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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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있어요!”
“알아요.”
익숙한 목소리. 바로 디마였다.
“뭘 그렇게 쑥스러워하세요, 같은 남자끼리?”
디마는 그렇게 말하며 당당히 자신의 덜렁이를 덜렁거렸다.
빤히 보이는 그의 물건은 그야말로 우람함 그 자체였다.
“후후후.”
디마는 내 옆에 서서 함께 비누칠을 했다.
“대단하시네요, 상팔 씨.”
“뭐가요?”
난 디마가 볼까 봐 몸을 살짝 다른 쪽으로 돌렸다.
“천하의 김익조 지부장님을 게거품 물게 만들다니, 정말 대단하세요. 이건 보통 일이 아닙니다. 이젠 정말 헌터 업계에서 당신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오히려 건드려선 안 될 사람들을 잔뜩 건드린 것 같은데요?”
분명 스페셜 매치 결과로 태한은 최소 500억 이상의 돈을 따냈다. 그러나 그 돈을 달라 하기가 애매한 게, 분명 태한을 감시하는 움직임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익조 입장에선 만약 태한에게서 나에게로 자금이 움직일 경우 승부 조작으로 충분히 수사를 진행할 수 있다.
그렇기에 적어도 향후 몇 년간은 그 돈을 묻어 둘 수밖에 없다.
배 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난 배를 문지르며 푸념하듯 말했다.
“배고프네요.”
“오! ‘나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이런 뜻인가요? 대단한 야심가시군요!”
아니다, 이 악마야!
이를 갈면서 배시시 웃었다.
“우리, 씻는 일에만 열중하면 안 될까요?”
“앞으로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랭킹전도 물 건너갔으니, 더 이상 랭킹을 올리실 수단이 없잖아요?”
끄응, 할 말 없게 만드네.
고개를 숙이며 약간 비굴한 얼굴로 묵묵히 물을 틀었다. 뺨을 타고 내려오는 물방울이 눈물처럼 뚝뚝 떨어져 발등을 두드렸다.
“상팔 씨.”
디마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왜요?”
이젠 슬슬 짜증이 난다. 안 그래도 배고파 죽겠는데! 빨리 씻고 밥 먹어야 하는데!
내가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묻자 디마의 입에서 아주 놀라운 말이 나왔다.
“조만간에 지부에서 랭킹 모임을 소집할 거예요. 강제는 아니지만 꼭 참석하도록 하세요. 알았죠?”
이 사람, 정체가 뭘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전 이만…….”
말을 마친 디마는 샤워를 끝내고 자기가 들어온 문으로 나갔다.
잠시 멍한 상태로 그가 나간 방향을 응시했다. 그러다가 한 번 더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자 그제야 샤워를 서둘렀다.
“밥, 밥, 밥!”
어째 점점 아저씨처럼 변해 가는 것 같다. 자괴감을 느끼며 샤워를 끝낸 후 태한이 준비해 준 양복을 입었다.
“오! 딱 맞아.”
비싼 건가? 옷에서 향기까지 난다!
원래 입고 온 옷은 잘 개서 배낭에 넣었다. 그리고 배낭을 다시 멘 채 방을 나왔다.
“결혼 축하해요.”
태한과 다시 제대로 인사했다. 녀석은 내 팔을 잡으며 반갑게 말했다.
“이제야 좀 사람 같아.”
“그래? 하하하.”
즐겁게 대화하는 분위기를 내다가 태한은 날 가까이 끌어서 속삭였다.
“돈은 나중에 기회를 봐서 줄게.”
“괜찮아. 천천히 줘.”
떼먹지만 말아 줘, 제발!
“상팔 씨!”
응?
고개를 돌려 보니 기기래와 공포특급이 함께 서 있었다. 특히 손평화는 자신의 옆에 선 기기래와 이상한 눈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야! 인기 많네?”
남주나가 달려와 내 명치에 주먹을 꽂았다. 그런 다음 내 머리를 팔로 감아서 헤드록을 걸었다.
“으아아악!”
“히히히! 제법이야. 이거 완전 바람둥이였잖아?”
“주나야, 상팔 씨 좀 그만 괴롭혀라.”
어째 이거 데자뷔 같은데? 왜 난 가는 곳마다 취급이 이렇지?
