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
179.
“백구, 쟤 말이야. 사슴 아니지?”
“사슴 맞아요.”
루호의 대답에도 난 믿기지 않았다.
그나저나 이제 뉴 월드의 활동이 점점 노골적이기 시작한 점이 상당히 거슬렸다.
회의가 끝나고 그날 저녁.
인터넷 뉴스에는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랭킹 헌터들도 뉴 월드의 습격을 받았단 기사가 연달아 올라왔다.
대부분 헌터들이 노련하게 대처해서 큰일로 번지지 않아서인지 인터넷 여론은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여론 조작이라도 하나?”
그것까지 생각이 미치니까 점점 불안감이 커졌다.
구지태가 면접에서 말할 때만 해도 그냥 개소리인 줄 알았는데…….
“진짜 개자식이어서 개소리를 한 거였어!”
안 그래도 지금 기가트라우 때문에 골치가 아픈데, 뭔가 더 지독한 일이 생긴 것 같다.
그런데 고작 반년 만에 이렇게까지 세력을 키우는 게 정말 가능한 일일까?
혹시 배후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에잇! 머리 아파.”
지금은 기가트라우 사냥에 집중하기로 했다.
난 목록을 작성하며 필요한 물자와 인원을 점검했다.
***
“후우.”
네오서울의 네오강남구.
대한민국을 뛰어넘어 아시아에서 단위면적이 가장 비싼 이곳은 웬 만한 원룸 하나가 일반 서민의 목숨 값보다 비쌌다.
“하아.”
또 한숨. 새로 지은 2층 단독주택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집 좋다.”
난 집이 없는데…….
요새 루호와 요망한 기기래의 사이가 뜨겁다. 그래서 조만간 나가야 할 것 같다.
“에휴.”
난 용기를 내어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세요?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스피커로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전 한국 헌터 랭킹 100위인 김상팔이라고 합니다.”
―그런데요?
“그……오늘 약속을 잡고 왔는데요?”
―약속이요? 그런 말씀은 없었는데요? 성함이 어떻게 되신다고요?
고용인이신가?
여성의 목소리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뭐, 부잣집에서 일하기 위해 버려야 하는 것 중 하나가 감정이니 당연한 것이다.
“‘김, 상, 팔’이요.”
―잠시만요.
초인종 스피커를 바라보며 한참을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마음 한구석에서는 혹시 날 잊은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김상팔 씨.
“넵!”
다시 목소리가 들려오자 너무 감격스러워 눈물이 핑 돌았다.
―들어오세요.
‘삐’소리와 함께 정문이 열렸다. 그리고 내가 마당에 발을 들여놓으니까 정문이 자동으로 움직여 스르르 닫혔다.
“엥?”
현관문이 열리며 그 안에서 사람들이 몰려나왔다.
깔끔한 머리 모양에 검은 선글라스, 똑같은 디자인의 검은 양복. 게다가 다들 건장한 체격이었다.
난 황급히 H력을 뿜어내며 능력발동을 했다.
최악의 경우 저들과 무력 충돌이 날 가능성이 있었다.
“후후후!”
검은 양복들 뒤로 짜증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난 그 소리를 듣자마자 능력발동을 해제하면서 몸에 힘을 풀었다.
“김상팔! 왔나?”
검은 양복들 사이로 나존귀가 모습을 드러냈다.
난 깊은 한숨을 쉬면서 씁쓸하게 웃었다.
“아, 안녕하세요.”
“후후후! 그래. 드디어 이 날이 왔구나.”
난 어색하게 나존귀와 시선을 교환했다. 그리고 굴욕을 씹으며 그의 앞으로 걸어가서 무릎을 꿇었다.
“하하하! 역시 세상은 날 주위로 돌고 있어!”
나존귀는 미친 듯이 웃으며 날 내려다봤다.
난 묵묵히 그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
일주일 후.
7급 사냥 구역 주차장.
우리 팀 17명은 차에서 내려 기지개를 폈다.
아침 일찍 모인 팀원들은 모두 엄숙한 표정으로 각자의 짐을 내렸다.
“다른 사람들은 아직인가 보네요?”
루호가 자기 배낭을 메면서 말했다.
난 계속 주차장을 두리번거리며 다른 차량이 오길 기다렸다.
약속 시간은 오전 11시까지.
현재시간은 10시 55분이었다.
“읏차!”
대충 예상 소요 시간은 약 20일. 그러나 우리 각자의 개인 배낭 안에는 생존 물품이나 식량 대신 사냥 도구들로 가득했다.
변해라는 전용 트레일러에서 도로시를 내렸다.
“팀장님! 저기 와요!”
