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헤드헌터 김상팔-193화 (193/250)

193.

193.

이번엔 박장도 꽤 긴장됐는지, 다른 때보다 천천히 진행했다.

“찬성, 찬성, 반대, 반대…….”

내 예측대로라면 반대가 93표를 넘어가는 순간 사실상 끝이었다.

“지금 반대가……!”

[반대 : 92]

박장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내 가슴이 철렁거렸다.

“찬성, 찬성, 반대……!”

이제 그만! 그만 나와! 망할 반대 새끼야!

“반, 대!”

[반대 : 93]

“썅!”

마지노선. 이제 정말 그만 나와야 한다!

“앗!”

그때 투표용지를 쥔 박장이 비릿하게 웃었다.

“반, 대!”

[반대 : 94]

망했다.

난 테이블에 엎드렸다. 더 이상 투표를 봐도 아무 소용없었다.

“젠장, 역시 역부족이었어!”

“티, 팀장님?”

아란이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왜요?”

“스크린을 좀 보세요.”

어차피 94표가 된 이상 반대표의 총합은 108표……가 아니네?

“뭐지?”

난 스크린에 뜬 투표 결과를 보며 내 눈을 의심했다.

[찬성 : 95]

[반대 : 94]

“어떻게 저런 수가 나오지?”

매수된 사람 중에 양심선언한 사람이 있었던 건가?

나만큼이나 투표를 직접 확인한 박장은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이, 이건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결과가……?”

박장도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리며 누가 어디에 투표했는지 추측하기 시작했다.

“부지부장님?”

김용은 점잖게 박장을 불렀다. 그러나 그는 김용이 부르는 것도 모른 채 정신없이 숫자 계산만 하고 있었다.

“도대체 누구야? 어디서 이런 수가 나온 거지?”

나도 진심으로 알고 싶은데…….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부지부장님!”

내가 소리치자 그제야 박장은 단상 아래에 있는 랭킹 헌터들을 내려다봤다.

“이, 이 망할 새끼들!”

박장은 다짜고짜 우리를 향해 욕을 퍼부었다.

“이런 돌연변이 같은 새끼들! 뭐가 능력자고, 뭐가 H력이야? 너희 같은 새끼들 때문에 평범한 사람들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거야. 다 죽어 버려!”

“뭐라고?”

몇몇 헌터들이 흥분해서 벌떡 일어섰다.

“이 대머리가 또 맛이 갔냐? 당장 꺼져!”

“닥쳐! 난 부지부장이야. 이 지부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사람이라고! 그런 나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건……!”

박장은 막 소리를 지르며 단상을 내려와 어딘가로 도망치듯 사라졌다.

“어디로 간 거야?”

다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만 지었다.

잠시 후 잔뜩 초췌해진 몰골의 김익조가 직접 나타나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부지부장의 추태에 제가 대신 사과드립니다. 투표로 통과된 안건은 모두 정상적으로 진행될 것을 약속드립니다.”

김익조는 말을 마치고, 곧장 사라졌다.

“김익조 지부장이 너무 말랐는데? 원래는 좀 더 체격이 좋았는데.”

“그러게. 꼭 다이어트 부작용처럼 생겼어. 무슨 병이라도 걸렸나?”

“원래 자기 관리가 철저한 사람인데?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야?”

다들 수군거리자, 직원들이 서둘러 일을 수습했다.

“이, 이제 식사를 하겠습니다. 다들 만찬을 즐겨 주십시오.”

직원들은 각 테이블에 요리를 날라 주고는 최소한의 인원만 남은 채 퇴장했다.

“일단 건배해요. 팀장님, 또 해내셨어요!”

아란이 무알콜 샴페인을 따라 주며 말했다. 그녀의 말에 따라 다들 잔을 채웠다.

“그럼 건배할까요?”

“후후후.”

오이해가 걸어와 내 잔에 든 샴페인을 마셨다.

“약속은 꼭 지키십시오.”

“당연하죠. 그런데 혹시 조금 전 투표 결과에 대해 뭐 아시는 게 있으신가요?”

“당연히 알죠.”

오이해는 고개를 숙여 내게 귓속말을 했다.

“10표를 다 한 곳에 몰아주란 법은 없거든요.”

천, 재, 다!

오이해의 말을 듣자마자 모든 상황이 이해가 갔다.

오이해의 표를 빼면 찬성이 86표, 반대가 93표. 이 상황에 오이해는 찬성에 9표, 반대에 1표로 각각 투표한 것이다!

이렇게 하면 박장과 지부를 교란하기에 충분하다.

나조차 오이해가 말해 주기 전까진 전혀 짐작하지 못했으니까……!

“지문이 남지 않도록 장갑까지 꼈으니, 완벽하죠. 그럼…….”