배가 고프니까 더 서글펐다. 그렇게 결혼식이 진행되고 나서 난 손평화와 단 둘이 카페에 가게 되었다.
“우리 오늘 데이트 할래요?”
오늘 처음 안 사실인데, 손평화가 은근 성격이 있다.
뭐, 헌터란 직업이 좀 거칠지 않으면 못 버티는 일이긴 한데…….
설마하니 기기래를 쫓아낼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응?”
난처해서 대답을 미루고 있는데 저 멀리서 루호가 나타났다!
난 유리창을 두드리며 루호를 불렀다.
“루호야! 나 여깄어! 루호야!”
“형!”
날 발견한 루호는 반가운 얼굴로 카페로 들어왔다.
루호를 본 손평화는 고개를 푹 숙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데이트 중이셨어요?”
생각지도 못한 루호의 질문. 손평화는 그 말을 듣자마자 손으로 책상을 치면서 벌떡 일어섰다.
“네!”
“그, 그렇군요.”
나와 루호는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합석해도 될까요? 오늘 상팔 형하고 만나기로 했거든요?”
“네?”
손평화가 두 눈을 크게 뜨면서 날 돌아봤다.
난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하하……하…….”
손평화는 절레절레 고래를 저었다.
“그럼 오늘은 그냥 갈게요. 대신……!”
손평화는 내 손을 잡으며 간곡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에 꼭 데이트해요, 알았죠?”
“그, 그래요.”
다행히 손평화가 순순히 떠나 주었다. 덕분에 루호와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어휴! 숨 막혀 죽을 뻔했다. 빨리 와 줘서 고마워.”
“형……바람둥이셨군요.”
“아니야! 너까지 왜 그래?”
“하하하. 알았어요, 그만 놀릴게요.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이제 다시 팀 사냥을 개시하는 건가요?”
루호는 빠르게 본론을 꺼냈다.
“그, 그게……. 루, 루호야…….”
난 머뭇거리며 가장 자신 없는 투로 물었다.
“나……너희 집에 가서 라면 좀 끓여 주면 안 되냐?”
루호는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저 좋아하세요?”
“응, 좋아해!”
앗! 이거 그건가?
대답하자마자 대뇌의 전두엽에서 ‘병신!’이라고 외치는 아저씨의 환청이 들렸다.
“아니, 다른 의미로 좋다는 게 아니야! 동생으로서 좋아한다는 소리였어. 하하하.”
“그렇군요. 그런데 갑자기 라면은 왜요? 응?”
루호의 시선은 천천히 움직여 내가 좌석에 내려놓은 배낭에까지 다다랐다.
“머물 곳이 필요하신 거예요?”
“응. 원래는 아저씨한테 신세 지려고 했는데, 연락이 끊겨서…….”
루호는 약간 김빠지게 웃더니 상냥하게 눈웃음을 지었다.
“괜찮아요. 얼마든지 머무르셔도 돼요.”
“루호야! 고마워!”
90도로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루호는 내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등을 통해 루호의 H력이 내 몸 안으로 들어왔다. 참 따뜻한 손짓이었다.
***
며칠 뒤. 버스를 타고 지부로 향했다.
이제 늦가을이라 그런지 쌀쌀한 바람에 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와! 차 봐라.”
주차장엔 저번처럼 갖가지 외제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알록달록한 차들은 어째 짠 것처럼 같은 차종이 하나도 없었다.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건 사람은 바로 태한이었다.
“무슨 일이야?”
“오늘 랭킹 모임 날이지?”
“응. 넌 어디야?”
태한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난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벌써 온 거야?”
“아니. 난 가지 않을 거야.”
“그래. 하란 씨는 잘 지내?”
“응. 아주 행복해. 오늘 전화한 건 할 말이 있어서야. 조금 있으면 어차피 알게 되겠지만, 그래도 내 입으로 직접 알려 주고 싶었어.”
태한의 목소리가 좀 갑갑했다. 아무래도 뭔가 안 좋은 내용인 것 같았다.
“뭔데?”
태한이 말해 준 내용에 난 깜짝 놀라며 얼어붙었다.
어쩐지……결혼식 날 악수를 할 때, 스페셜 매치 때 그 망할 멸치의 태도……이제야 모든 게 이해가 됐다.
“잘 지내. 슬슬 끊어야겠어.”
