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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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망할 새끼들의 농담 따먹기를 들으며 창문 밖 풍경을 바라봤다.
자동차는 천천히 속도를 줄이며 어느 호텔로 들어서고 있었다.
“여, 여긴……!”
예전에 나이트윙 의뢰를 받았던 호텔! 그, 그렇다면 설마……!
박장을 따라 도착한 최상층 레스토랑엔 김익조가 기다리고 있었다.
“헐!”
어색한 만남. 난 안쪽 자리, 박장은 바깥쪽에 앉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날 구석에 몰아넣고는 노골적으로 쳐다봤다.
“무슨 일로 부르셨죠?”
난 일부러 강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자 두 사람은 낄낄거리며 웃었다.
“오해하셨군요.”
박장은 안경을 빼서 닦았다.
“오늘 상팔 씨를 모셔 온 이유는 정식으로 의뢰를 하기 위함입니다.”
정식 의뢰?
루호가 로얄이 된 이상 협회에서 주는 의뢰는 거절하기 힘들었다.
형식적으로는 거절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저쪽에서 해코지를 할 가능성이 높았다.
“당연히 받아 주시겠죠? 2위의 직함이라면 말입니다.”
김익조는 손에 깍지를 끼며 그 위에 자신의 턱을 얹혔다. 난 침을 한 번 크게 삼키며 물었다.
“무슨 의뢰죠?”
김익조는 한쪽 눈썹을 움찔거렸다. 그러자 박장이 품속에서 서류 한 장을 꺼냈다.
“이, 이건……!”
난 서류를 빼앗듯 받아서 급히 읽었다.
박장은 내 어깨를 두드리며 김익조 대신 말했다.
“자랑스러운 한국 랭킹 헌터 100인 중 2위시라면 당연히 가능하실 겁니다. 그 전 2위이셨던 이태한 씨는 중도 포기를 하셨지만, 헌한발 분들은 끝까지 책임감 있게 해 주시겠죠?”
난 거절할 수 없었다. 게다가 무조건 나쁜 제안만은 아니었다. 이것은 엄연히 의뢰. 성공하면 당연히 보수가 나왔다.
“저희가 알기론 상팔 씨께선 개인적으로 8억의 빚을 지고 계시는 걸로 아는데요?”
뜨끔.
박장의 말에 난 입을 열지 못했다. 그는 미리 조사를 끝낸 것인지 거침없이 말했다.
“이 의뢰를 성공시키면 빚은 단번에 사라질 겁니다. 거기에 협회에 기여를 해 놓으셔야 다음 달에 열리는 랭킹 모임에서 당당히 발언하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랭킹 모임!
박장이 모임이란 말을 언급한 걸 보면 뭔가 회의에 가까운 일인가 보다.
그렇다면 당연히 로얄의 발언이 우선시될 것이고, 또 거기서 수많은 이해득실이 오갈 게 분명하다.
“알겠습니다.”
착착 기회가 오고 있는 것이다. 나로선 거절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감사해야 될 정도다.
난 주먹을 움켜쥐면서 반드시 성공할 것을 다짐했다.
***
지부에서 요구한 괴물은 바로 기가트라우. 예전에 태한이 찍힌 영상 속 그 괴물이었다.
“젠장!”
루호네로 돌아와 태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이야?
“야, 우리 기가트라우 퇴치하라고 의뢰가 들어왔거든? 너, 그때 왜 중도 포기했어?”
난 앞뒤 생각 안하고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했다. 그만큼 지금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진정해. 너희 지부에서 정식 의뢰를 받은 거지?
“어. 거부할 수 없었어.”
스피커 너머로 태한의 신음 소리가 들렸다.
―뭐, 지금의 너희 실력이면 해 볼 만할 거야. 문제는 거기까지 가는 길이지.
“가는 길?”
―어. 기가트라우가 사는 ‘깊은 땅굴’은 여러 괴물이 각자 구역을 나누어 서식하고 있거든.
“설마 도장 깨기 하듯이 괴물 하나하나의 영역을 지나가야 하는 거야?”
이런 미친……!
난 충격에 경련을 떨 듯 윗니와 아랫니를 부딪쳤다.
―그런 셈이지. 솔직히 나도 해치울 수는 있었는데 돌아갈 걸 계산해서 포기한 거거든. 기가트라우가 땅굴 제일 안쪽에 사는 놈이니까, 오가는 것까지 계산해야 해.
“거의 원정대를 꾸려야 되겠네?”
―그렇지.
역시 이럴 줄 알았어.
난 전화를 끊고 급히 루호를 불렀다.
