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132화
“첫 만남은 내가 녀석을 도와주면서였어. 그랬더니, 대뜸 나보고 제자로 삼아 달라고 하더구나. 끌끌끌! ‘참 신기한 놈이구나.’싶어서 일단 제자로 삼아 줬지. 그런데 뭘 가르쳐야 될지 모르겠더라고? H세포는 타고나는 거고, 능력은 각성하는 거니까 누가 가르쳐 주는 개념이 아니었지.”
그건 그렇지만 기초라는 게 있잖아요! 그 시절엔 그런 개념 자체가 아직 없어서 미흡했던 건가? 사실 능력발동이니, 능력발현이니 세부적으로 구분하게 된 것은 꽤 근래에 생긴 것이다.
“열의가 아주 대단했어.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깨달았지. 그리고 야망이 아주 노골적이었어. 당시에도 난 협회나 지부 따윈 별 관심이 없었는데, 익조 녀석은 아니었어. 아주 속속들이 꾀고 있었지.”
그때부터였구나!
“그땐 아직 20세기라 체계적이지 않았어. 팀이란 호칭도 안 쓰고, 그냥 패거리라 불렀지. 우리 패거리는 소수 정예를 추구하면서 6년간 점점 유명세를 탔어. 물론 리더는 익조였고, 난 그저 조력자였지. 스타샤를 만난 건 우리가 외국으로 원정 사냥을 나갈 때였어.”
“스타샤요?”
“그래. 한백년이자 미즈 드래곤 말이야. 걔 본명이 ‘아나스타샤’야, 줄여서 스타샤.”
와! 의외로 예쁜 이름이잖아. 난 분명히 또 엄청 괴상망측하고 듣는 순간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아동학대급의 작명을 한 걸까?’란 생각이 드는 이름이 나올 줄 알았는데……!
“잠깐, 원정 사냥이요? 한국 헌터의 첫 원정 사냥은 10년 전이잖아요?”
기기래에게 물어본 결과. ‘안 타는 쓰레기’의 전설은 10년 전 그 원정 사냥이 실패하면서 널리 퍼지게 되었다. 더욱이 거기서 상위권의 랭킹 헌터가 전멸, 돌아온 건 아저씨와 김익조뿐이었다. 그 사건을 계기로 한국지부의 랭킹 헌터는 싹 물갈이 되어 지금의 체제가 굳혀진 것이었다.
“10년이나 오차가 나는데요?”
“응? 아아, 그거! 물론 비공식적이지. 그때 영국에 있는 헌터 협회 본부에서 전 세계에 있는 지부들에게 인력 요청을 한 적이 있었거든.”
와, 그건 진짜 대단한데? 그 자존심 센 본부가……? 아하, 그래서 비공식으로 처리된 거구나! 이야, 본부도 쪼잔하네.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 우리 패거리는 승승장구했어. 지부와 익조의 관계가 꽤 훈훈해서 분위기가 좋았거든.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익조 녀석이 날 멀리하기 시작했지. 박장이도 그때부터 알게 된 녀석이야. 지금처럼 익조 녀석의 개였지.”
내가 본 기억으로 추측하자면, 천민일이 의도적으로 접근했을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를 이간질한 건가?
“하지만 큰 문제는 없었어. 당시에 난 스타샤를 키우느라 정신이 없었거든. 근데 문제는 바로 그 원정 사냥에서 생겼어.”
우리는 버스정류장에 멈춰 섰다. 그리고 버스를 기다렸다.
“배신당하신 건가요?”
내 말에 아저씨는 입을 열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한동안 침묵을 유지했다. 아저씨가 다시 입을 연 것은 40분 뒤 정류장에 도착한 버스에 올라타고 나서였다.
우리는 나란히 자리에 앉았다.
“당시에 블리자드래곤을 잡는 과정에서 녀석이 처음으로 쏜 냉기에 절반이나 죽어 버렸지. 모두 즉사여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어. 그래도 남은 인원이서 어떻게든 녀석을 공격했고, 거의 막바지로 몰아넣는데 성공했지. 참 대단했는데…….”
아저씨는 창밖을 보면서 감상에 젖었다.
“블리자드래곤이 최후의 냉기를 뿜어냈는데, 내가 입고 있던 옷에 살짝 묻었거든? 그 정도면 그냥 고드름 좀 얼고 말았어야 했지. 하지만 그 순간 불이 붙었어! 알겠냐? 냉기 공격을 당했는데, 옷에 불이 붙었다고!”
옷에 뭔가 수작을 부린 거군.