난 전화를 끊고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태한은 자기 나름대로 행복을 찾은 것이니 딱히 나쁜 일이라고 할 수는 없다.
게다가 재산도 빵빵하니……나한테 동정받을 처지는 결코 아니다. 반대라면 모를까…….
지부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직원 하나가 전담 마크처럼 붙어서 35층으로 안내했다.
“밥이다!”
35층 연회장. 그곳에는 이미 테이블 위에 갖가지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난 접시를 집어서 음식을 흡입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을 대충 살펴보니, 로얄 몇과 2군 몇, 그리고 그 이하 랭킹의 헌터 30여 명이 있었다.
“뭐야? 김상팔이잖아?”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순간, 연회장에 있는 모든 이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유명세가 있다는 건 참 귀찮은 일이다. 하다못해 부와 권력이라도 있으면 그나마 괜찮은데…….
포크로 파스타를 말아서 입안에 가득 쑤셔 넣었다.
적어도 연회장에 모인 랭킹 헌터들이 과거와는 다른 눈으로 날 보고 있단 점은 정말 큰 성과였다.
“잘 지내셨습니까?”
오이해가 뒤로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난 입으로 파스타를 씹으며 대답했다.
“네. 잘 지냅니다.”
오이해는 테이블 위의 냅킨을 뽑아 나에게 건넸다.
난 그것을 받아 입을 닦았다.
“제 연락처로 계좌번호를 보내 주십시오. 그럼 바로 입금해 드리겠습니다.”
“예?”
입금?
돈이 궁핍해서 그런지 눈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일단 꿀꺽 삼켜서 입안을 비우고 또박또박 물었다.
“무슨 말씀이시죠?”
“말했잖습니까? 40퍼센트 보상한다고요.”
오, 이, 해! 내가 당신을 잘못 봤어!
이제 보니 엄청 좋은 사람이었잖아……예전에 나였다면 분명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나에게는 그의 호의가 뻔히 보인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오이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연회장 맨 앞에 차려진 단상 위로 박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놀랍게도 그는 상의로 ‘00’이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저거 뉴 월드잖아?”
불길한 느낌이 관자놀이를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침착하게 생각해 보자면 ‘00’이란 문양을 반드시 뉴 월드만 사용하는 건 아니었다.
일단 잠자코 파스타를 먹으며 박장의 말을 기다렸다.
“그럼 지금부터 중대 발표를 하겠습니다!”
스크린이 쭉 내려왔다. 그러자 연회장 불이 일시에 꺼지고 스크린에 영상이 비춰졌다. 그리고 박장의 목소리가 영상과 함께 들리며 발표가 시작됐다.
“오늘 이렇게 여러분을 모이시라고 한 이유는 바로 로얄에 빈자리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난 착잡한 심정으로 포크를 움직였다. 스크린에는 한 가지 숫자가 띄워졌다.
[2]
“네! 바로 헌터 랭킹 2위! 저번 주에 이태한 씨가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그러니 그분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새로운 2위를 선정하기로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냥 기존 3위 이하의 랭킹을 1위씩 상승시키거나, 1군과 2군만 부르면 그만이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 모인 사람 중에는 나처럼 로얄과 다소 거리가 먼 사람도 있다.
“중요한 사항인 만큼 회의에 회의를 거듭한 결과, 지부에서는 가급적 모든 랭킹 헌터 분들께 기회를 드리자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취지는 나쁘지 않네. 디마가 말한 게 바로 이거구나!
“단! 도전하시려는 분들께선 지부에 참가비를 납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그렇지. 얼마를 내야 하는 걸까?
액수를 상상하고 있는데 어둠 속에서 사람들이 돌아다니며 각 테이블에 종이 같은 것을 올려놓고 있었다.
당연히 내가 앉은 테이블에도 종이가 놓여졌다.
“구체적인 액수는 지금 직원들이 나눠 드린 문서에 쓰여 있습니다. 나중에 확인해 주십시오. 참가비를 납부하신 분들께는 개인적으로 연락이 갈 겁니다. 지금 당장 말씀드릴 수 있는 사항은 이게 전부입니다.”
“지금 장난하냐? 거액을 내라고 하고선 심사 기준이나 경쟁 방법도 안 알려 줘? 미쳤냐!”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특히 단상과 가까운 로얄과 2군 자리에서 노골적인 원성이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