부엌에서 앞치마를 둘러맨 루호가 다가왔다.
“무슨 일이세요?”
난 간략하게 지금 일을 설명했다. 그러자 루호도 나처럼 미간을 찌푸렸다.
“심각하군요.”
“그렇지? 근데 루호야, 너 왜 요리를 하니?”
오늘은 내가 식사 당번인데?
루호는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저녁 식사에 손님이 오기로 했거든요. 그래서 제가 하려고요.”
“손님?”
바로 그때 벨이 울렸다. 루호는 다시 부엌으로 돌아가고 내가 문을 열어 줬다.
“기기래 씨?”
“안녕하세요! 루호 씨는요?”
난 온몸을 대자로 뻗으며 기기래의 진입을 막았다.
“루호 없어요. 외출했어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예요? 루호 씨 신발 다 보이잖아요! 루호 씨!”
기기래의 부름에 루호가 쪼르르 나타났다.
루호를 보자 기기래는 날 밀치며 거실로 들어왔다.
“헤헤, 저 또 왔어요.”
“어서 오세요.”
두 사람은 서로에게 방긋 웃으며 인사를 나눴다.
“루, 루호야…….”
지금 이럴 때가 아닐 텐데?
난 기기래에게 질투의 눈빛을 보내다가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다시 나갈 채비를 하며 신발을 신었다.
“형, 어디 가세요?”
“나 외식하고 올게.”
형 그렇게 눈치 없는 사람 아니야.
난 어깨를 늘어뜨리며 집을 나갔다.
개집 속에 엎드려 있던 백구가 고개를 쭉 내밀어 날 바라봤다. 그리고 사슴 주제에 혀를 차면서 고개를 저었다.
“야, 이 사슴 새끼야! 너 지금 이 상황 알고 그러는 거지?”
아무리 봐도 사슴이 아닌 것 같은데…….
난 백구를 지나쳐 마을버스에 몸을 실었다.
“외롭다.”
버스 창문에 입김을 불어 뿌옇게 만들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웃는 얼굴을 그렸다.
“다른 사람들은 뭐하려나?”
호규, 유정, 아란, 해라, 노건, 이이. 모두 전화가 꺼져 있었다.
이것들이 지금 단체로 나만 왕따 시키나?
난 이를 갈면서 창밖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민지한테 차일 때도 이런 분위기였지…….”
민지. 첫사랑치곤 너무나 큰 상처를 남긴 이름이다.
난 과거를 꾹 누르며 휴대전화의 메신저를 확인했다. 그러나 손평화에게 사과 문자를 보냈음에도 여전히 답장이 없었다.
“화났나?”
당연하겠지.
손평화는 데이트 약속이 깨진 이후로 연락이 안 됐다.
버스가 시내 한 정거장에 도착하고, 난 조용히 그곳에서 내렸다.
“후후후.”
우수에 젖어 밤거리를 걷는 가을 남자.
간만에 허세와 낭만이 폭발하면서 적적함을 즐기는 심정이 되었다.
바닥에 떨어진 낙엽, 살짝 추운 바람, 그리고 둘씩 붙어서 걸어다는 망할 커플들!
“엥?”
저 멀리, 유정과 노건이 내 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난 황급히 꺾이는 골목에 몸을 붙였다. 그리고 날 지나쳐 가는 두 사람을 똑똑히 확인했다.
“이거 뭐야? 연말이 다가와서 그런가? 왜 다들 커플이 되고 난리야? 커플 안 되면 죽는 전염병이라도 도는 거야?”
그래도 행복하게 웃는 두 사람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놓인다.
둘 다 상처가 있는 만큼 서로를 통해 행복했으면 좋겠다.
“춥다.”
난 몸을 웅크리며 골목을 나왔다. 그리고 평소 자주 가는 카페로 들어갔다가 나왔다.
“망할 커플들!”
카페에 자리가 없었다.
난 허탈한 마음으로 거리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모텔이나 갈까?”
가서 영화 한 편 틀어넣고 자기 위로나 해야지.
참고로 자기 위로란 뮤지컬 영화를 보면서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퍼먹는 행위를 뜻한다.
무료했는데, 마침 휴대전화가 울렸다. 난 발신자도 안 보고 얼른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끌끌끌!
재수 없는 웃음소리!
듣자마자 눈물이 핑 돌았다.
“아저씨?”
―우리 상팔이, 출세했네? 루호를 2위로 만들다니, 아주 잘했다! 이제 네가 1위 되는 일만 남은 거냐?
아저씨의 칭찬에 난 피식 웃으며 답했다.
