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
250.
“너도 한계냐?”
루호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난 남은 H력을 가늠했다.
극히 소량. 광탄 한 발도 못 쓸 만큼 적었다.
능력발동은 할 수 있을까?
“하아아압!”
난 H력을 긁어모아 능력발동을 했다. 그리고 강제로 팔을 움직이며 전투 자세를 취했다.
“덤벼.”
끝을 내자.
루호도 날 따라서 팔을 들었다.
우리는 서로를 노려보며, 동시에 달려들었다.
“으아아아!”
힘껏 내지른 주먹.
그것은 루호도 마찬가지였다.
교차한 주먹은 서로의 뺨을 때렸고, 우리는 서로의 머리가 얼마나 흔들렸는지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었다.
머리가 세게 흔들리며 감각이 무뎌졌다.
관중의 소리.
깨진 유리 돔 위 하늘 소리.
투괴장 근처의 소리.
모든 소리가 멈췄다.
우리는 고요함 속에서 오직 서로만을 의식한 채 웃었다.
뼈가 부러지고, 유리가 박히고, H력이 바닥나고, 정신적으로 몰아붙여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난 지금 이 순간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루호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흐르면서 얼굴에 맺혀 있던 땀과 섞였다.
“혀어어엉!”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던 나와 달리 루호는 사정없이 다음 주먹을 뻗었다.
난 그 힘과 기백에 눌려 뒤로 밀리면서 조금씩 무너졌다.
좋아, 잘하고 있어.
난 쳐 맞는 와중에 감탄하고 있었다.
할 수 있는 게 없다.
남들보다 특별난 것도 없다.
그런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
그건…….
“하아, 하아.”
난 무너지던 몸을 다시 한 번 일으켰다.
쏟아지는 체액.
땀, 눈물, 피.
내게 허락된 건 일어서는 것뿐이었다.
난 루호의 공격을 온몸으로 받아 내며 버텼다.
이를 악물다가 너무 세게 문 탓에 이가 빠져도,
이 대신 잇몸과 입술을 물다가 찢어져도,
얼굴을 너무 맞아 눈이 부어서 앞이 보이지 않아도,
강대한 의지와는 달리 하도 맞아서 의식이 흐려져 가도.
난 쓰러질 수 없었다.
그것이 내가 루호에게 보여 줄 수 있는 전부였다.
“헉, 헉, 헉…….”
루호의 주먹은 점점 약해졌다. 루호는 입을 계속 벌린 채 살기 위해 숨을 쉬었다. 그러나 이내 비틀거리더니, 한쪽 무릎을 꿇었다.
“포기하지 마.”
난 나도 모르게 루호에게 말했다.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내 목소리는 똑똑히 그에게 전달됐다.
“끝나지 않았어.”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루호에게 하는 말인지 스스로 구분이 가질 않았다.
나도 그만큼 제정신이 아니었다.
루호는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그가 약했기에 그런 게 아니었다.
할 만큼 했기에 그런 것이었다.
루호가 완전히 쓰러지고,
나도 그 위에 포개졌다.
사방에서 직원들이 달려와 우리를 떼어 냈고, 플래시가 터지고, 고함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할 만큼 했어.
이제 정말 이 녀석들이랑 이별해도 될 것 같아.
난 박혁수의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켰다. 그는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정말 멋진 싸움이었어요. 당신은 정말 최곱니다.”
[승자, 김상팔]
다른 때와 달리, 이번엔 끝까지 정신을 놓지 않았다.
치료실에는 손평화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부드럽게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멋있었어요.”
난 말할 기운도 없어서 대답할 수 없었다. 대신 미소로 화답했다.
랭킹전의 마지막 주자는 주아란.
그녀는 나와 싸우며 얻은 부상이 심한 탓에 랭킹전을 기권하고 말았다.
결국 최종 스코어는 이렇다.
랭킹 82위, 호규.
랭킹 81위, 노건.
랭킹 50위, 최향자.
랭킹 49위, 적지형.
랭킹 20위, 주아란.
랭킹 2위, 조루호.
랭킹 1위, 김상팔.
나와 아란의 랭킹만이 바뀐 채 랭킹전이 끝났다.
난 다음날, 즉시 이서현에게 전화해 은퇴 의사를 전했다.
당연히 지부는 패닉 상태에 빠지고, 지부의 간부들이 계속해서 날 찾아왔다.
그러나 이서현은 끝내 찾아오지 않았다.
