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
180.
계속 움직여야 하기에 식량은 가벼울수록 좋고, 보관에 용이해야 한다.
물론 거기에 맛과 영양까지 좋다면 더할 나위 없다.
다들 개인 짐과 함께 공동 용품을 잔뜩 짊어졌다.
난 정문 앞에 놓인 관리기에서 특수 사항으로 들어가 사유를 세세하게 입력했다.
“좋았어.”
경고음과 함께 철문이 천천히 움직였다.
우리는 각 팀별로 서서 문 안으로 들어갔다.
“다들 여유롭게 걸으세요. 땅굴로 들어갈 때까지는 괴물하고 만날 일 없어요!”
7급의 지형은 ‘깊은 땅굴’이라고 불리며, 아주 깊다.
드래건이 서식하는 동굴 산에는 여러 갈래의 동굴에 괴물들이 각각 서식한다면, 깊은 땅굴은 하나의 거대한 굴에 여러 괴물이 구간 별로 나뉘어서 서식하고 있었다.
“아오! 왜 하필 기가트라우는 맨 끝에 있는 거야?”
근데 지부가 왜 기가트라우의 사살을 원하는가? 그것은 바로 녀석이 행하는 파괴 행위 때문이다. 깊은 땅굴은 크게 3개의 구역으로 나뉜다.
우선 출입구와 가까운 곳에 위치한 지하 1층 광야지대.
수직 통로 역할을 하는 2층인 버섯절벽.
목적지인 3층 수정지옥. 바로 이곳에 엄청난 부가가치를 지닌 ‘수정늑대’가 서식하고 있다.
그 수정늑대의 유일한 위협 대상이 바로 7급 최강체인 기가트라우인 것이다.
태한에게 들은 말에 따르면, 기가트라우는 7급 중 유일하게 구역 개념을 지니지 않은 괴물이다.
그래서 수시로 3층 전체를 들쑤시고 다니며 자신보다 약한 수정늑대와 싸우는 것이다.
지부는 주기적으로 수정늑대 사냥을 랭킹 의뢰로 내려 그 부산물을 팔아 치우고 있었다.
듣기론 무슨 슈퍼컴퓨터 부품 같은 것을 만들 때 쓰인다고 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기가트라우를 해치운 후 여유가 남으면 수정늑대도 사냥할 생각이다.
오후 3시쯤 깊은 땅굴의 입구 앞에 도착해 그곳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메뉴는 당연히 보존 식량. 딱딱하고 퍽퍽한 고형, 가루음식은 맛보단 그저 배를 채우고 칼로리를 보충하는 용도였다.
빠르게 식사를 마치고, 드디어 터널처럼 생긴 땅굴로 들어섰다.
비스듬히 경사가 진 통로는 아직까진 사람의 손길이 닿아 콘크리트 포장과 전기 형광등이 달려 있었다.
덕분에 초반 1시간은 꽤 편안하게 내려갈 수 있었다.
“아…….”
형광등과 콘크리트가 끝났다.
마치 공사를 하다만 것처럼 우리 뒤에는 잘 만들어진 터널이, 전방에는 돌이 깎이며 만들어진 자연 동굴이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공적으로 만든 통로보다 자연적으로 생성된 통로의 크기가 더 넓었다.
“자자, 여기서부터는 진형을 짤게요!”
난 모두를 불러 모았다. 그리고 내가 생각해 놓은 진형도를 펼쳐서 보여 줬다.
정찰조(3명)
호규(조장), 변해라, 도로시
지원조(9명)
최향자(조장), 김상팔, 유정, 초조선, 빙신연맹
중앙조(12명)
조루호(조장), 장마리, 주아란, 이씨 형제들
운반조(80명)
하이퍼맨(조장―노구), 한유화, 노건, 최향기, 최고의 최고, 불타는 고구마, KK마스터즈, 대한기사단
후방조(4명)
공포특급(조장―우태훈)
“이 순서로 이동할 거예요. 자신의 조와 반드시 뭉쳐서 이동하세요.”
“운반조에 너무 사람이 몰려 있는 거 아니야?”
나존귀가 물었다. 그러자 나 대신 최향자가 대답했다.
“운반조가 당하면 끝장이야! 이런 원정에서는 보급품이 우리 목숨이라는 걸 몰라서 물어?”
나존귀는 최향자의 기세에 눌려 입을 다물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진형의 의미를 풀어서 설명해 줬다.
먼저 정찰조를 짚었다.
“듣자하니 깊은 땅굴은 지하임에도 꽤 공간이 넓은가 봐요. 원반가오리인 도로시는 정밀한 비행이 가능하죠. 거기에 호규 씨의 초음파는 지형 탐지에 딱이고요. 조장은 호규 씨가 맡아 주세요.”
두 번째로 지원조.
“바로 뒤에 있으니까 바로바로 지휘를 내릴 수 있어요. 최향자 누님은 여러 사냥으로 경험이 풍부하시고, 돌발 상황에 민첩하게 대응할 수 있죠. 빙신연맹의 능력은 다방면으로 유용하고요. 조장은 최향자 누님이 맡아 주세요.”