“1위는 힘들 것 같아요. 사실 루호 2위도 반쯤 억지로 만든 거거든요.”
만약 스페셜 매치에서 김익조가 대량 손해를 보지 않았다면?
만약 오이해가 나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만약 협회에서 2위 쟁탈전 자격을 돈 받고 팔지 않았다면?
만약 이씨 형제들이 우리 팀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하나하나가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난 그렇게 생각한다.
―안다. 하지만 진짜 고난은 지금부터다. 이젠 정말 더럽고 치사하게 나올 거야.
“김익조가요?”
―글쎄?
“돌아오시면 안 돼요?”
난 본심을 담아 물었다.
팀의 이익상으로 아저씨 수준의 치료술사가 계시면 당연히 사냥의 성공률과 생존율이 올라갈 테고, 개인적으로는 내 마음속에서 아저씨의 빈자리가 컸다.
―상팔아. 내 말 명심해라. ‘누구’든 적이 될 수 있어. 지금 너희는 그런 입장이야.
아저씨는 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발신자를 확인했지만, ‘발신자 표시 제한’이라고 쓰여 있었다.
“하아.”
기가트리우 원정에 함께 해 주시면 참 좋을 텐데…….
또 혼자가 되고 말았다. 난 정처 없이 시내를 걸었다.
“왠지 느낌상 김대팔이나, 디마 중에 하나를 만날 것 같은데?”
난 두리번거리며 두 사람을 찾아다녔다.
저쪽에서 찾기 전에 내가 먼저 찾아가겠단 심산이었다. 그러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이것들은 막상 찾을 땐 아무데도 안 보였다.
“젠장! 디마, 김대팔! 아무나 나와라!”
자포자기. 미친놈처럼 길거리 한가운데서 소리쳤다. 그러자 내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으으으악!”
깜짝 놀라서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무슨 귀신이냐?
내가 황급히 고개를 돌리자 시야에 들어온 것은 디마였다.
“상팔 씨, 부르셨어요?”
“왜, 왜……?”
너무 놀라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디마는 장난스런 표정으로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같이 걸으면서 이야기할까요?”
젠장. 이 여유가 정말 싫다.
난 디마의 손을 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우리는 함께 거리를 걸었다.
“설마 절 미행하고 있었던 건 아니죠?”
내 질문에 디마는 멋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죠. 하지만 지금 전 네오서울의 거리를 구경하고 있습니다. 정말 아름답네요!”
“그래요?”
또 능구렁이처럼 넘어가네.
“네. 뭐랄까, 특색 없는 게 매력적이거든요. 서양 같기도 하고, 동양 같기도 한 그 근본 없는 다국적 분위기가 정말 좋아요.”
욕이야, 칭찬이야?
우리의 시선에 한 집회가 보였다. 거기에는 뉴 월드를 정식 종교로 인정해 주길 바라는 활동이 펼쳐지고 있었다.
“사, 살벌한데?”
[국토의 뉴 월드 소유화 추진!]
[국교 인정으로 국론 통일!]
[이교도 말살로 국민 구원!]
팻말에는 그야말로 사이비라는 게 뭔지 확실히 쓰여 있었다. 거기에 마이크를 들고 맨 앞에 선 구지태의 말은 선동을 넘어 광기를 보여 줬다.
“전지전능하신 예카테리나께서 강림하셨으니 곧 대통령을 몰아내고 전국을 뉴 월드의 믿음 아래 이끌어 주실 겁니다! 종교의 자유가 우리를 지켜 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정말 폭동이라도 날 기세다. 치료술 하나 갖고 이젠 전지전능이라고?
우리는 몸서리를 치면서 집회 현장을 돌아갔다. 그러다 문득 박장이 뉴 월드 티셔츠를 입고 있던 것이 생각났다.
“설마…….”
별일 없겠지? 김익조가 개새끼지만 그래도 명색이 지부장인데…….
이건 내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다. 그렇게 마음을 정리했다.
“뉴 월드가 점점 커지네요.”
사실 며칠 전 루호가 2위가 된 기사가 더 크게 보도돼서 그렇지, 저들에 대한 기사도 꽤 여러 번 보도됐다.
디마도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동의했다.
“저런 건 전 세계 어딜 가도 있더라고요. 그냥 얽히지 않는 게 상책이죠.”
“그건 그렇죠.”
우리 옆 도로로 수십 대의 경찰차와 경찰 버스, 오와 열을 맞춘 의경들이 지나갔다. 그리고 조금 지나서 아까 집회가 열렸던 장소에서 큰 소란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