박혁수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지부장이 되고 나서 조금씩 전임자들을 닮아 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권력의 생리인 걸까.
내가 은퇴를 통보한 뒤로 그녀는 내 전화를 차단했다.
이젠 볼일 다 봤단 뜻인 것이다.
그나마 나한테 우호적인 박혁수를 통해 대화를 시도해 봐도 소용없었다.
전임자들의 최후를 알기에 내가 꺼림칙한 걸까.
엄연히 따져서 천민일과 김익조의 파멸은 내 탓이 아니다. 그러나 나와 나름 긴밀한 협조를 하던 그녀 입장에선 충분히 그렇게 받아들일 수도 있는 상황들이었다.
결국 지부와의 마지막은 좀 씁쓸하게 맺고 말았……다고 생각했으나,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1년 후.
나와 손평화 사이는 더 가까워졌다. 그녀는 아예 우리 집으로 와서 함께 지내고 있었다.
그녀 덕분일까?
1년간 굉장히 홀가분하게 빈둥거린 것 같다.
난 소파에 늘어진 채 커피를 홀짝이며 손평화에게 말했다.
“예전엔 아니었는데, 이젠 물만 마셔도 살찌는 것 같아요.”
난 손에 든 ‘더블 초코칩 모카 크림 카라멜 마키아토’를 수납장 위에 내려놨다.
손평화는 내 커피를 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걸 마시니까, 찌는 게 아닐까요? 앞으론 그냥 아메리카노 드세요.”
손평화는 내 반쯤 남은 커피를 집더니, 화장실로 가서 변기에 부어 버렸다. 그러나 플라스틱 컵 안쪽에 찐득하게 달라붙은 덩어리들은 그녀의 손짓을 거부하며 끈덕지게 떨어지지 않았다.
“상팔 씨, 우리 나가서 장 좀 봐요. 맛있는 거 해 줄게요.”
우리는 팔짱을 낀 채 집을 나왔다. 간만에 직사광선을 쐬니, 눈이 따가웠다.
“상팔 씨, 근데 계속 놀 거예요?”
택시를 잡아탄 후 손평화가 물었다.
헌터는 공식적으로 은퇴.
돈도 충분했기에 일할 필요를 못 느꼈다.
“좀 근질거리긴 하죠.”
알바나 할까?
난 마트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휴대전화로 구인 광고를 확인했다.
[지부에서 직원 구함.]
[각 분야는 세부 사항 확인.]
난 세부 사항을 눌러 모집 분야를 살폈다. 그리고 빙그레 웃으며 휴대전화 화면을 손평화에게 보여 주었다.
그녀는 그것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진심이에요?”
“그럼요. 저한테 딱이잖아요?”
난 운전 중인 택시 기사에게 말했다.
“기사님. 죄송하지만, 목적지 좀 바꿀게요. 한국 지부 아시죠?”
“신한국 지부요? 아님 구한국 지부요?”
택시 기사의 물음에 난 피식 웃었다.
“당연히 신한국 지부죠.”
“그렇군요. 하긴, 듣자 하니 거기다가 새로운 시설을 건설한다고 하던데요?”
“새로운 시설이요?”
“예, 그게 아마…….”
우린 택시 기사의 설명을 들으며 신한국 지부에 도착했다. 그리고 거기서 나 혼자 내리고, 손평화는 그대로 택시를 탄 채 집으로 돌아갔다.
“후우. 여길 또 오게 될 줄이야…….”
난 지부 건물로 들어가 로비에 근무 중인 직원에게 물었다.
“채용 광고 보고 왔는데요. 몇 층으로 가면 되죠?”
“혹시 김상팔 씨 아니세요?”
로비 직원이 두 눈을 크게 뜨면서 나에게 물었다.
난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맞아요. 제가 바로 김상팔입니다.”
“근데, 왜……이런 일에……?”
“적성 찾아 온 거죠.”
난 직원을 따라 4층으로 올라갔다. 구한국 지부 건물에선 헌터 정식 시험의 면접실로 쓰였던 곳이었다.
난 사무실로 보이는 곳에 준비된 벤치에 앉았다. 거기에는 나 말고도 채용 면접을 보기 위해 모인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김상팔이다!”
사람들은 날 가리키며 자기들끼리 숙덕거렸다.
“김상팔 씨.”
내 이름이 호령되고, 난 자리에서 일어나 ‘면접실’이라고 쓰인 작은 문으로 들어갔다.
