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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플레이어-22화 (22/244)

00022  사표를 내다.  =========================================================================

* * *

정차장이 말했다.

" 그러니까... 자네는 그게 문제야. 이게 급하다고 말했잖나. 이거부터 해결을 하고. 그 다음에 다른 걸 했어야지. 전부터 누누이 말해왔지만 우선순위의 설정을 잘하는 것도 능력이란 말이지. "

윤석은 억울했다. 분명 정차장은 둘 다 급한 건 아니니까 천천히 하라며 엑셀작업 두 가지를 넘겨줬었다. 급한건 아니라고해서 일단 만들어야할 주변 아파트 동호수 기록 엑셀작업을 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 네네. 아 죄송합니다. 급하다고 빨리 해놓으라고 했는데... 아직 다 못한 것 같습니다. 금방해서 올리도록 할게요. "

정차장은 누군가로부터 그런 전화를 받았고 그 때부터 윤석이 괜히 불안해졌었다. 아니나 다를까. 정차장은 윤석을 불러다놓고 잔소리를 시작했다. 잔소리라고 쓰고 책임 떠넘기기라고 읽는다. 그리고 정차장은 책임 떠넘기는 것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었다.

" 어휴... 그러니까 빨리빨리 했어야지... 모든 일에 우선순위를 세워서 행동을 해야 언제나 좋은 결과가 나오는 거야. "

윤석은 외치고 싶었다.

' 씨발...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에 만들었으면 앳저녁에 만들었겠다 씨발놈아! '

게다가 이건 원래 정차장이 할 일이다. 정차장은 회사 내 회계, 그리고 서무를 담당하는 책임자였고 정차장이 작성하라며 건네준 파일은 연말 회계 정산과 관련된 파일이었다. 회사 내에서, 책임자급에서 맡아서 하는 일이었다.

' 그렇게 급한 거면 안 급하다고 말을 하지 말던지. 그것도 아니면 니가 지금 인터넷 기사 볼 시간에 작성을 하던지 이 개새끼야! '

속으로는 열불이 치솟지만 겉으로는 네, 네, 금방 만들겠습니다. 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정차장의 못 된 버릇이 또 튀어나왔다.

" 거 그 핸드폰도 좀 조금씩 볼 수 없어? 지금도 막 울리는구만. 에잉. 시끄러워서 참... "

한 번 꼬투리를 잡으면 그 꼬투리 말고도 다른 것들까지. 하나 떠오를때마다 뇌라는 필터를 거치지 않고 마구 뱉어낸다. 윤석은 정차장에게 잔소리를 듣기 싫어 핸드폰을 웬만해선 쳐다도 안 본다. 핸드폰을 쳐다보는 건 점심시간. 그리고 전화가 왔을 때 뿐이다.

전화도 자주 오는 것도 아니다. 하루에 한 번 올까 말까다. 그런데 중요한 건 하필이면 그 전화가 정차장에게 잔소리를 듣고 있는 지금 울리고 있다는 거다. 진동이라고는해도 책상에서 울리는 그 진동소리는 생각외로 꽤 컸다.

" 하여튼 빨리 끝내줘. 급한거니까. 전화는 받으시고. "

정차장은 에잉! 하고 자리에 앉아 다시 턱을 괴고 컴퓨터를 하기 시작했다. 화면이 이쪽이 아니라 제대로  보이지는 않지만 윤석은 확신했다. 저 개새끼는 또 뉴스나 뒤적거리고 있을 거라고.

복도로 나와 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부재중 전화가 무려 7통이나 와있었다. 동생인 김수희였다. 7번이나 전화를 한 김수희도 대단하고, 7번이나 전화가 올 때까지 잔소리를 해대던 정차장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수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 뭔 일인데 전화를 그렇... "

윤석은 말을 잇지 못했다. 수희가 말을 끊어버렸다.

- 오빠! 어떡해! 아빠 쓰러졌어.

수화기 저편에서 울먹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뭐? 아부지가? "

- 쓰러졌다고!

"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야! 아부지가 왜 쓰러져! "

- 어떡해... 오빠 어떡해... 응? 어떡해...?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던 윤석은 숨을 골랐다. 아무래도 수희가 장난을 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수희는 이런 걸로 장난칠 성격도 아니다. 침착하자. 침착하자. 를 몇 번이나 마음속으로 되새겼다.

"  진정해. 22살이나 먹어서 어떡하긴 뭘 어떡해! 지금 어디야 너. "

- 지금 병원... 세브란스인데. 오빠. 지금 빨리 와. 아빠 수술실 들어갔단 말이야.

