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
155.
“훌륭한 묘책이십니다.”
김익조도 김용을 보며 웃었다. 그는 내 손을 놓은 후 자기 자기로 돌아갔다.
빚을 변제하면 오이해에게 남은 자금은 1362억.
김익조가 이번 배팅에서 올인을 하면 추측하건대 그 이상을 동원할 수 있단 뜻으로 해석된다.
5명 중 3명 안에만 들면 낙승. 김용이야 1930억으로 1위였으니 안전권이고, 이태한은 554억, 난 빚을 빼면 541억이다.
“적지형에게 2724억!”
[김상팔 vs 적지형 1]
김익조의 우람한 외침에 다들 박수와 환호를 했다.
“쩐다! 이거 실화야?”
“대박! 지부장님 짱이십니다!”
“하하하! 후끈후끈 달아오른다!”
난 거기에 맞서서 팔찌에 외쳤다.
“김상팔에 541억!”
[김상팔 1 vs 적지형 1]
빚 200억을 뺀 전액이 배팅되었다.
“와아아아! 여기도 올인이다!”
“짱이다! 이건 정말 최고야!”
“둘 중 하나는 파산이다! 히히히!”
광기, 태초부터 가장 재미있는 유희는 남이 하는 싸움을 관람하는 것이다.
헌터들은 침을 질질 흘리며 좋아했다.
이제 남은 두 사람. 태한과 김용에게 시선이 쏠렸다.
김익조는 두 사람을 향해 소리쳤다.
“두 분은 천천히 결정하십시오.”
그 틈을 타 난 오이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응?”
난 조용히 방을 나섰다. 내가 나서는 것을 본 태한은 날 뒤따라왔다.
“김상팔!”
뒤에서 날 부르는 태한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난 계속해서 걸어갔다. 그리고 인기척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김상팔. 너 제정신이야?”
태한이 다급하게 내 어깨를 붙잡았다.
난 뒤돌아서서 어깨를 으쓱였다.
“지금 봤어? 우리가 함께 방을 나서는데 아무도 감시하러 안 왔어! 이게 무슨 뜻인 줄 알아?”
“아니!”
“김익조는 너와 나 따윈 조금도 경계하지 않고 있어. 아마 우리 두 사람이 가용할 수 있는 자산 정돈 이미 다 조사를 끝냈을 거야.”
“그게 뭐?”
난 태한의 눈을 보며 말했다.
“난 널 믿어.”
난 태한에게 아까 받은 타로카드를 건넸다. 거기엔 펜으로 ‘정’이라 쓰여 있었다.
“오이해 씨랑 말해 봐.”
“설마?”
태한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난 태한이 무어라 하기 전에 윙크를 하면서 말했다.
“난 언제나 최선을 다할 거야. 질 생각은 없어.”
“그렇다면…….”
태한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뭔가를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난 태한의 손을 잡고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둘이 어딜 갔다 온 거냐? 사랑이라도 나누고 온 거야? 히히히!”
웬 삐죽 마른 놈이 나한테 다가와 내 양 볼을 잡고 놀렸다.
태한은 그를 밀치며 고함을 쳤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어이쿠! 애인이라고 감싸는 거야? 예쁘장한 여자도 끼고 왔으면서!”
태한은 미간을 찌푸렸다.
“닥쳐!”
“싫은데? 어디 자신 있으면 닥치게 만들어 보시지?”
왜 이러지? 태한이 랭킹 2위라는 걸 모르는 건가?
태한은 도발에도 불구하고 주먹을 쥐면서 꾹 참기만 했다. 결국 보다 못한 남주나가 나섰다.
“야, 멸치!”
“히익!”
멸치라 불린 남성은 몸을 사리며 폭발대제 팀원들 사이로 숨었다.
남주나의 뒤로 마다랑과 갈리가 함께 서서 폭발대제와 대치했다.
“그만!”
오이해가 나서서 둘 사이를 갈랐다. 그의 존재에 양쪽의 분위기는 빠르게 가라앉았다.
오이해는 나와 태한을 끌고 구석으로 갔다.
“이태한 씨, 앞으로는 더 조심하도록 하세요.”
“죄송합니다.”
태한은 시선을 내리깔면서 주먹을 떨었다.
오이해는 태한 다음에 날 보며 말했다.
“김상팔 씨. 당신의 제안,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럼 가 보십시오.”
응? 난 아직 아무 말도 안 했…….
“앗!”
오이해와 태한은 벌써 눈빛으로 무언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난 부디 계획대로 되길 바라며 조용히 배팅룸을 나와 대기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조금 지나 빨간 문을 열고 필드로 나갔다.
[김상팔 1 VS 적지형 3]
최종 배팅 스코어는 다섯 명 중 하나가 빠진 삼 대 일. 당연히 셋 중 하나는 강제로 나에게 배팅되었다.