유정이 활짝 웃으며 도로를 가리켰다.
아무도 없는 길 저편에서 커다란 5톤 트럭과 대형 버스 여러 대가 오고 있었다.
“며, 몇 명이나 부르신 거예요?”
호규가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난 손으로 허리를 짚으며 자신 있게 지원군을 맞았다.
“충분할 만큼이요.”
계산은 충분하다.
태한에게 들은 정보와 내 경험, 그리고 협회에서 제공하는 자료를 토대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준비를 했다.
물론 빚만 없었다면, 더 잘 준비했겠지만…….
“김상팔!”
트럭의 창문이 열리며 운전석에 앉은 노구가 머리를 내밀었다.
난 손을 흔들며 트럭과 버스를 맞았다.
트럭 뒤에서는 짐과 함께 하이퍼맨 19명이 타고 있었다.
노구와 팀원, 20명의 하이퍼맨이 트럭에서 내리며 몸을 풀었다.
“하하하! 우리를 선택한 건 정말 잘한 선택이다! 우리야말로 정말 끝내주지.”
노구의 사기가 하늘을 찔렀다.
뭐, 하이퍼맨의 용맹함이야 이미 잘 알고 있다.
“흥!”
버스들이 주차한 후 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내렸다.
검은 과부들인 최향자, 장마리, 한유화, 최향기. 그 뒤로 빙신 연맹 5명, 최고의 최고 3명, 불타는 고구마 4명……?
“잠깐!”
난 불타는 고구마에게 다가가 오박에게 헤드락을 걸었다.
“너, 누가 오라고 그랬어?”
난 부른 기억이 없다.
이번 사냥은 정말 힘들 것이기에 미성년이 있는 불타는 고구마는 진작 멤버에서 제외했었다.
“혀, 형님! 서운합니다! 어떻게 저희를 떼어 내실 생각을 하셨습니까?”
오박은 내 팔에 머리가 감긴 채로 날 끌어안았다. 그러자 김미수, 아미니, 아미리 세 사람이 내 다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오박 오빠는 약하니까, 버리셔도 돼요. 하지만 저희는 데려가 주세요!”
너희 때문에 안 되는 거야!
난 소리를 버럭 지를까 하다가 간신히 참았다.
그때 최향자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김상팔!”
“넵!”
난 헤드락을 건 채로 차렷 자세를 취했다. 덕분에 오박의 비명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그냥 데려가지 그래? 그 녀석들, 꽤 쓸 만하던데?”
“응?”
이게 뭔 소리야? 최향자가 왜 이 녀석들 편을 들지?
내가 두 눈을 크게 뜨자 불타는 고구마 네 사람이 배시시 웃었다.
“저희들, 검은 과부님들하고도 같이 사냥 다녔거든요.”
김미수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최향자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수롭지 않아 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그쪽에 대머리는 좀 그렇지만, 나머지 애들은 싹싹해서 좋더라고.”
아미니, 아미리 쌍둥이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최향자를 쳐다봤다.
그녀 옆에 서 있던 한유화도 한 마디 거들었다.
“맞아! 그러니까 너무 좀생이처럼 굴지 마.”
“좀생이가 아니라……!”
위험이 위험인 만큼 희생자가 나올 가능성이 컸다.
아무리 본인의 선택이라 하더라도 미성년자와 지인의 죽음은 충격이 클 수밖에 없다.
비슷한 이유로 주아라, 공미, 문일의 세 손가락은 부르지 않았다.
사실은 아란도 데려가고 싶지 않았지만 본인이 너무 의지가 강해서 데려온 것이었다.
“팀장님, 우리 열심히 해요. 파이팅!”
아란이 다가와 큰소리로 응원의 목소리를 냈다. 그러자 불타는 고구마도 그녀의 옆에 서서 ‘만세!’를 불렀다.
“못 살아.”
그때 주차장으로 고급 세단 다섯 대가 들어왔다.
다들 감탄사를 내뿜으며 자동차로 시선이 쏠렸다.
“왔다!”
난 오박을 풀어 주고는 긴장된 상태로 자동차에 다가갔다. 그리고 검은 양복들에게 둘러싸인 나존귀에게 고개를 숙였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존귀 님!”
“후후후!”
나존귀는 검은 양복들 사이로 걸어 나와서 크게 웃었다.
“뭐, 어쩔 수 없지. 그렇게까지 부탁하는데 거절하면 도리가 아니지 않겠어?”
나존귀와 그의……팀이라 쓰고 호위라 읽는 검은 양복 19명. 일단 정식 등록된 팀명은 ‘KK마스터즈’였다.
