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14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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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미안합니다.”
싸움이 있고 일주일 뒤. 나와 노건은 어느 카페에 마주앉았다. 노건은 무단으로 싸운 대가로 병원에서 해고되고 말았다.
“보, 본업에까지 지장을 주려던 건 아니었어요.”
“아니요. 상팔 씨 때문이 아닙니다. 아마 선생님께선 그전부터 절 내보내려고 하셨던 것 같아요.”
노건은 허탈한 얼굴로 웃었다. 그의 눈에선 정말 한줌의 생기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이야말로 그에게 손을 내밀 때란 생각이 들었다.
“그럼 이제 저희 팀에 들어오시는 거죠?”
노건은 내 눈을 응시하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기분이 나쁜 것도 아니고 좋은 것도 아닌 뭔가 다른 감정이었다.
“제가 왜 헌터가 되길 싫어하는지 아세요?”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사실 나도 그동안 완전히 손을 놓고 있던 것은 아니다. 노건과 싸우기 전 기기래와 통화를 해 그녀로부터 한 가지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있었다.
“폭행 사건 때문인가요?”
내 말에 노건의 눈빛에서 뭔가 작은 불꽃이 번쩍였다.
“맞아요. 그 일로 전 협회를 혐오하게 됐어요.”
또 협회……정확히는 한국 지부 탓이다. 노건은 눈살을 찌푸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처음엔 가벼운 시비였어요.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한 취객이 와서 난동을 피웠죠. 칼을 들고 설치기에 하는 수 없이 능력발동을 해서 그 사람을 제압했어요.”
보통이라면 칭찬을 받아야 할 일이다. 그러나 세상의 시선은 좀 달랐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취객이 좀 다쳤단 거죠. 경찰은 H력을 사용하는 것은 흉기를 쓴 것과 같다면서 절 체포했어요. 그러면서 저한테 왜 나섰냐고 그러더라고요.”
한국의 정당방위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H력을 사용해 일반인을 공격한 것과 같은 죄를 적용했을 것이다.
“그래서 지부에 도움을 청했어요. 그런데 거기서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나도 내가 직접 기기래에게 듣지 않았다면 절대 이 이야기를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기기래와 노건의 이야기는 지독하게도 똑같이 일치했다.
“지부에서 나온 사람이 그러더라고요. 살아서 가해자가 되는 것보단 죽어서 피해자가 되는 게 낫지 않느냐고요. 그래야 협회의 명예가 실추되지 않는다고…….”
노건의 눈에는 조금의 눈물도 고이지 않았다. 그는 오랜 시간 외롭게 많은 시간을 혼자 울었을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요. 검사는 저한테 순순히 죄를 인정하면 자기가 선심을 써 주겠다고 하더라고요. 그제야 변호사를 부를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재판 결과는 무죄. 참고로 검사는 집행유예를 제안했다고 한다. 그 뒤 노건은 협회를 떠나 수습 간호사로서 살아가게 되었다.
“제가 약속할게요. 저희 팀에 있는 한, 전 언제나 노건 씨 편이에요.”
노건은 딱히 내 말에 반응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목을 축였다.
“마음대로 하세요. 어차피 이 길뿐인 것 같으니까요.”
노건은 아직도 마음속으로는 헌한발에 들어오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상처는 헌터가 아닌 한국 지부에서 생긴 것. 의외로 함께 일을 하다 보면 자연히 치유될 수도 있다.
“그럼 일단 이 돈으로 생활하고 계세요.”
준비한 봉투를 꺼내 노건에게 내밀었다. 그는 별다른 거부감 없이 그 돈을 받아들었다.
“고맙단 인사는 안 할 거예요.”
“괜찮아요. 제가 드리고 싶은 거니까요.”
강한 힘엔 강한 책임이 따른다. 왠지 그 말이 떠올랐다. 노건과 연락처를 교환한 후 우리는 말없이 헤어졌다. 그 뒤, 난 홀로 버스에 올라 네오서울 호텔로 갔다.
“후우!”
한숨을 쉬며 씁쓸한 마음을 달랬다.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고난을 상기하며 정신을 다잡았다. 오늘은 바로 어금니와 사냥을 하기로 한 날이다.
“상팔 씨!”
창밖으로 요망한 티라노가 보였다. 인형옷 차림의 김대팔은 호텔 정문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 가시죠.”
킹메라 사냥 때처럼 내가 김대팔의 차를 몰았다. 우리는 서둘러 약속 장소인 5급 사냥 구역으로 갔다.
