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헤드헌터 김상팔-223화 (223/250)

223.

223.

존댓말인데, 주어를 ‘제가’가 아니라 ‘내가’로 쓰는 화법.

흔히 대한민국의 높으신 분들이 쓰는 어투다. 딴에는 상대방에게 예의를 차린다고 하지만, 결국 속에선 얕잡아 보고 있는 것이다.

묵묵부답으로 답변.

김용은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혼자 떠들었다.

“김대팔, 당신이 보통 인물이 아닐 거라곤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당신이라도 사람 목숨을 외면하진 않겠죠?”

또 협박.

이런 사람이 랭킹 1위를 노린다니, 한심스러웠다.

“하상구 씨의 안전을 위해 김대팔 씨도 가만히 계셔 주십시오.”

“시작!”

이서현이 시작 구호를 외치고, 김용은 천천히 걸어왔다.

“설마 하상구 씨께서 다치길 원하시진 않겠죠? 하상룡 씨도 이해하셨으니, 머리가 좋으신 김대팔 씨께서도 이해하실 거라 믿습니다. 부탁드려요.”

부탁은 이럴 때 하는 게 아니야!

김용은 주먹을 쥔 다음, 팔을 뒤로 쭉 뺐다. 그리고 단번에 힘껏 뻗으며 인형 옷의 머리를 노렸다.

“응?”

공격은 실패. 그의 주먹은 티라노 인형 대가리에 스치지도 못했다.

김용은 팔을 오므리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봐, 이봐. 지금 이게 뭐 하는 거지? 이러면 하상구 씨의 목숨은 보장할 수 없겠는데?”

김용은 음성을 낮추며 담담히 속삭였다. 그리고 다시 주먹을 쥐어 인형 옷의 복부를 노렸다.

“응?”

또 회피.

김용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후우, 좋아. 하상구 씨에게 일어날 불행한 일은 모두 네 탓이 될 거야. 너 때문에 죄 없는 사람이 다칠 거라고!”

그게 왜 내 탓이야? 완전 미친놈이네? 요즘은 가해자, 피해자 기준이 달라졌나?

김용은 활짝 웃으며 전신에서 H력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양손을 모아 광탄을 만들었다.

“하아아앗!”

천천히 생성되면서 크기를 키우는 광탄. 예전에 랭킹 1위였던 사람치곤 너무나 초라한 실력이었다.

“하아, 하아, 하아…….”

김용은 힘겹게 완성한 광탄을 보여 주며 웃었다.

“이번에도 피해 보지 그래?”

김용이 던진 광탄은 마치 의지를 가진 것처럼 곡선으로 날아 필드를 빙빙 돌았다.

“하아아앗!”

김용은 하나씩 광탄을 만들어서 계속 필드 위 광탄 숫자를 늘렸다.

어느새 10개까지 늘어난 광탄은 필드 가장자리를 따라 날다가 점점 범위를 좁혀 갔다.

“어쩔 테냐? 김대팔!”

광탄들은 하나의 원형 띠처럼 질서정연하게 내가 서 있는 자리를 둘러쌌다.

“하나를 건드리는 순간, 나머지 아홉 개도 함께 터진다!”

김용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광탄 하나가 인형 옷을 살짝 스치면서 연쇄 폭발을 일으켰다.

광탄들의 폭발에 의해 인형 옷이 찢겼고, 덕분에 인형 옷 속의 신체가 조금 드러나게 됐다.

“김대……팔?”

김용은 눈썹을 들썩이면서 인형 옷 바깥으로 들어난 팔다리를 쳐다봤다.

희고 길쭉한 팔다리는 한눈에 봐도 ‘김대팔’이란 이름을 쓸 법한 외관이 아니었다.

물론 내 신체가 아니다.

망할 디마.

진짜 본인 등판이었다.

용케도 머리에 쓴 티라노대가리만은 무사했다.

“역시 제법이군. 하지만 언제까지 피할 수 있을까?”

디마는 김용의 공격을 계속 피하며 질질 시간을 끌었다.

그가 내 대신 인형 옷을 입고 시간을 끄는 동안, 난 진작 투기장을 빠져나와 헌한발 건물 공사장으로 가고 있었다.

“젠장!”

난 대기실을 떠나기 전 갑작스럽게 방문한 디마에게 인형 옷을 입혔다.

덕분에 첫 번째 대결에서 하상구의 납치를 듣자마자, 곧장 투기장을 벗어나 이동할 수 있었다.

‘최대한 시간을 끌어 주세요. 두 번째 대결이 끝나기 전에 구출해 낼게요.’

‘알겠습니다. 상팔 씨.’

난 택시를 타고 네오강화도를 벗어나 네오강서구로 가는 중이었다.

네오강화도에서 랭킹전을 한 덕에 도로는 꽤 한산한 편이었다.