오이해는 내 잔을 든 채 그대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변호사는 변호사구나!”

그렇게 랭킹 모임이 마무리됐다.

지부는 약속대로 경찰에 해당 사건을 의뢰했고, 조사가 진행되면서 더 이상 사냥 구역에서 헌터가 습격당하는 일은 사라졌다.

오이해에게 주기로 했던 200억은 태한에게 연락해 녀석이 보관 중인 내 돈 일부를 보내라고 했다.

***

“뭔가 좀 찝찝한데…….”

난 길거리를 걸으면서 이번 습격 사건에 대해 골똘히 생각했다.

“왜 랭킹 헌터만 노린 걸까?”

랭킹 헌터가 다치고, 그만둬서 누가 이득을 보지?

지부는 절대 아니다. 지부는 랭킹 헌터를 쥐어짜는 입장이기에 그들로선 유능한 랭킹 헌터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그렇다면 역시 답은 뉴 월드야.”

생각해보면 헌터 랭킹에 빈자리가 많이 생겼기에 하위권에 뉴 월드에 우호적인 성향의 랭킹 헌터가 많이 들어왔다.

당장 지난번 랭킹 모임에서 본 투표 성향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럼 뉴 월드가 본격적으로 한국지부에 침투하려는 건가?”

박장이 있으니, 정말 제대로 밀려들어 오면 답이 없다.

“왜 김익조는 이런 걸 방치하는 거지?”

인정하기 싫지만, 김익조는 일 처리 하나는 참 잘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림이 왜 자꾸 지부가 뉴 월드에게 휘둘리도록 그냥 방치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

“뉴 월드한테 약점이라도 잡혔나?”

수많은 인파 속에서 내 발걸음이 멈춘 곳은 바로 한 포장마차였다.

“우동 한 그릇이랑 맥주 한 병이요.”

오랜만에 다시 온 그곳!

좀 이른 시간이라서 그런가?

사람이 나밖에 없었다.

자리에 앉아 뜨끈뜨끈한 우동과 찬 맥주가 오는 것을 바라봤다.

“맛있게 드세요.”

아줌마는 날 알아보지 못하는지 그냥 본인 할 일만 하고 휙 돌아섰다.

“하긴, 단골인 것도 예전이지.”

본격적으로 헌한발 활동을 한 이후로는 얼씬도 안 했으니……잊으실 만하다.

“슬슬 1년이 다 되어 가나.”

난 나무젓가락을 집어 급하게 우동 면발을 흡입했다. 그리고 뻑뻑한 밀가루 면으로 인해 목이 막힐 때쯤 맥주를 한 잔 들이켰다.

“크아!”

이 맛이었어!

난 혼자만의 감탄과 감동을 느끼며 우동과 맥주를 깨끗이 먹어 치웠다.

“응?”

누군가 포장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한 1초 정도 ‘설마 또 건달이야?’라고 생각했지만, 들어온 사람은 내 상상을 초월하는 인물이었다.

“기, 김블루?”

혹은 미스터 블루.

플레잉 한국지부의 2인자이자, 실질적으로 조직을 운영하는 거물이다.

김블루는 조용히 내 테이블로 와서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우동 둘 주세요.”

이런 미친……!

이 새끼, 지명 수배자인 놈이……대놓고 이런 곳에 와서 한가하게 우동을 먹어?

그만큼 자신 있단 뜻인가?

난 잔뜩 긴장한 채 미스터 블루를 노려봤다. 그러자 그가 나긋하게 말했다.

“긴장 푸시죠. 오늘은 상팔 씨를 죽이지 않을 겁니다.”

그럼 언젠가는 죽일 거니?

내가 그래도 계속 노려보니까, 미스터 블루는 조용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누군가가 말려들어서 죽거나, 다친다면 상팔 씨 마음이 불편하시겠죠?”

미스터 블루는 노골적으로 주인 아줌마를 쳐다봤다.

난 침을 삼키며 아줌마가 우동 두 그릇을 가져와 우리에게 각각 하나씩 나눠 주는 것을 가만히 지켜봤다.

“맛있게 드세요.”

미스터 블루는 나무젓가락을 집으면서 말했다.

“드시죠.”

“전 이미 먹었는데요? 무슨 용건이죠?”

미스터 블루는 일단 우동을 한 젓가락 입에 넣은 후 오물오물 씹었다.

“간단합니다. 더 이상 뉴 월드에게 간섭하지 마십시오.”

“왜 그걸 플레잉인 당신이 참견하죠?”

시발, 이거 설마 플레잉까지 엮여 있는 거야? 그럼 사이즈가 엄청나게 커지는데?

냉정하게 생각하자면, 왜 그렇게 뉴 월드가 빠르게 세력을 키울 수 있었는지도 대충 설명이 된다.