“우와!”
미니버스도, 밴도 아니었다. 5급 사냥 구역 주차장에 서 있는 것은 흔히 말하는 고속버스. 그것도 3대나 있다.
“1등은 1등이네요.”
감탄이 절로 나왔다. 어금니야말로 내 꿈이자 롤모델이 될 팀이었다.
“오늘은 주력 멤버 외에만 모인 거예요.”
“예?”
주차장에 차를 대면서 인원을 헤아렸는데 족히 백 명은 되어 보였다. 주력 멤버라는 게 랭킹 헌터를 말하는 거겠지? 지금 숫자만 해도 웬 만한 연합보다 훨씬 많다.
“앗!”
인원들 중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바로 이이와 초조선. 이이의 경우에는 함께 헌터 자격시험을 치렀고 헌팅 페스티발에선 루호와 멋진 승부를 벌였다. 초조선의 경우는 자격시험 때 나와 면접을 함께 봤었다. 그녀의 얼굴 흉터를 보자마자 바로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어금니에 들어갔어요?”
이이와 초조선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김상팔?”
이이는 덥석 내 손을 잡고는 위아래로 크게 흔들었다.
“하하하! 오랜만인데?”
우와! 생각지도 못한 환영. 이이는 꽤나 살갑게 말을 건넸다.
“그, 그러네요. 이이 씨 잘 지내셨어요?”
“나야 보시는 대로지. 아직 정식 헌터 자격은 없지만 실력은 누구에게도 안 뒤진다고!”
기백은 여전하다. 과연 이씨 십형제! 언제쯤 완전체를 보게 될까? 이일은 잘 지낼까?
“험험.”
초조선이 헛기침을 하며 팔꿈치로 이이를 찔렀다.
“아참, 여긴 내 여자 친구.”
이이는 초조선을 가리켰다.
“오! 축하드려요. 두 분은 언제 어금니에 들어가셨어요?”
“하하하! 그건…….”
“아직 어금니가 된 건 아니야.”
응? 누군가 불쑥 우리 옆에 섰다. 올백으로 넘긴 머리에 빨간색 양복을 입은 남성이었다.
“어!”
어금니의 팀장 김용. 바로 김용이었다! 헌터 랭킹 1위. 그리고 한국 최강의 헌터이자 협회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진정한 실력자. 그의 등장에 모두들 긴장하기 시작했다.
“빨리, 빨리 준비해. 시간은 돈이다.”
김용은 손에 찬 시계를 보여 주며 모두에게 말했다. 고함을 지르지 않아도 백여 명의 사람들은 그 말을 아주 잘 들었다.
“흥!”
이이와 초조선도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장비를 챙겼다. 김용은 가만히 선 날 보며 말했다.
“당신이 김상팔 씨죠? 듣자하니 헌팅 페스티발에서 한 가닥 했다면서요?”
“예, 뭐…….”
플레잉과의 싸움은 비밀. 그런데 김용은 사실을 아는 눈치였다.
“아주 탐이 나는군요. 어때요, 헌한발인지 뭔지 때려치우고 우리 팀에 들어오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솔직히 조금 유혹에 끌린다. 김용 밑에 들어간다면……그야말로 헌터 업계 최강 라인을 타는 것이다. 승승장구하며 행복한 나날을 보낼 수도 있다.
“그건 거절하겠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동료들이 있어 준 덕분이다. 그들을 배신하느니 차라리 헌터를 그만두는 게 더 낫다.
“그래요?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지 연락하세요. 어차피 당신 실력만 가지고선 100위 이상으로 올라오는 건 불가능할 겁니다.”
뜨끔. 그걸 어떻게? 김용은 배시시 웃으며 자신의 명함을 꺼내 내 손에 억지로 쥐어 주었다. 그리고 양복 차림으로 느긋하게 정문 앞으로 갔다.
“멋지다! 재수 없다!”
두 가지 감상이 동시에 나왔다. 한숨을 쉬고는 나도 김대팔의 차로 돌아가 내 배낭을 꺼냈다.
리볼버와 산탄총, 그리고 소형 캠코더. 놀랍게도 어금니에서 사냥 촬영을 허락해 주었다. 물론 얼굴 모자이크는 필수! 허가 자체만 해도 내겐 감지덕지였다.
“집합!”
비실비실해 보이는 청년의 외침에 모두가 한 자리로 뭉쳤다. 나와 김대팔도 그들을 따라 뒤에 섰다.
