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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플레이어-21화 (21/244)

00021  사표를 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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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은 내심 주랑이 실패하길 빌었다. 그러나 역시 스나이퍼는 스나이퍼였던 모양이다. 민혁의 말을 빌리자면 현실에서 훈련된 스나이퍼는 2000미터가 넘게 떨어져있는 목표물도 정확하게 맞출 수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게임인 이 곳에서는 더욱 더 멀리, 더욱 더 정확하고 파괴력있게 명중시킬 수 있을 거란다.

그 말이 완전히 틀렸던 것은 아니었는지 주랑은 대략 몇 백미터는 위에서 활공중인 와이투리스를, 그 것도 와이투리스의 배와 꼬리 사이의, 사람으로 치자면 배꼽부근에 있는 주먹만한 크기의 보석을 깨부숴버렸다.

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맞았지... 난 분명 하늘에 쐈는데! 라는 주랑의 말이 들려온 것 같기는 했으나 제대로 듣지 못했다. 주랑이 꺅! 소리를 질렀기 때문이다.

- 어어? 아앗! 선배님 떨어져요!

커다란 새 크기로 보였던 동체가 떨어져 내리면서 점점 그 크기가 커지기 시작했다.

- 커, 커지고 있어요!

주랑은 당황해하며 현재의 상황을 육성으로 생생히 표현했다.

- 점점 커져요!

코끼리만한 크기의 와이투리스가 수백미터의 높이에서 떨어져 내리면 그건 가히 폭탄과도 같은 위력을 지닌다. 높이 솟은 나무의 끝자락은 와이투리스의 육중한 몸무게를 아주 조금도 지체시키지 못했다.

윤석이 피식 웃고 말했다.

- 저 몸에 깔리면 떡 된다.

- 어, 어떡해요! 전 떡 되기 싫단 말이에요!

- 오늘 외박한다고 약속하면 지켜줄게.

- 알았어요! 어, 어떻게든 으악!

주랑은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리를 무언가가 덮는 것 까지 느꼈다. 그리고 눈을 떴다.

-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건데?

주랑이 눈을 조심스레 떴다. 까맣던 세상이 실선으로 조금 열리는가 싶더니 이내 커졌다. 그 세상엔, 미소를 가득 담은 윤석의 얼굴이- 현실의 윤석과는 조금 다른- 보였다.

머리를 덮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윤석의 손이었다.

- 선배님!

- 그래도 몬스터 잡았는데, 설마 시체에 깔려 죽겠어? 아무리 현실같아도 여긴 게임이라고.

- 아, 알고는 있지만...

- 잡은 몬스터에 깔려죽는 게임 누가 하겠냐?

- 그, 그래도 놀랐단 말이예요!

- 어쨌든 오늘 외박은 약속한거다? 조금 있다가 집 앞으로 갈게.

- 미워요. 정말 놀랐단 말이에요.

주랑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 어지간히도 많이 놀란 모양이다, 하고 윤석은 그녀를 한 번 꽉 껴안았고 주랑은 저항하지 않았다. 다만 말로만, '미워요'라면서 거부의사를 내비췄다.

말로만 그랬다. 그렇게 이틀이 지났다. 물론 그 중에 하루, 윤석과 주랑은 밖에서 외박을 했다.

* * *

수희는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침대위에 떡하니 앉았다. 머리띠를 해서 앞머리를 뒤로 발라당 넘겼고 파자마인지 추리닝인지 제대로 분간이 안되는 털 소재의 바지를 입었다. 윗도리는 하도 입고 빨고 입고 빨고를 반복해서 누르스름하게 낡아버린 하얀색 긴팔 티셔츠다. 윤석이 인상을찡그렸다.

" 뭐야. 또 폐인 같은 몰골로? "

" 내가 폐인이고 아니고는 지금 중요한 게 아냐 오빠. "

" 그럼 뭐가 중요하냐? "

" 오빠 여자친구 생겼어? "

" 생겼다고 말했잖아. "

" 근데 왜 자꾸 외박해? "

" 네가 신경 쓸 일 아니잖아. 신경꺼라. "

수희는 벌러덩 드러누웠다.