“하하하! 친구한테도 버림받았나 보군! 쓰레기한테 아주 잘 어울리는 최후야!”
적지형. 맞은편에 녀석이 서 있었다.
우리는 필드에 그려진 선을 중심으로 마주보고 섰다. 위에 있는 배팅룸의 유리 벽이 굉장히 차갑게 느껴졌다.
이런 기분이었구나. 갑자기 씁쓸한 기분이 몰려왔다.
“쫄았냐?”
도발은 무시. 유리 벽 다음엔 필드 곳곳을 구경했다.
아무리 기술력이 좋아도 겨우 6시간 만에 완전히 박살이 난 필드가 이렇게 원상 복구될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두 사람은 준비해 주세요!”
스피커에서 이서현의 말이 흘러나왔다.
나와 적지형은 서로를 마주보며 준비를 했다. 그리고 몸속에서 H력을 끌어올렸다.
“시작!”
스피커에서 이서현의 목소리와 함께 귀를 찢는 노이즈가 울렸다.
“하아아앗!”
우리는 동시에 능력발동을 했다.
적지형은 거기서 능력발현까지 나아가 자신의 오른팔을 모래로 바꿔서 날 향해 길게 뻗었다.
난 높이 뛰어서 뒤로 공중제비를 넘었다. 공중에서 몸이 거꾸로 됐을 때 내가 서 있던 자리로 적지형의 모래 주먹이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개자식!”
적지형은 욕을 내뱉으며 오른손을 거뒀다.
난 착지한 후 여유롭게 녀석에게 말했다.
“그게 다야?”
적지형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받아라!”
이번엔 녀석의 양손이 모래로 변했다.
적지형은 양손을 채찍처럼 휘둘렀다. 모래가 넓게 퍼지면서 마치 파리채처럼 날 노렸다.
“이크!”
정면으로 크게 도약해서 몸을 날렸다.
양쪽에서 다가오는 적지형의 모래 손이 마치 덫처럼 날 노리고 죄어 왔다.
“하는 수 없지.”
몸을 날리는 도중에 나도 양손을 펼쳐서 각각 양쪽의 모래들을 노렸다.
“광탄!”
빠르게 생성된 광탄이 날아가 폭발했다.
적지형의 손이나 다름없는 모래들은 폭발로 인해 생긴 바람에 휘말려 사방으로 퍼졌다.
“크으으윽!”
적지형은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나 금방 흩어진 모래들을 모아 다시 손을 재구성했다.
난 양손을 겹친 후 적지형을 겨눴다. 그리고 작고 빠르게 광탄을 생성해서 기관총처럼 발사했다.
“하하하!”
김대팔의 광탄보단 위력 면에서 떨어지지만 대신 발사 속도에선 거의 따라잡았다.
적지형은 깜짝 놀라며 전신을 모래로 바꿨다. 그리고 곧바로 광탄들이 직격. 녀석의 몸 전체가 터지며 사방으로 휘날렸다.
“적지형.”
내 근처로 오는 모래를 휘저으며 소리쳤다.
“다신 까불지 못하게 해 주겠어!”
필드에 퍼진 모래들이 한 방향으로 회전하며 거대한 모래 폭풍으로 변했다.
모래 입자 하나하나가 사포처럼 내 몸을 쓸면서 생채기를 냈다.
“이게 네 필살기냐?”
나도 지지 않고 능력발현! 슈트를 생성해 몸을 덮었다.
전신을 보호하는 슈트와 모래가 마찰을 일으키며, 몸이 감싸지는 촉감이 느껴졌다.
단점이라면 안 그래도 머리에 씌워진 바이저로 인해 시야가 좁아졌는데, 사방의 모래 때문에 그것이 훨씬 더 좁아졌다.
“하지만 아까 네 반응으로 힌트를 알아냈거든?”
이번엔 양손에 깍지를 껴서 그 사이에 광탄을 모았다.
더 크게, 더 강하게! 광탄의 크기를 점점 키우면서 양손을 머리 위로 들어 손바닥이 천장을 향하게 했다.
“더, 더, 더……!”
광탄은 거대한 구체로 변하며 부풀어 올랐다.
모래가 끊임없이 나와 광탄을 휩쓸었지만 그다지 큰 피해는 주지 못했다.
“더!”
완성. 순간 모래의 흐름이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광탄의 크기는 가히 작은 태양이라 부르고 싶을 정도였다.
“받아라!”
가볍게 몸을 위로 튕겨서 광탄을 위로 띄웠다.
두둥실 떠오른 광탄은 천장에 닿는 순간 풍선이 터지듯 ‘팟!’하면서 폭발했다.
“으으으윽!”