“근데 문제는 말이지.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불이 안 꺼지는 거야. 얼음 위에서 그렇게 구르고, 눈을 퍼부어도 말이야. 치료술도 소용없었어. 당시엔 블리자드래곤이 최후의 수단으로 뭔가 특별한 공격을 한 것으로 여겨져서 다들 신경 쓰지 않았지만, 후에 내가 따로 알아본 결과 내 옷엔 전혀 다른 드래곤의 ‘내장 기름’이 묻어 있었어.”
“내장 기름이요?”
“그래. 못해도 작은 향수병 크기면 족히 수십억은 할 게다. 세상에, 날 죽이겠다고……. 그런 아까운 짓을……! 죽어 달라고 돈 주면서 부탁했으면, 죽는 시늉까진 해 줬을 텐데…….”
이, 이 아저씨……!
“어떻게……살아남으신 거예요?”
천천히 뜸을 들여 아저씨에게 물었다. 그러자 아저씨는 머리를 긁적였다.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산에서 떨어졌지. 그리고 그대로 평야까지 떨어진 후에는 계속 굴렀어. 어쩌다 보니까 바다까지 굴렀더구나. 거기서 또 며칠을 불타면서 표류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한국이었어. 어느 이름 없는 해변에 떠밀려 있었지. 계속 치료술로 몸을 재생시킨 덕에 몸에 묻은 내장 기름이 전부 소멸할 때까지 버틴 거야.”
왜 이 아저씨는 심각한 이야기를 해도 개그가 되는 걸까. 아무튼 바퀴벌레 이상의 생명력이라는 건 확실히 알았다.
“그 뒤에 난 조용히 은둔하면서 지냈어. 나에 대한 한국지부의 기록은 전부 폐기됐거든. 그냥 나란 놈 자체를 지워 버린 셈이지. 게다가 예전 친구들은 대부분 죽거나, 은퇴했더구나, 그게 익조 녀석의 술수인지까지는 모르겠지만…….”
“복수……하실 건가요?”
당연한 질문이면서도 묻고 싶지 않은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야기를 들은 지금이라면 반드시 물어봐야만 했다.
아저씨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내게 중지를 세워서 내밀었다.
“알았어요. 더는 여쭙지 않을게요. 솔직하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상팔아, 나 당분간 팀을 떠나 있을 거야. 내가 먼저 연락할 때까지 나 찾지 마라. 알았지?”
“네.”
더 묻고 싶다. 그러나 여기까지가 한계다.
아저씨도, 나도 감정적으로, 그리고 이성적으로 피곤했다. 게다가 나도 내심 이젠 아저씨 없이 자립할 필요를 느끼는 중이었다.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심적으로 꽤 아저씨를 의지하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집에 가는 동안 팀원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당분간 팀 단위 활동을 없을 것이며, 각자 따로 활동하라는 내용이었다.
가장 먼저 루호에게서 답장이 왔다.
[무슨 일 있으세요? 제가 알면 안 되는 일인가요?/조루호]
루호야! 너에게만은 내가 다 이야기해 주고 싶어. 진심이다. 보고 싶어.
그 뒤로 속속들이 답장을 보내왔다.
[알겠습니다. 팀장님, 몸조심하세요./호규]
호규 씨도요.
[그럼 전 당분간 언니랑 다닐게요./주아란]
그래요, 아란 양. 부디 몸조심하고, 학교는 너무 빼먹지 마요! 의무교육 일수는 채워야죠.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기다리고 있을게요./유정]
다음에 또 쇼핑해요, 유정 씨. 그땐 자기 짐은 자기가 들어요.
[나 당분간 동생이랑 검은 과부들하고 일할게./주아라]
응? ‘동생이랑’이면 주아란하고? 어……그, 그래라.
[알았어./변해라]
여전히 좀 생소하구나. 하하하, 그래도 답장해 준 게 어디야?
공미는 한참이 지나도 답장이 오지 않았다.
아저씨는 하차 버튼을 누른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의자 옆에 서서 물었다.
“넌 어떻게 할 거냐? 익조가 지부장이면 더 이상 네 랭킹은 올려 주지 않을 거야. 솔직히 널 살려 두는 것도 녀석 나름의 자비일 걸?”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렇다면 올려 주지 않곤 못 배기게 만들어야죠.”
내 대답에 아저씨는 내 등짝을 때렸다.
“끌끌끌! 바로 그거야! 그거야말로 우리 김상팔이지.”
아저씨는 뒤도 안 돌아보고 버스에서 내렸다. 그리고 시선을 버스 반대로 향한 채 꿋꿋이 앞으로 나아갔다. 마치 지금이 마지막 작별인 양, 다시 돌아보지 않겠다는 듯, 등에 맨 배낭에 가려진 아저씨가 점차 멀어졌다. 거기에 버스가 출발하면서 우리는 자의, 타의에 의해 멀어졌다.
한참을 더 가서 나도 버스에서 내렸다. 사실 오늘 외출은 아저씨와의 만남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휴대전화를 꺼내 다음 약속 상대에게 전화를 걸었다.
