, 앗뜨그 뜨그! 뜨그! "
하고 캑캑대고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그리고 열심히 항변했다.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손사래를 쳤다.
" 따, 따, 딱히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하도 미친사람 같아서 그냥 그래서... "
절대로 오빠를 위해서 시간 낸 게 아니야.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마침 전화가 왔다.
- 이 기집애야! 내일 시험이라고 같이 공부하자며! 근데 너 어디있어!
수희가 입을 쩍 벌렸다.
" 헉. 맞다! 엄청 중요한 일이 있어서 깜빡하고 있었어. "
내일은 시험이었다.
'엄청 중요한 일'이라는 수희의 말에 주랑은 말 없이 빙그레 웃으며 국화차를 음미했다. 맛이 참 좋았다. 국화를 입 안에 머금은, 따스한 느낌이 온 몸에 퍼져나가 손 끝 발 끝까지 온기를 전해주는 것 같았다. 마침 밖에는 낙엽 몇 개가 바람결에 휩쓸려 떨어져 나와 통유리에 부딪쳐, 힘을 잃고 떨어지는 중이었다.
전화를 끊고서, 수희는 힘 주어 말했다.
" 저, 절대로 오빠를 위해서 시간을 냈다거나 한 건 아니에요. 그냥 언니가 보고 싶어서... "
주랑은 그 말에 딱히 반박하지는 않았다.
" 고마워. "
수희는 결국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고개를 푹 숙였다.
" 제가 언니 만난 거... 오빠한테는... "
주랑이 손을 뻗어 수희의 머리위에 얹었다.
" 알았어. 비밀로 할게. "
귓볼까지 빨개진 수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 고마워요 언니. "
* * *
일단 윤석은 코드를 현금처분했다. 금액은 약 2억원. 한번에 100만코드 정도를 사는 사람도 있었고 10만코드를 사는 사람도 있었으며 1만코드를 팔라고 요구하던 사람도 있었다. 윤석은 최소 10만코드 이상만 거래했다. 1만코드씩 처분하기엔 그 양이 너무 많았다.
' 이 것도 완전 노가다군. '
기분은 물론 좋다. 통장잔액이 늘어나니까. 그런데 그 양이 워낙에 많다보니 정신이 없다.
10만코드씩 팔아도 2억을 팔려면 2천번을 거래해야 한다. 2억만해도 그런데 천억 단위로 거래하려면 엄청난 노가다를 해야할 것만 같은 기분이다.
머리도 식힐겸 밖으로 나오려는데, 주랑에게 전화가 왔다.
- 오빠. 어디에요? 아아. 집이에요? 잘 됐네요. 할 얘기가 조금 있어요. 그 쪽으로 갈게요. 아. 그래요? 알겠어요. 여기가 어디냐면요... 응. 알았어요. 보고싶어요. 빨리와요.
주랑이 얼른 화장실로 뛰어갔다. 빨리 오라고 했지만 조금 늦게 왔으면 좋겠다. 열심히 화장을 고치는데는 시간이 아무리 많아도 부족하기만 한 것 같은 기분이다. 그래도 또 윤석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거울을 보면서 최대한 예쁘게 한 번 웃어봤다. 어떻게 웃으면 조금이라도 더 예쁘게 보일까 싶어 요즘은 거울을 보며 연습하기도 한다. 한껏 상기된 어조로 이 쪽으로 오겠다던 윤석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거울 속 주랑이 예쁘게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