가운데 중앙조.
“화력과 민첩성이 중요해요. 마리 씨와 루호, 그리고 아란 양은 전후좌우로 빠르게 움직일 수 있죠. 이씨 형제들의 강함은 말할 것도 없죠. 조장은 루호가 맡을 겁니다.”
다음은 가장 중요한 운반조.
“많은 짐을 책임져야 해요. 게다가 여차하면 전투에도 참여해야 하죠. 하지만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진 가급적 전투에 나서지 말고, 짐을 지켜 주세요. 예외적으로 향기 양은 능력의 특성 때문에 여기 배치했어요. 조장은 노구 씨가 맡아 주세요.”
사실 능력만 놓고 보면 최향기는 지원조가 딱인데, 경험 부족이라 운반조에 넣은 것이다.
마지막 후방조.
“공포특급 분들은 누가 뭐래도 여기서 가장 최정예시죠. 그러니 가급적이면 전력을 소모시키고 싶지 않아요. 게다가 원래 후방 경계는 가장 어려운 일이기도 하고요. 네 분은 후방을 경계하시면서, 여차하면 운반조를 지켜 주세요. 조장은……우태훈 씨가 맡아 주세요.”
“섹, 시!”
딱히 우태훈이 조장으로서 알맞다기보다는 그냥 적당히 정했다.
정찰조는 전방, 지원조는 좌측, 중앙조는 우측, 후방조는 후방.
이렇게 네 방향을 주시할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불시의 기습으로 인한 전멸을 막기 위해 각 조끼리 조금 거리를 벌릴 것을 덧붙였다.
“각 조는 조장 말에 따라 주시고요.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다들 진형대로 섰다.
그런 다음 누군가 낙오되지 않도록 몇 명 단위로 각 조원끼리 로프를 이용해 서로를 이었다.
각 조별 통신이 가능한 이어폰을 지급하고, 조장에 한해선 조장끼리 통화가 가능한 고출력 무전기도 나눠 주었다.
난 조장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원정의 총책임자였기에 따로 무전기를 챙겼다.
“출발!”
우리는 천천히, 그리고 신중하게 어둠 속으로 나아갔다.
난 마지막으로 어깨에 단 캠코더를 조작한 후 단단히 고정시켰다.
지하 1층에 해당하는 광야지대.
이곳의 특징은 바로 ‘야광’이었다.
“와!”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지하라고는 믿기지 않을 거대한 면적의 공간. 마치 초대형 돔 안에 들어온 것 같았다.
거기에 천장, 벽, 바닥 할 것 없이 모두 은은한 형광색의 빛을 내고 있었다.
“이 정도면 손전등이 필요 없겠는데?”
―조심해. 이 부근에선 항상 제노스네이크가 나와.
무전기에서 우태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 다음 곧바로 최향자의 목소리가 이어폰을 통해 이 사실을 전파해 줬다.
7급 괴물인 제노스네이크.
공포특급을 처음 만났을 땐 다들 혼자서도 해치울 수 있다고 했지만, 우리 팀으로선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전방에 뭔가 있어요!
호규의 목소리가 무전기에서 흘러나왔다.
난 무전기에 대고 빠르게 지시했다.
“전원 정지! 호규 씨, 구체적인 개체 수와 거리는요?”
―전방 10미터에 한 마리인 것 같아요. 아직 저희를 발견한 것 같진 않아요.
“계속 주시하고 있으세요. 지원조장님, 어떻게 할까요?”
내 물음에 최향자는 무전기로 대답했다.
―운반조랑 후방조는 뒤에 빠져있고, 지원조는 전진, 중앙조는 일단 대기.
다들 최향자의 말에 따라 부리나케 움직였다.
우리 지원조는 짐을 내려놓은 채 무기를 들고 앞으로 뛰어갔다.
저 멀리 공중에 뜬 원반가오리가 보였다.
―정지!
최향자의 지시에 다들 걸음을 멈췄다.
―자세를 낮추고 지금부터는 일렬로 이동해!
조장인 최향자를 필두로 유정, 초조선, 빙신연맹,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뒤에서 따랐다.
우리는 일렬로 줄지어 엉금엉금 기어갔다.
자고 있는 제노스네이크는 크기만 놓고 보면 드래건 이상이었다.
뱀이라기보다는 눈, 코, 입 달린 지렁이에 가까운 생김새였다.
―저 뱀, 자고 있는데? 김상팔, 어떻게 할까? 그냥 돌아서 갈까?
“그러죠.”
굳이 싸울 필요는 없다.
정찰조, 지원조, 중앙조까지 달려들면 해 볼 만했지만 굳이 모험을 할 필요는 없었다.
무조건 안전이 제일. 3층에 도달할 때까지 전투는 적으면 적을수록 좋았다.
“전원, 지금부터 조금 우회할 겁니다. 각 조장님들은 위치를 잘 봐주세요.”
내가 무전기에 대고 말하자, 거의 모든 인원이 H력을 뿜어냈다.