“아저씨, 최대한 빨리 가 주세요! 따따블로 드릴게요.”

마법의 단어, 따따블!

총알택시는 미사일로 변해 날아갈 기세로 달렸다.

첫 번째 대결이 시작하기 전에 출발했으니, 이제 절반. 디마가 잘 버텨 주길 바랄 뿐이었다.

난 연결된 정신을 통해 대결을 지켜봤다.

디마는 팔다리가 노출된 만큼 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가만히 좀 있어!”

김용은 화를 내면서 필사적으로 광탄을 던졌다. 대결이 시작되고 줄곧 그가 공격하고 디마는 피하기만 했지만, 오히려 체력 소모는 그가 더 심했다.

“젠장…….”

지금 보여 주는 움직임으로 확실할 수 있었다.

김용은 지금껏 보여 준 것과 달리 그다지 전투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 아니다.

아마 예전 랭킹 1위의 자리는 능력 자체의 위력과 여러 공작을 통해 얻은 것 같다.

디마는 여유롭게 필드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김용을 놀렸다.

“어딜 노리시는 겁니까? 그건 제 잔상입니다.”

“하아아앗!”

김용은 지친 탓인지, 그저 디마가 놀리는 것에 정신이 팔려 계속 공격을 이어 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당신 같은 사람이 집행유예로 풀려난 건 정상이 아닌 것 같아요. 안 그렇습니까?”

디마는 김용의 주의를 끌기 위해 쭉 그를 도발했다.

“세상에 어떤 나라가 테러리스트한테 집행유예를 선고하죠?”

김용은 땀은 뻘뻘 흘리며 거칠게 숨을 쉬었다.

“후후후, 그건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야. 그리고 난 경제사범으로 입건된 거였어!”

그것부터가 많이 잘못된 것 같은데……?

어쨌든 디마는 이런저런 말을 걸면서 시간을 잘 끌어 줬다.

그러나 김용은 인내심에 한계가 온 모양이었다. 그는 아예 대놓고 모두가 들을 수 있게 버럭 소리쳤다.

“당장 기권해! 안 그러면 가만있지 않겠어!”

나중에 얼버무릴 여지를 둔 발언. 바깥의 공범에게 확실히 전달하겠단 의지가 역력했다.

‘어떻게 하죠?’

디마는 걸음을 멈추고, 나에게 물었다.

‘하는 수 없죠.’

택시는 공사장에 도착.

난 지갑에서 지폐뭉치를 꺼내 택시 기사에게 내밀었다.

“응? 자세히 보니, 손님 얼굴이 낯이 익은데?”

택시 기사는 내 얼굴을 보며 눈을 게슴츠레 떴다.

“제가 좀 흔하게 생겼거든요. 수고하세요.”

난 적당히 얼버무리고 택시에서 내렸다. 그리고 서둘러 공사장 안으로 들어갔다.

공사장은 아직 완공 전인데도 인부 한 명 없이 조용했다.

“너무 조용한데?”

난 몸을 낮추며 반쯤 지어진 건물로 들어갔다. 그러자 위쪽에서 인기척 같은 것이 들려왔다.

“좋았어!”

사뿐사뿐 계단을 걸어서 한층, 한층 올라갔다. 그리고 4층에서 드디어 하상구를 찾았다!

그는 밧줄에 묶인 채 정신을 잃은 상태였고, 그의 옆에는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가 지키고 있었다.

난 계단 난간 뒤에 몸을 숨기고 혹시나 있을지 모를 공범을 찾았다.

한편, 디마는 김용의 요구에 따라 필드에서 스스로 내려가 장외패를 당했다.

벌써 2패.

세 번째부터는 반드시 이겨야 한다!

난 슈트를 생성하면서 검은 양복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간단히 그를 제압했다.

“약하네?”

“이, 이 자식! 이거 놔! 내가 누군 줄 알아? 난 우는 아이도 뚝 그치게 만드는 헌한발의 헌터다!”

난 혀를 차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 헌한발 만든 게 나야!”

“뭐?”

난 검은 양복의 뺨을 주먹으로 후려쳐 그를 기절시켰다. 그리고 휴대전화로 경찰에 신고했다.

물론 신고 직후 빠르게 현장을 빠져나왔다. 어차피 지금 쓰고 있는 휴대전화는 대포폰이라 추적당할 일은 없었다.

난 다시 네오강화도로 가는 택시를 잡아탔다.

‘다 해결했어!’

세 번째 선수인 적지형은 내 말을 듣고는 안심하며 필드에 올랐다.

그의 상대로 올라온 사람은 바로 최강지!

“바일 형의 복수를 해 주마!”

적지형은 전의를 불태우며 이를 갈았다. 반면에 최강지는 약간 껄끄러운 듯 얼굴을 찡그렸다.

“돌멩이 다음엔 모래야?”