플레잉의 지원을 받았다면…….

“그런 말을 저한테 하면 상당히 위험하지 않아요?”

우리가 아직도 헌팅 페스티벌에서 발렸던 그때 그 헌한발인 줄 아니?

“하하하.”

미스터 블루는 깨끗하단 표현이 떠오를 만큼 순박하게 미소 지었다.

“저희가 위험 따위를 신경 쓸 것 같습니까? 악당은 이미 그 자체가 위험한 존재입니다.”

그건 그렇지.

“저희는 이번 일에 총력을 쏟았습니다. 어떤 방해가 오든 그만둘 생각은 없습니다.”

선전포고.

미스터 블루가 날 찾아온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플레잉이 강하긴 해도 지부와 랭킹 헌터들한텐 안 될 걸요?”

너희, 솔직히 말해서 미즈 드래곤하고 너 빼면 나머지는 우리가 다 이길 것 같은데?

“두고 보면 알겠죠. 당신들이 로얄의 지위를 얻는 동안 저희도 놀고만 있던 건 아닙니다.”

그냥 여기서 싸울까?

무방비할 정도로 우동을 먹고 있는 미스터 블루를 보고 있으면, 정말 싸우고 싶은 마음이 컸다.

“여기 우동은……그냥 평범한 포장마차 우동이군요.”

“네. 여긴……평범한 포장마차니까요.”

뭘 더 바라니?

미스터 블루는 국물까지 다 마신 후에 주머니에서 돈을 꺼냈다.

“여기 계산해 주시겠습니까?”

우리는 조심스럽게 서로 간격을 유지하면서 포장마차를 나왔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아주 염려하고 계십니다.”

“그분?”

뜬금없는 미스터 블루의 말에 내 머리는 빠르게 회전하다가 멈췄다.

미즈 드래곤, 한백년 이야기하는 건가? 아님 설마 플레잉의 보스?

“그분이 누구죠?”

내 질문에 미스터 블루는 어깨를 으쓱였다.

“저희 보스는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 저희에겐 보스보다 더 어려운 분이죠.”

“그러니까 그게 누구냐고!”

난 의문을 참지 못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순간 주변의 이목이 우리에게로 쏠렸다.

미스터 블루는 검지를 세워서 까딱였다.

“그런 태도는 진실을 아는 데, 좋지 않습니다.”

“지금도 충분히 안 좋아!”

미스터 블루는 뒷걸음질 치며 인파로 녹아들었다. 능력이라도 쓴 것인지 한순간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당장이라도 광탄 한 방 쏘고 싶었지만, 무고한 이들을 생각해 겨우 참았다.

“젠장.”

난 잡을 수 없단 것을 알고 있음에도 인파 속을 헤매며 미스터 블루를 찾았다.

***

난 루호를 데리고 태한의 저택을 방문했다. 그리고 내 생각을 두 사람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플레잉이 뉴 월드의 배후이고, 녀석들이 뉴 월드를 이용해서 지부를 장악하려 한다는 거야?”

태한은 깜짝 놀라면서 자신도 모르게 주변을 살폈다.

방 안에는 우리 셋뿐이었다.

“아마도?”

“흠.”

태한을 팔짱을 끼면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젠장. 합법적으로 나쁜 짓하고 싶었으면, 차라리 정치인 양성이나 할 것이지!”

우리한테 만날 져서 그렇지, 사실 플레잉은 규모로만 보면 세계 최대 조직. 게다가 우리와 싸운 건 그 중 한국지부다.

“설마 다른 나라 조직원들이 온 걸까?”

그게 바로 미스터 블루가 말했던 ‘그분’의 정체?

“최근에 입국한 외국 국적의 능력자를 중심으로 조사를 하면 뭔가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 몰라.”

나와 대한은 루호를 쳐다봤다.

루호는 우리의 눈빛을 이해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기래 씨한테 부탁해 볼게요.”

“좋아. 나도 지인한테 수소문해 볼게.”

그렇게 정한 후 나와 루호는 저택을 나왔다.

“루호야.”

“네?”

난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아무래도 너희 집에서 나와야겠지?”

“편하게 좀 더 계셔도 돼요.”

루호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나 그것을 보는 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니야. 월세 집 알아봐서 곧 나갈게. 너 만날 기래 씨랑 만나는데, 내가 자꾸 밟히잖아.”

기기래가 요즘엔 아주 노골적으로 루호네 집에서 눌러앉고 있다.

이러다가 조만간 둘이 동거라도 할 기세다.

“떠날 사람이 떠나 줘야 들어올 사람이 들어오지.”

난 루호와 헤어져 그날 하루 종일 방을 구하러 다녔다.

살인적인 물가의 네오서울에서 최대한 싸고, 쾌적하고, 넓고, 소음 없는 방을 찾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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