당연히 대부분 안구를 강화시켜 앞선 조의 움직임을 보려는 것이었다.
“정찰조, 조심히 움직여서 방향을 잡아 주세요. 각 조장님은 앞 조를 보고 움직여 주시고요.”
원정대 숫자가 숫자이다 보니, 순서가 얽히기라도 하면 낭패였다.
도로시는 우리를 유도하기 위해 고도를 낮춰서 저공비행 했다.
난 우리 조 뒤에 있는 중앙조의 움직임을 확인하면서 천천히 걸었다. 그런데 중앙조의 움직임이 좀 이상했다.
“엥?”
중앙조가 갑자기 많아졌다.
이게 무슨 소리냐면 말 그대로 숫자가 많아진 것이다.
난 황급히 무전기에 대고 물었다.
“중앙조, 무슨 일이죠? 이쪽에서 보니까 숫자가 많아졌는데요?”
루호의 다급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운반조 몇 명이 조를 이탈해서 저희 조까지 멋대로 온 모양이에요. 일단 제노스네이크 영역을 통과한 다음에 돌려보낼게요.
“알았어.”
염려하던 일이 바로 터졌다.
역시 아무리 계획이 철저해도 변수는 늘 일어난다.
거기에 더 최악의 상황은 운반조가 제노스네이크 옆을 지날 때 벌어졌다.
“으아아악!”
이어폰과 무전기의 통신이 아닌 육성. 땅굴이 흔들리면서 괴물이 머리를 들어 올렸다.
―깨어났다! 사격 개시!
노구의 목소리와 함께 총성이 사방에서 울렸다.
제노스네이크는 산탄과 납탄을 맞으면서 그냥 운반조를 내려다봤다.
마치 처음 보는 것에 흥미를 느끼는 것 같았다.
날아간 총알들은 녀석의 비늘에 튕겨 나가며 조금도 피해를 주지 못했다.
―젠장!
제노스네이크는 혀를 날름거리며 운반조를 노렸다. 그러나 운반조를 덮치기 직전, 중앙조가 재빨리 제노스네이크를 공격했다.
“하앗!”
이씨 형제들이 높이 뛰어올라 광탄을 쐈다.
그들이 쏜 광탄은 제노스네이크의 눈으로 날아들었다. 그러나 제노스네이크는 꼬리를 휘둘러 공격들을 모두 막아 냈다.
“지금이다!”
이십은 잔뜩 분신을 만들어 제노스네이크 앞에 세웠다. 그리고 그것들이 녀석의 주의를 끄는 동안 운반조는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
―나이스!
이씨 형제들 뒤로 루호, 아란, 장마리가 뛰어올라 거대한 광탄을 만들어서 그것들을 제노스네이크의 입안으로 던졌다.
그러나 녀석은 입안으로 들어온 광탄을 그냥 꿀꺽 삼키며 앞으로 돌진했다.
“하앗!”
이씨 형제들이 능력발현을 하면서 제노스테이크에 맞섰다.
이육은 날개를 펼치며 날아올랐고, 이칠과 이구는 각각 그의 다리에 매달려 함께 떠올랐다.
“받아라!”
이칠과 이구는 주먹탄과 광탄을 만들어 제노스네이크에게 퍼부었다.
H력으로 만들어진 에너지 덩어리들은 쉴 새 없이 날아가 제노스테이크의 눈에서 폭발했다.
“간다!”
나머지 이씨 형제들은 각각 무기를 들며 제노스네이크와 육탄전을 벌였다.
그들은 민첩함과 높은 도약으로 쉴 새 없이 움직였다.
“튄다!”
갑자기 제노스네이크가 방향을 틀어 우리 쪽으로 기어왔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 대환영이었다.
―돌격!
대검을 든 최향자를 필두로 지원조가 제노스네이크에게 달려들었다.
난 한손엔 광탄, 다른 한손엔 광권을 만들었다. 그리고 높이 뛰어올라 제노스네이크의 머리 위에 착지했다.
“하앗!”
먼저 광탄 발사. 그리고 광권을 질렀다. 큰 폭발과 함께 충격으로 제노스네이크의 머리가 흔들렸다.
그러나 녀석은 몸을 비틀거리면서도 꼬리와 머리를 움직여 헌터들을 공격했다.
“망할 자식!”
최향자의 대검이 제노스네이크의 꼬리를 막았다. 그러나 그녀의 검은 차마 녀석의 비늘을 뚫지 못하고 그냥 막는 게 고작이었다.
“공격!”
최향자의 외침에 다들 제노스네이크의 머리를 집중적으로 노렸다.
모두의 광탄이 폭발하면서 제노스네이크는 휘청거리며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했다.
“하아아앗!”
거기서 최향자의 대검이 녀석의 머리를 갈랐다! 피가 뿜어져 나오자 다들 환호성을 질렀다.
“어서 부산물을 채취해!”
운반조는 배낭을 내려놓고 부랴부랴 제노스네이크를 해체했다.
뼈에서 발라낸 내장과 비늘 등이 잘게 잘라져서 케이스에 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