" 야. 너 발을 어따 올려? "

" 아 미안. 베개가 여기 있는지 몰랐어. "

수희는 별로 미안하지 않은 듯한 태도로 미안하다고 말하고선 베개 위에 올려놓았던 발을 이불속에 집어넣었다.

" 근데 내 발 완전 깨끗해. 방금 뽀송뽀송하게 닦고 로션도 발랐어. 적어도 오빠 머리보단 깨끗할걸? "

" 아아. 그래.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

" 우리집은 너무 불공평한 것 같아. 왜 나한테만 엄격한 룰이 적용되고 오빠는 그렇게 자유로워? "

" 성인되면 바뀌겠지. "

수희가 벌떡 몸을 일으켜서 아빠다리로 앉았다.

" 오빠. 그게 문제야. "

" 뭐가? "

" 나 성인이 된 지 2년이나 지났다고. "

" 아 맞다. "

" 뭐? 아 맞다? "

수희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윤석을 째려봤다. 윤석은 피식 웃고는,

" 어쩌겠냐. 울 아부지가 구닥다리 사람인걸. "

하고 태평스레 말했고 그 태평스런 태도는 수희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만들었다.

" 그래서 너무 슬퍼. 22살인데 통금 11시인 사람이 도대체 어디 있냐고? "

" 잘 지키긴 하냐? "

" 그, 그래도 12시까진 들어온다 뭐. "

" 위험하니까그래. "

" 위험하긴 뭘. 내가 이번에 배운 화이어스톰으로 파바방! 해버리면... "

수희는 윤석의 눈치를 힐끔 살폈다. 아무래도 수희는 심심한 나머지, 윤석과 수다라도 떨려고 온 모양이다. 덧붙여 화이어스톰이라는 상급마법을 배웠다는 것도 자랑하고.

" 오빠. 그나저나 현캐는 잘 키우고 있어? 이번에 현캐길드가 마검사들 이겼다고 난리도 아니던데. 완전 압도적으로 밀어붙였대. 장난도 치고. "

" 그러냐? "

" 그냥 내 화이어스톰 한방이면 다 녹아버릴텐데. "

" 그 스펠을 외울 시간도 없을걸? "

" 음? 왜? 총잡이가 총쏘면 스펠 못 외워? "

" 그렇다던데. "

" 그런 말은 못 들었는데... 그러고보니... 걔네 마검사 애들도 마법을 못 쓰더라. 버프도 못 걸고. 이상하긴 했어. 오오! 오빠 똑똑한데? 다시 봤어. "

당연하지. 내가 그 총잡이들의 리더 건오퍼인데. 윤석은 그 말을 삼켰다. 동생에게 굳이 비밀로 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또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총잡이와 건오퍼에 대한 얘기는 최대한 안하는 게 나았다. 특히나 건오퍼의 존재는 호크를 제외한 그 누구도 모르는 편이 나았다.

" 이번에 헤라클레스랑 싸운다던데... 걔네 엄청 무식하대. 총잡이들 큰일 났어. 마검사한테도 데미지가 제대로 안 먹히던데... 걔넨 완전 방어력위주 탱커들이라 아예 먹히지도 않을걸? "

" 하긴...  총잡이들 데미지가 약하긴 하더라. "

" 오빠, 사실 있잖아. 헤라클레스 걔네 중에 히든클래스 있는 거 알아? "

" 히든클래스? "

" 응. 삼손. 성경에 나오는 사람이래. 힘 엄청 세대. "

" 알아. "

" 근데 약점이 있다? 되게 웃겨. 머리카락에서 힘이 나오는 사람인가봐. 머리카락이 없으면 힘을 못 쓴대. 거기가 완전 약점이래. "

종종 있다. 이상한 페널티를 가진 히든 캐릭터. 유토피아는 무작정 메리트만 주지 않는다. 메리트가 있으면 그에 합당한 페널티도 갖게 된다. 아무래도 삼손도 그런 모양이다.