아버지가 쓰러지셨단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다. 어제까지만해도 그렇게 멀쩡하시던 분이 아니던가.

' 씨발... 갑자기 무슨... '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다. 그런데 정차장이 문제다. 지금 작업을 끝내놓으라고 했다. 급하단다. 실제로 급한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급하단다.

병원에 가봐야하는데, 회사일이 발목을 잡았다. 아주 잠깐, 복도 벽에 몸을 기댔다. 복도벽은 차가웠다.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했다.

' 정차장 그 새끼도 인간인데... 보내주겠지. '

그런데, 누군가 어깨를 톡 쳤다.

" 선배님. "

주랑이다. 주랑은 희미한 미소를 띄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주랑의 미소를 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 다녀오세요. "

그녀는 사뿐사뿐, 두 걸음을 옮겨 윤석에게 가까이 걸어와 윤석을 한 번 껴안은 다음 떨어졌다.

" 그렇게 큰 목소리로 전화하시면 안 까지 다 들린다구요? 정차장님이 시키신 거 제가 하기로 했어요. 그러니까 선배님은 마음 푹 놓으시고 병원 다녀오세요. "

" 안까지... 다 들렸어? "

" 다~ 들렸어요. 얼른 반차라도 내고 병원으로 가셔야죠. 잃고나면...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으니까요.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대요. "

주랑은 윤석이 부담이라도 가질까하여 최대한 조심스럽게, 그리고 희미하게 생긋 웃었고 다녀오라며 윤석의 등을 떠밀었다. 윤석이 힘겹게 말했다.

" 미안...하다. "

" 나중에 실컷 부려먹어 줄테니까 각오하세요! "

그리고 또 허리를 숙였다.

" 다녀 오세요. "

* * *

윤석은 차에 올라탔다. 주랑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면서, 다녀오라고 말해줬다. 그것만으로도 힘이 많이 됐다. 참 이상한 일이다. 그냥 다녀오라는 말인데, 어째서 힘이 되는건지 모르겠다.

주랑에게 무척이나 고맙다. 괜찮겠냐는 물음에, 저 야근 하루 이틀정도 해도 죽지 않아요. 라고 대답해준 그녀의 마음이 너무도 고맙다. 대신 나중에 꼭 5번 넘게 웃어주셔야해요. 라고 말해주는 것도 고맙다.

병원에 가봤더니 급성 백혈병이란다. 치료하는 기간이 어떻게 되느냐에따라 천문학적인 돈을 잡아먹을 수도 있는 병. 적게는 수천만원에서 크게는 억단위도 가뿐하게 넘어가는 병이다. 급한대로 일단 필요한 돈이 500만원 가량. 덕분에 내년에 수희는 내년 등록금으로 쓰려고 모아둔 적금을 깨기로 했고 지금 살고 있는 전세집을 내놓아야 할 판이다. 하루하루 살아가기 바쁜 서민이었던 윤석의 가족은 따로이 들어놓은 보험도 없었다.

윤석은 굉장히 후회했다. 미리미리 신경써서 실손보험이라도 들어놓고 했으면 이런 난관에 부딪치지 않았을 거다.

수희가 울먹거렸다.

" 다 나때문이야 오빠... "

" 뭐가? "

" 내가 일기장에 아빠 딱 30분만 아프게 해달라고 써서... "

" 웃기지마 멍청아. 헛소리하면 너 진짜 혼날 줄 알아. "

혼 날 줄 알아. 수희가 성인이 된 이후로는 한 번도 해 본적 없는 말이다. 그런데 오늘의 수희는 그 어렸던 10대때 만큼이나 어리고 감성적으로 변해버린 것 같다. 모르긴 몰라도, 그녀에게 있어서 아버지의 존재는 굉장히 컸던 것 같다. 그래서 아버지가 쓰러진 이 시점에 그녀는 자신이 했던 그렇게도 사소한 잘못을 크게 확대해석하면서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는 것 일지도 모르겠다.

수희는 이미 한껏 울어서 눈이 퉁퉁 부어있었다. 그런데도 어디서 또 그렇게 눈물을 만들어내는건지 또 펑펑 울었다. 병원 벤치에 앉아서 수희는 그렇게 울었고 윤석은 말없이 앉아있기만 했다. 수희는 한참이나 울고나서야 조금 진정이 된 듯 했다. 그제서야 윤석이 입을 열었다.