천장에서 엄청난 풍압과 폭발이 밀려와 필드 전체를 채웠다.
바로 아래에 있던 나도 그 힘에 밀려 찌그러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으아아악!”
적지형의 비명 소리가 쩌렁쩌렁 필드를 울렸다.
적지형의 능력을 감안했을 때 지형이 협소하지만 않았어도 상당히 고전했을 것이다.
“이제 잔재주는 포기해!”
내 외침에 적지형은 모래들을 한데 모아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겉보기에 외상은 없었지만 녀석의 전신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시발!”
적지형은 숨을 헐떡이며 다시 양팔을 모래로 바꿨다.
꽤 치명적인 피해 같았지만 녀석이 내뿜는 H력에는 변화가 없었다.
“이건 어떠냐, 망할 새끼야!”
적지형은 왼쪽 팔의 모래를 발사해 마치 드론처럼 자유자재로 조종했다.
왼쪽 팔은 원격으로 공격, 오른쪽 팔은 아까처럼 길게 뻗어서 직접 공격했다.
“크윽!”
앞에서 날아드는 녀석의 오른쪽 팔은 피했지만, 뒤에서 날아든 왼쪽 팔은 피하지 못했다.
묵직한 충격과 함께 몸이 위로 떠서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지금이다!”
적지형은 오른쪽 팔도 떼어서 날렸다.
두 개의 모래 팔이 공중을 날아 나에게 다가왔다.
“하압!”
난 양손을 뻗어서 각각의 모래 팔을 조준했다. 그리고 광탄을 쏴서 모래 팔을 터뜨렸다.
“으아아악!”
적지형은 몸을 웅크리며 바닥에 엎드렸다. 난 바닥에 착지하고 나서 녀석에게 다가갔다.
“기절한 거냐?”
그때 적지형의 몸이 모래로 변하며 날 덮쳤다. 전신을 감싼 모래는 사방에서 날 꽉 죄었다.
졸지에 난 선 채로 모래에 파묻힌 꼴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나오시겠다?”
난 모래 속에서 양손을 편 다음 광권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든 광권에 H력을 응축해서 무광권으로 변화시켰다.
“이건 좀 많이 아플 거야!”
무광권을 폭발시켰다. 거대한 두 개의 폭발음과 함께 모래가 덩어리져서 양옆으로 날아갔다.
“으아아악!”
적지형은 반은 모래로, 반은 사람으로 변하며 좌우로 두 동강이 난 채 필드 양 끝에서 몸부림쳤다.
보고 있자니 심히 그로테스크해서 좀 끔찍했다.
“기권할래?”
그럴 리는 없겠지만 약 올리려는 의도로 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적지형은 대발노발하면서 몸을 하나로 합쳤다.
“죽여 버리겠어!”
적지형은 하반신을 모래로 바꾼 후 따로 떼어 냈다. 그러자 사람 형태인 상반신은 마치 램프의 요정처럼 허공을 둥둥 떠다녔다.
녀석은 하반신 모래를 둥근 구체로 바꾼 다음, 내가 광탄을 쏜 것처럼 작은 알갱이들을 연속 발사했다.
“크으으윽!”
난 양팔을 교차해 상체를 가렸다.
모래 기관총은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 내가 방어한 부분만 쏘면서 날 압박했다.
“하하하! 어디 한번 또 지껄여 보시지?”
적지형은 틈을 주지 않고 상반신째로 날아와 내 옆구리에 주먹을 질렀다.
묵직한 펀치에 몸이 옆으로 꺾이며 균형을 잃었다.
“이것도!”
내 몸이 옆으로 꺾이자 적지형은 내 머리를 잡고 그대로 바닥에 꽂았다.
찌릿한 통증과 함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악!”
고개를 흔들며 적지형을 보니까, 녀석은 어느새 손에 무기 같은 것을 들고 있었다.
그것을 내리치려는 찰나, 난 몸을 굴려서 공격을 피했다.
“쳇!”
잽싸게 몸을 일으켜 무기의 정체를 살폈다.
그것은 하반신의 모래를 뭉쳐서 만든 몽둥이였다.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때려죽여 줄 거니까!”
난 가볍게 광탄을 만들어 쐈지만 적지형은 유유히 날아서 그것을 피했다.
“정말 성가셔.”
“놀아 주는 건 끝이다!”
적지형은 빙빙 돌면서 조금씩 거리를 좁혀 왔다.
난 또 광권을 만들며 녀석의 근접에 대비했다.
“뒤다!”
적지형이 시야에서 빠르게 사라지며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난 뒤로 돌면서 오른손의 광권을 내질렀다. 그러나 광권이 폭발하기 직전,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은 작은 모래 덩어리였다.
“함정?”
다시 등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허겁지겁 몸을 돌려 왼손의 광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