" 어떻게 알았어? "

" 그냥... 어떻게 하다보니까 알았어. 악!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나 잘게 오빠. "

" 야. 거기 내 침대야. 네 방 가서 자. "

" 김수희 잡니다. 쿨쿨. "

결국 수희는 윤석에게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서야 제 방으로 돌아갔다. 아악! 엄마! 오빠가 나 때렸어! 라는 목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윤석은 피식 웃었다.

" 하여튼간 시끄럽다니까. "

* * *

오늘의 일기.

오늘은 하소연을 하기 위해 오빠방을 찾아갔다. 우리집은 나한테만 너무 엄격하다. 딸은 일찍일찍 다녀야 한단다. 완전 마음에  안들어! 아빠가 딱 3일만 아팠으면... 아니 2일... 아니 1일... 아니 내 통금인 11시 전후로 한 30분 정도만 아팠으면 좋겠다! 아니... 한 10분 정도만...

흠흠! 얘기를 돌려야지. 오늘 오빠방에 가서, 내 친구한테 미안한 짓을 했다. 그러니까 히든클래스면 숨겨야지 왜 약점을 말하냐 바보야. 이건 네 잘못도 있는거야.

오늘 넌지시 오빠를 떠봤는데, 오빠는 모르는 척 한다. 척보면 척! 오빠는 내가  크로키를 전공하고있는 미대생이란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있는 것 같다. 특징들 몇 가지만 촵촵 추려내서 촵촵 그려내면 촵촵 나온다. 촵촵.

거기 그 사람들 중 한명이 오빠라는 사실은 쉽게 알 수 있는데. 오빤 도대체 내 눈썰미의 훌륭한 능력을 모르는 것 같다. 하긴 알 턱이 없지. 세심함이라곤 눈곱 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오빠니까.

그래도 오빠. 오빠 힘내라고 난 친구를 배신했어. 삼송이를 배신한 나쁜 기집애가 됐으니까 오빤 이겨야해. 알았지?

그나저나 총잡이들 중 한 명이 울 오빠라니. 좀 놀랍긴 했다. 울 오빠는 뭘까? 일단 포병은 확실히 아니고, 스나이퍼도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역시 소총수겠지? 하긴 그게 제일 무난하다고 하더라. 데미지가 많이 안나와서 걱정인가 보던데... 뭐! 열심히 화이팅해보라구!

그래도 요즘 오빠가 좀 활기있어 보여서 나도 괜히 기분이 좋은 것 같다. 맨날 축 처져서는 나 죽었소, 하고 다녔는데 요즘은 생기도 있고 막 그런다. 괜찮은 것 같다. 나도 빨리 남자친구가 생겼으면 좋겠다.

백마탄 왕자님. 여기 아주 예쁜 수희가 있어요. 어서 데려가주세요. 뭐라구요? 안 예쁘다구요? 이걸 그냥 콱! (덮쳐버릴까보다.쪽.쪽.쪽. )

오늘의 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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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일기.

주랑과의 시간은 언제나 즐겁다. 매일매일이 꿈만 같다. 그래서 오늘도 행복,행복,행복. 이 것만 계속 채우려고 했다. 그런데 오늘은 다른 다른 얘기도 좀 써야겠다.

이게 오늘 날 떠봤다. 김수희. 내 하나뿐인 동생년. 뭔가 눈치 챈 게 아닐까 싶다. 그러면서 떠보는 꼴이라니. 아직 날 따라오려면 10년은 멀었다 이 년아.

그러면서 은근슬쩍 정보를 흘렸다. 히든캐릭터의 약점이라. 그런건 아무렇게나 구할 수 있는 정보는 아니다. 꽤 고급정보였다. 고맙긴 고맙다만, 솔직하게 물어보지 않고 떠봤으니 감사인사 같은 건 하지 않기로 했다.

뭐.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요즘은 뭐랄까, 기분이 좋다. 계속해서 좋은 일만 생기는 듯한 기분이다. 호사다마. 좋은 일이 계속되면 마가 낀다는데, 요즘은 왠지 그럴 것 같아서 찝찝할 지경이다. 그냥 기분 탓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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