" 다 울었냐? "

" 나 추했어? "

" 어. 지나가는 사람들 다 쳐다보더라. "

" 그래도 안 버렸네. 옛날엔 버리고 가버렸잖아. "

" 옛날은 옛날이고. 임마. 다 울었으면 돌아가야지. 밥 먹으러 나와서 밥은 못 먹고 이게 뭐하는 짓이냐. "

" 미안 오빠. 나중에 내가 밥 쏠게. "

수희와 윤석은 병실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의식을 차렸고 수술따윈 받지 않겠다며 노발대발하셨다. 수술하고 입원해서 호사누릴 돈 있으면 그걸로 밥이나 한 끼 더 사먹으시겠단다.

" 아부지... "

" 윤석아. 난 수술 안 받는다. 몸에 칼 대서 좋을 거 하나 없어. "

" 아부지... "

" 말했다! 집으로 갈거야. 병원 이 새끼들 순 사기꾼이야. 그냥 밥 잘 먹고 운동하고 하면 다 낫는다! "

윤석은 아버지인 세권에 대해서 굉장히 잘 안다. 퇴직을 하고나서도 집에 가만히 있으시지 못하시는 분이다. 젊은 사람들이 하기 꺼려하는, 고층 아파트의 벽면에 페인트칠하는 그 일이 있기만 하면 발 벗고 달려가시는 분이 바로 아버지다. 위험하고 힘들어서 다들 마다하는 일이지만, 아버지는 하나도 안 위험하고 하나도 힘드시지 않단다.

안 위험할 리 없다. 위험하다. 힘들지 않을 리 없다. 힘들다. 그런데 가족들 앞에선 그런 내색 한 번 안하신다. 그런 아버지다.

그렇게 힘겹게 번 돈은 모두 수희의 주머니에 들어갔다. 28살이 된 아들이 아직까지도 빚쟁이이고, 학자금 대출을 받아가며 학교를 다녔다는 사실을 세권은 참으로 미안해했다. 내색하지는 않았어도 그건 아비로써 천추의 한이었다. 그래서 수희에겐 뭐라도 어떻게든 더 해주고 싶어했다.

제법 머리가 굵어졌을 때, 수희는 그 돈을 안받겠다했지만 소용 없었다. 애비가 주겠다는 걸 안 받아! 호통 한 번에 그녀는 결국 그 돈을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최근 세달 전부터는, 아예 통장을 하나 만들어서 아버지로부터 받는 그 돈을 하나도 쓰지 않고 모으고 있는 중이다. 그렇게 모으고 또 아르바이트를해서 모은돈이 500만원이었다.

" 하여튼 난 수술도 안하고 입원도 안 할라니까 다들 그렇게 알아. "

" 아빠! 제대로 치료 안 받으면 죽는대! "

수희가 또  울먹거리자 세권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 시끄러워! 안 받는다면 안 받아! "

" 아빠 죽는 거 싫단 말이야! "

" 지금 안 죽어. 이 년아. 부정타는 소리할 거면 나가! "

결국 수희는 으아앙 울음을 터뜨렸고 윤석은 입술을 깨물었다. 주먹도 꽉 쥐었다. 만약 집에 돈이 많았다면, 그러니까 치료비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여길 수 있는 부자였더라면 아버지가 수술을 안받겠다고 뻗댈리 없었을 거다.

윤석은 세권을 안다.

세권은 저 스스로의 몸 보다, 가족의 안위가 더 중요하신 분이다. 제 몸 혹사시키고, 제 몸 편히 쉬실 날 없으시면서 결국 가족을 생각하시는 그런 분이다. 방법이 조금 잘 못 되었을런지도 모른다. 차라리, 그렇게 하는 것보다 수술을 받고 그냥 입원을 하는 것이 가족을 위하는 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방법이야 어찌됐든 윤석은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다.

' 씨발... '

그걸 알겠는데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장남인데. 28살이나 먹어서 저축해놓은 돈도 없다. 모닝의 할부도 끝나지 않았고 학자금대출도 아직 다 못 갚았다. 월급은 겨우 200만원이다.

' 씨발 진짜... 난 뭐하는 새끼냐... '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 잠깐 화장실 좀 갔다 올게. "

밖으로 나왔다. 화장실에서 그는 세수를 열심히 했다. 눈물 따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지 않겠다는 듯. 한심한 모습따윈 들키고 싶지 않다는 듯, 연거푸 세수를 했다.

분명히 차가운 물인데, 이상하게 눈 주변이 뜨거웠다.

============================ 작품 후기 ============================

(21편 中)

좋은 일이 계속되면 마가 낀다는데, 요즘은 왠지 그럴 것 같아서 찝찝할 지경이다. 그냥 기분 탓이겠지?

ka첨이 : 그러나 작가님이 있는이상 그건 착각이 아뉘겟쥐... [2013.01.04 01:28]

작가 曰

" 정체가 뭐냐! ........ 천잰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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