― 오, 상팔 씨. 벌써 볼일이 끝나셨어요?
상큼하다 못해 버터가 좔좔 흐르는 남성의 목소리. 사실 내 쪽에서 먼저 연락하기엔 좀 꺼려지는 사람이다.
“네. 언제 뵐까요?”
― 지금 바로 그쪽으로 이동할게요. 어디 계세요?
지금 내가 있는 거리를 설명했다. 적당히 상가가 있고, 적당히 인적이 있는 평범한 동네였다.
― 알았어요. 20분이면 도착할 거예요. 먼저 근처 카페에 자리 잡아 주세요.
전화를 끊고 시키는 대로 근처 카페로 들어갔다. 그리고 음료 하나를 시켜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구석 자리지만, 창가 바로 옆이라 바깥 풍경이 보였다.
“하아. 바쁘다, 바뻐.”
계속해서 이야기와 생각들이 지나가니, 뇌가 피곤해지는 게 실감이 난다.
응? 저건 또 뭐야?
저 멀리 이상한 무늬의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거리 한가운데 서서 지나가는 행인들을 붙잡으며 소리쳤다.
“뉴 월드를 믿으세요! 새로운 믿음, 새로운 신, 새로운 낙원이 여러분을 기다립니다!”
뉴 월드? 무슨 어린이 카드게임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최종 보스 이름 같은데? 아니면 포카혼타스 영화에서 따온 건가?
다른 건 다 그렇다고 쳐도, 결정적으로 왜 영어야? 물 건너 온 건가? 아니면 설마 ‘뉴 월드’를 한국어라고 우길 셈인가?
“뉴 월드야말로 진리! 뉴 월드야말로 삶! 뉴 월드야말로 우주입니다. 여러분 거짓을 멀리하고 진실을 마주하세요!”
티셔츠의 무늬는 두개의 원. 무한을 뜻하는 뫼비우스의 고리와 흡사하지만, 분명하게 두 개의 원은 떨어져 있다. 무슨 의미일까? 빵빵하다? 잔고가 00? 이모티콘?
믿음을 전파하던 무리는 갑자기 나무통 같은 것을 사람들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거기에 돈을 넣을 것을 강요했다.
“안 넣으면 지옥 갑니다. 지금 넣으시면 저희 뉴 월드 신도라는 증거인 티셔츠를 드려요. 이것만 입고 계시면 낙원에 갈 수 있습니다!”
돈만 내면 되는 건가? 와, 심지어 내는 사람이 있잖아! 흠, 저런 거 조심해야 하는데…….
아마 순순히 내는 사람 중엔 바람잡이도 섞여 있을 것이다. 실제로 저렇게 찬동하는 사람 몇 명만 있어도 수십 배의 사람을 선동할 수 있다. 돈만 내면 티셔츠를 받고, 자유롭게 풀려난다. 어처구니없으면서도, 참으로 간단한 논리다.
많은 수에 의한 비폭력적 강요에 행인들은 순순히 지갑을 열었다. 그리고 티셔츠를 받아들고는 자유가 되어 거리를 벗어났다. 무리들은 먹잇감을 찾듯 거리를 걸으며 지나가는 사람마다 달라붙었다.
저거……사이비잖아?
내가 앉은 카페까지 무리가 다가왔다.
순간 무리가 날 쳐다봤다. 그리고 날 알아본 건지 손가락질하며 무어라 떠들기 시작했다. 무리는 카페 앞에 서서 한참 동안 웅성거렸다. 하지만 차마 카페 안으로 쳐들어오진 않았다. 마치 날 경계하는 것 같았다.
때마침 순찰 중이던 경찰관 두 명이 무리에게 다가왔다. 그러자 무리는 마치 노아의 기적처럼 두 갈래로 흩어졌다. 그리고 경찰관과는 반대 방향으로 재빨리 움직였다.
경찰을 두려워한다는 건……역시 사이비구나!
“손님…….”
갑자기 카페 주인이 말을 걸어왔다.
“네?”
카페주인은 머뭇거리며 물었다.
“혹시 헌한발 팀장인 정식 헌터 김상팔 씨 아니신가요?”
엥?
“네, 맞는데요?”
주인은 손뼉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맞았군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사인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주인은 사인 서화판과 유성 펜을 갖고 내 자리로 왔다.
“영상 잘 보고 있습니다. 다음 영상은 언제 올라오나요?”
영……상? 아, 그러고 보니 트튜리팟 관리 안 한지 꽤 됐네?
일단 펜을 받아 서화판에 사인을 했다. 주인은 좋아하면서 서비스로 조각케이크를 주었다.
케이크를 먹으며 스마트폰으로 트튜리팟에 접속해 현재 내 계정 상태를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