대결이 시작되고, 최강지는 곧장 마바일에게 필살기로 썼던 드릴을 만들었다. 그러나 처음 선보였을 때와 달리 이번 드릴은 많이 빈약했다.

아무래도 대머리가 된 탓이 컸던 모양이다.

“그딴 걸로 감히 날 이기겠다고?”

적지형은 코웃음을 치며 전신을 모래로 바꿨다. 그리고 점점 덩치를 불리더니, 거대한 모래산으로 변했다.

최강지는 그 무시무시한 모습에 뒷걸음질 쳤다.

“이, 이봐! 소식 못 들었어? 넌 나한테 져야 한다고!”

“너야말로 소식 못 들었어?”

모래산은 단숨에 모래폭풍으로 변하며 유리 돔 안을 휘몰아쳤다.

적지형의 18번 기술.

엄청난 범위에 위력도 상당하다. 그러나 H력의 소모가 심하고 폭풍이 된 상태에서도 상처를 입는단 단점이 있다.

이 기술을 깨거나, 버텨낸다면 이미 그 자체로 적지형보다 한 수 위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최강지는 아니었다.

그녀의 비명 소리가 유리 돔을 때리고, 모래가 붉게 물들었다.

“대결 종료!”

이서현의 선언에 그제야 모래폭풍이 멈췄다.

적지형이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고 유리 돔이 열리자, 필드 한가운데 쓰러진 최강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2대1.

헌한발은 자신들의 패배에 다들 당황한 눈치였다. 특히 김용은 휴대전화를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고 있었다.

물론 상대는 받지 않았다.

김용은 휴대전화를 집어던지고, 루호를 불러서 무어라 지시했다.

뻔하다.

헌한발은 한 번만 이기면 되는 상황. 거기에 더 이상 협박이 통하지 않는단 사실도 알았으니, 네 번째 대결에서 승리를 못 박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최강을 내보내야 한다.

네 번째 대결.

로얄급 두 사람이 필드에 섰다.

“우와아아!”

객석의 반응은 최고조.

다들 두 사람을 알아보며 미친 듯이 환호했다.

“드디어 제대로 된 싸움이다!”

다들 주먹을 들어 올리며 두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조루호, 조루호, 조루호……!”

“주아란, 주아란, 주아란……!”

두 사람은 필드에 서서 가만히 서로를 바라봤다. 둘의 눈빛 속엔 투지도, 살기도 아닌 다른 무언가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루호 오빠.”

“그래.”

아란은 속으로 간절히 나에 대해 말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난 투기장에 들어서기 전 현한발 팀원들에게 비밀을 지킬 것을 신신당부했다.

아란은 어금니를 씹으며 루호에게 물었다.

“왜 김용 밑에 있어요?”

아란의 질문에 루호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루호는 짧은 한숨을 쉰 후 대답했다.

“헌한발을 지키기 위해서야.”

“그래서 김용을 다시 1위로 만들어 주려고요?”

“형이 만든 헌한발을 포기할 수 없어. 난 헌한발을 지키기 위해 여기 남은 거야.”

루호는 아란의 눈을 피해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헌한발을 지켜서 김용에게 이용당하려고요?”

아란의 질책에 루호는 딱히 대답하지 못했다.

“모르겠어. 너희가 팀을 나간 심정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나로선 도저히 팀을 버릴 수 없었어.”

우물쭈물하는 루호와 달리 아란은 단호했다.

“전부터 줄곧 생각해 왔어요. 팀장님이 우리를 모아서 팀을 만든 건 단순히 출세를 하거나, 돈을 벌려는 게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요.”

뜨끔.

연결된 정신을 통해 아란의 말을 듣던 내 가슴 한쪽이 뜨거워졌다.

“전 허황된 것에 얽매이지 않을 거예요. 그게 팀장님의 가르침일 거라고 생각해요.”

아주 틀린 말은 아닌데, 갑자기 거창해지네.

“시작!”

두 사람의 대화는 이서현의 신호로 중단됐다.

둘은 H력을 끌어올리며 서로를 노려봤다. 시합이 시작된 이상 끝까지 최선을 다해 싸울 것이었다.

“하아아앗!”

아란은 H력을 다리로 모으며 외쳤다.

“더, 더, 더……!”

루호 공략법이라면 당연히 시간 끌기. 함께 싸운 동료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더 빠르게!”

최강 최속의 다리.

아란은 강화된 다리로 힘차게 필드를 박찼다. 엄청난 속도로 인해 그녀의 모습은 순식간에 자리에서 사라졌다.

루호는 아란의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빠르게 좌우를 살폈다.

분명 시간을 끌 의도라면 이리저리 움직일 것이었다.

지극히 당연한 예상.

그러나 나도, 관객도, 루호도 아란의 의도를 착각하고 있었다.

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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