“지금부터 사냥 구역으로 들어간다! 다들 자기 장비 잘 챙기고, 계약을 잘 이수하길 바란다.”
다들 자신의 무기를 들면서 함성을 질렀다. 무기는 내 것과 비슷한 수준의 산탄총, 핸드캐논으로 보이는 투박한 단발총, 대구경 라이플 등등. 다들 무시무시한 것들이었다.
“승리해라, 어금니!”
김용이 직접 관리기를 조작해 정문을 열어 줬다. 그는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문밖에 서서 우리를 배웅했다.
“김용 씨는 함께 가지 않는 건가요?”
김대팔에게 묻자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저분은 원래 잘 나서질 않아요.”
“좀 아쉽네요.”
“뭐, 그래도 상팔 씨한텐 좋은 경험이 될 거예요.”
오늘따라 김대팔의 인형 탈 속 그의 얼굴이 무섭게 느껴졌다. 도대체 그가 나한테 원하는 게 뭘까? 단순한 스카우트? 아니면 뭔가 다른 꿍꿍이? 그런 것치곤 너무 내 쪽에만 좋은 일이다.
“그런데 저 사람은 누구죠?”
앞에서 지시를 하는 청년을 가리켰다. 낯이 익기는 한데, 당최 기억이 나질 않았다.
“저분은 경진 씨입니다. 김, 경, 진. 헌터 랭킹 20위로 어금니에선 돌격대장 같은 분이죠.”
김대팔의 말을 듣고 나서야 김경진을 랭킹 모임에서 봤던 게 기억이 났다. 20위나 되면 분명 엄청난 실력자일 것이다.
김경진은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지금부터 가스고라니 서식지로 간다! 빠른 걸음으로 갈 테니 잘 따라와라! 낙오자는 기다리지 않는다!”
“옙!”
100여 명이 동시에 소리쳤다. 그 엄청난 기세에 사냥 구역 안 나무들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바람이 시원하네요.”
모두가 우르르 걷는 와중에 바람이 불어와 머리를 식혀 줬다. 인형 탈을 쓴 김대팔은 분명 걸음이 불편할 것인데도 참 잘도 따라왔다.
“대팔 씨. 안 불편하세요?”
“네. 전 괜찮습니다.”
우리는 늪지대를 지나 정글 속으로 들어갔다. 질퍽한 바닥과 후덥지근한 기후가 속옷까지 젖게 만들었다.
“으으, 지금 분명 가을일 텐데?”
가을인데 덥다. 심지어 여긴 네오서울보다 북쪽이잖아? 괴물 때문에 자연환경까지 맛이 가 버린 모양이다. 점심때쯤 돼서 우리는 정글 끝에 도착했다. 이곳은 땅이 질퍽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점심!”
김경진의 호령에 10여 명이 배낭을 풀었다. 그들의 배낭에서 나온 것은 커다란 냄비들이었다.
“오오! 서, 설마 배식?”
와, 짱이다. 다들 적당히 짐을 풀고는 우르르 줄을 섰다. 나와 김대팔도 적당히 뒤에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김밥 사 왔는데…….”
그것도 기본 김밥이 아니라 소고기 김밥! 물론 배식도 먹고, 김밥도 먹을 것이다. 설거지 때문인지 식판은 굵은 종이로 만들어진 일회용이었다. 덕분에 국물 음식은 없었다.
“와! 이게 일회용이라니, 아깝다.”
뭐, 짐꾼이 짊어질 무게를 생각하면 당연한 선택이다. 반찬은 멸치볶음, 오이지, 고기볶음이었다. 목이 좀 막히지만 맛은 꿀맛이었다.
“자네가 김상팔인가?”
“네?”
김경진이 내 옆으로 와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시죠?”
“자네에 대해선 대충 들어서 알고 있어. 그러니 한 마디만 하지.”
김경진은 검지를 펴서 날 가리켰다.
“나대지마.”
“예?”
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슬슬 견제가 들어오는 건가? 근데 나 아직 100위밖에 안 됐는데? 하도 어이가 없어서 씹는 것도 잊은 채 김경진을 바라봤다. 김경진은 자기 할 말만 다 하곤 그냥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냥 상팔 씨가 참으세요. 저분은 원래 저런 분이에요.”
김대팔이 티라노 손톱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에잇!”
홧김에 밥을 막 퍼먹었다. 여기 참가한 이상 김대팔의 말처럼 내가 참을 수밖에 없었다. 하여간 이놈의 인기란……! 식사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사냥에 들어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