내가 나존귀에게 무릎까지 꿇으며 싹싹 빈 끝에 이들을 데려올 수 있었다.
이번 사냥이 원정인 만큼 실력 있는 치료술사의 존재는 필수였다. 그러나 최고의 최고 다섯 말고는 딱히 동원할 수 있는 인원이 부족했다.
그래서 지부에 등록된 치료술사들을 살펴보던 중 이들을 발견한 것이다.
이들 19명은 모두 치료술사이자, 최고 실력의 경호원이기도 했다.
“감사합니다, 나존귀 님의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후후후. 알면 됐어.”
나존귀는 우월감에 빠져 나에게 전적으로 협력해 줬다.
사냥 밑천과 우수한 전력. 이런 호구를 잡을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릴 수 있었다.
난 그를 향해 90도로 허리를 굽혔다가 새로이 들어오는 자동차를 보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오오!”
외제 스포츠카 한 대가 연기를 내뿜으며 빠르게 주차장으로 돌진해 왔다.
사람들은 우왕좌왕하며 차를 피했다.
“낄낄낄!”
포크로 철판을 긁는 듯 날카로운 웃음소리. 스포츠카에서 네 사람이 내렸다.
“설마 저 사람들은……!”
잔뜩 오만하던 나존귀도 화들짝 놀라며 잠시 움직임이 멈췄다.
사실 그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랬다.
“공, 포, 특, 급!”
여전히 흰 천 하나만 뒤집어쓰고 다니는 유령, 우태훈.
긴 머리에 바바리코트를 입은 빨간마스크, 갈리.
전신에 붕대를 칭칭 감은 채 멜빵바지를 입은 미라, 김두.
그리고 탐험대 복장을 한 손평……화?
“평화 씨, 골렘 어디 갔어요?”
손평화를 처음 본 1초 정도는 반가움에 멍했지만, 곧 그녀가 맨몸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로봇 어디 갔어요?”
로봇! 로봇! 로봇!
“상팔 씨!”
손평화는 방긋 웃으며 내 팔을 끌어안았다.
난 얼이 빠져서 다른 세 사람을 쳐다봤다.
“수리 들어갔는데?”
우태훈이 대신 대답했다.
“미리 말씀드렸잖아요?”
사실은 공포특급 멤버 중 최마군을 참여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개인적인 사유로 불참 의사를 밝혔기에 부랴부랴 KK마스터즈를 찾은 것이다.
“로봇이 이 타이밍에 고장 난 걸 어쩌라고? 그거 슈퍼타이거에서 만든 거라 걔네가 아니면 수리도 안 되거든. 그래서 시간이 좀 걸릴 거야.”
젠장!
난 동공을 떨면서 천진난만하게 웃는 손평화를 쳐다봤다. 그러나 전혀 위안이 되지 않았다.
마지막 차량. 대형 버스가 주차장에 들어왔다. 그리고 거기서 30명의 건장한 남성들이 내렸다.
하이퍼맨이 미식축구 복장이라면, 그들은 완전히 중세기사의 판금갑옷 복장이었다.
“어서 오세요, 환영합니다!”
난 쪼르르 달려가 ‘대한기사단’을 맞았다.
팀장 이성구는 내게 악수를 청하며 인사를 건넸다.
“반갑소. 잘해 봅시다.”
사극 톤의 말투. 살짝 콘셉트 냄새가 나지만 실력만 확실하다면 상관없었다.
이로써 모든 인원이 모였다.
드래건을 사냥 땐 총 인원이 30명.
나이트윙 사냥 땐 총 인원이 40명.
둘 다 꽤 규모가 컸지만 등급은 6급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상대할 기가트라우는 7급. 거기에 다른 7급 괴물과도 필연적으로 싸워야 했다.
이번 사냥에는 총 인원이 108명.
거기에 무려 로얄이 1명, 2군이 3명이다!
다들 5톤 트럭에서 하이퍼맨이 가져온 짐을 내렸다.
“최악의 경우 고립될 일까지 상정해서 넉넉히 가져왔다!”
노구는 엄지를 세우며 쾌활하게 웃었다.
한국 최대 헌터 팀인 ‘빅4’ 중 하나인 로얄가드맨의 강점은 휘하에 거느린 수많은 연맹 팀들이었다.
이 연맹은 어금니 이상의 단단한 조직력을 토대로 단순 사냥뿐만 아니라 사냥에 필요한 여러 가지 물자도 유통하고 있었다.
하이퍼맨과 대한기사단은 둘 다 로얄가드맨의 휘하 연맹이었다.
“칼로리바하고, 미숫가루를 잔뜩 가져왔지! 이거면 한 달도 버틸 걸?”
노구는 신이 나서 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