한 달 뒤.
전직 헌터에서 현직 지부 직원.
난 부푼 마음을 안고 지부에 출근했다. 그리고 우연히도 1층에서 루호를 만났다.
“형?”
“안녕. 오랜만이야”
난 커피를 홀짝이며 졸린 눈을 비볐다. 커피는 당연히 손평화가 손수 챙겨 준 아메리카노였다.
“형이 왜……?”
얼빠진 루호의 얼굴이란…….
참으로 희귀한 광경이었다.
“나 여기 취직했어.”
난 목에 건 신분증을 보여 줬다.
[헌터 협회 한국 지부 지원과 훈련관 김상팔]
“훈련관? 그게 뭐죠?”
루호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지금까진 시험만 합격하면 정식 헌터가 됐잖아? 이젠 수업을 완수하면 정식 헌터 자격을 주는 거지. 변호사로 따지면, 로스쿨 같은 거야.”
“형한테 딱이네요.”
“그렇지? 그래서 면접 1분 만에 채용됐어. 넌 어쩐 일이야?”
“지부장이 뭔가 구린 일을 시키려나 봐요. 개인적으로 보자고 하더라고요.”
“개인적인 일?”
“네. 가끔 불러서 시키거든요. 거절할 수도 있는데, 자기가 알아서 증거를 뿌려 주니까 그만둘 수가 없더라고요.”
“열심히 해라. 증거 누적되면 나중에 나한테 보내 줘. 협회 본부에 아는 사람 있으니까.”
“디마 씨요?”
“어.”
난 루호의 등을 다독였다. 루호는 내 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형, 훈련관이 되신 거. 혹시 뭔가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잠입하신 건가요?”
다른 의도? 잠입?
갑자기 머리가 핑핑 돌아갔다.
“아니. 꼭 그런 건 아니야. 근데 네 이야기를 들으니까, 그것도 괜찮은 것 같은데?”
전도유망한 헌터들을 가르치면서 서서히 그들을 포섭해 라인을 만드는 것이다.
그럼 자연스럽게 파벌 생성.
지부의 힘은 거기에 속한 헌터들로부터 나온다.
지부장을 갈아치워도 달라지지 않는다면, 아예 그런 식으로 업계 자체를 장악하는 것도 좋…….
“아니야. 그래도 그건 좀…….”
난 뒤통수를 긁적이며 웃었다. 그러나 아이디어 자체는 쓸 만한 것 같았다.
“이것만 알아주세요. 형이 부르시면, 언제 어디라도 달려갈게요.”
“고맙다.”
우린 끈끈한 포옹을 하며 헤어졌다.
루호는 지부장실까지 가는 직통 엘리베이터. 난 지부 건물 옆에 새로 지어진 훈련장.
문을 열고 들어가니,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시설이 눈에 띄었다.
“구 한국지부랑 구조는 비슷한데?”
바닥에 깔린 푹신한 매트.
높은 천장.
튼튼한 강화 벽.
갖가지 훈련 도구들.
화이트보드가 있는 강단 앞에는 날 기다리고 있는 학생들이 있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전 여러분을 가르칠 김상팔 훈련관이라고 해요. 만나서 반갑…….”
학생 몇몇의 얼굴이 상당히 낯이 익었다.
불타는 고구마 4명.
최향기.
하상룡.
여섯을 포함해 20명의 헌터들이 날 쳐다봤다. 그들은 보조 헌터거나, 정식 헌터 시험에서 불합격한 이들이었다.
“와, 진짜 김상팔이다! 설마, 설마 했는데……!”
“김상팔 이름 보고 신청하길 잘했군.”
“사, 사인 해 달라고 하면 해 줄까?”
일단 내 첫 인상은 좋은 모양이다
난 개인적인 인사 대신 강단에 올라섰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 시선을 마주치며 고갯짓으로 짧게 인사를 나눴다.
할 수 있어, 난 할 수 있어.
심호흡. 처음이라 그런지 확실히 긴장이 됐다. 그나마 여섯이라도 아는 사람이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제 이름은 아시겠죠? 뭐부터 이야기할까요?”
잠시 동안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주어진 시간은 1년.
그동안 차분히 내가 아는 모든 것을 알려 줄 생각이다. 다른 건 몰라도 이들의 생존력 하나 만큼은 확실하게 끌어올려 줄 자신이 있다.
헌터로서는 은퇴했지만, ‘헤드헌터’로서의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