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131화
***
“대단해요! 랭킹에 이렇게나 많이……!”
기기래는 연신 감탄을 늘어놓았다. 그녀가 가져온 자료엔 확실히 헌한발과 검은 과부들의 인원이 랭킹에 올랐단 사실이 쓰여 있었다.
99위 유정.
97위 한유화.
96위 장마리.
92위 변해라.
88위 주아라.
81위 최향자.
75위 조루호.
루호랑 최향자는 랭킹이 올랐는데, 난 계속 100위. 아무래도 윗선에 제대로 미운털이 박힌 모양이다. 하긴, 망할 김익조가 날 랭킹에서 자르지 않은 게 어디야? 당연하게도 한돈 아저씨가 쏙 제외된 것 역시 같은 이유라 할 수 있다.
지부장 암살 사건이 있은 후 예상대로 김익조가 차기 지부장에 취임했다. 박장은 부지부장, 이서현은 김익조가 하던 지부장 직속 총괄팀장으로 승진했다. 바야흐로 헌터 협회 한국지부는 이 세 사람 손 안에 놓이게 되었다.
싸움이 끝나고, 우리는 협회에서 운영하는 헌터전문병원에 입원했다. 족히 반년은 누워 있어야 할 부상이었지만, 치료술 전문 헌터들의 집중 치료에 겨우 한 달 만에 모든 부상이 완치되었다. 비용은 모두 지부에서 지불해 줘서 참 다행이었다. 여기 치료비면 그동안 내가 모은 저금은 물론이고, 빚까지 해도 안 될 것이었다.
팀원들은 나보다 먼저 완치되어 퇴원했다. 원래는 나도 진작 퇴원해야 하지만, ‘H력 결핍증’이란 진단과 함께 절대 생길 일 없는 H력 생성 치료를 받고 있어 좀 늦어졌다.
치료술사가 하는 치료는 현대의 것을 뛰어넘은 초능력이었지만, 나 같은 사정을 가진 사람에게 한정해 맹점이 있었다. 바로 엑스레이나 MRI, 혹은 CT촬영을 하지 않는단 점이었다. 덕분에 아무도 내 몸이 남다르단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일반 병원이라면 아마 지금쯤 연구 대상이 되었을 것이었다.
***
오늘은 내가 퇴원하는 날이다. 결국 병원 측에서 포기하고 만 것이다. 어차피 H력 결핍증이란 병은 자연 치유되기도 하는 병이다. 적당히 잠수타면서 조용히 지내다가 자연 치유됐다고 하면 되는 것이다.
기기래는 어떻게 알았는지 대뜸 내 1인실에 쳐들어와 독점 인터뷰랍시고 날 추궁하는 중이다.
“어때요? 이제 상팔 씨 차례예요. 그때 상황을 자세하게 알려 주세요.”
기기래는 내 침대에 걸터앉아 주머니에서 녹음기와 메모장을 꺼냈다.
“여긴 어떻게 들어오신 거죠? 입구에서 절대 통과시켰을 리가 없을 텐데요?”
내 질문에 기기래는 카디건을 벗으며 윙크를 날렸다. 카디건 속에서 드러난 흰색 블라우스, 그 옆구리에 뭔가 신분증 같은 게 달려 있었다.
“이건 임시출입증이에요. 아는 사람이 있으면, 이런 걸 얻는 것쯤 식은 죽 먹기라고요.”
“그렇군요.”
루호가 절대 말을 안 하니까, 이번엔 나한테 온 건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말해 줄 수 없어요.”
김익조가 지부장이 됐음에도 우리를 건들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 내가 그 일을 함부로 발설하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입을 열면 최악의 경우, 협회 전체가 적으로 돌아설 수 있다.
“대신 간단한 질문에 답해 드릴게요.”
아직은 때가 아니다. 나 혹은 우리 팀원 중 하나가 로얄에 버금가는 힘을 키울 때까진 언행을 조심해야 한다.
치료를 받는 중 협회 측에서 이서현을 통해 감사패를 전달해 왔다. 다시 만난 이서현은 뭔가에 질린 사람처럼 말을 아끼고 있었다.
기기래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좋아요. 그럼 그렇게 하죠. 꼴에, 되게 비싸게 구네.”
마지막 말은 혼잣말이겠지만, 다 들렸거든?
“첫 번째. 지부 측 발표로는 천민일 지부장을 죽인 게 플레잉이라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부분적으로는요.”
“부분적이요?”
기기래는 눈동자를 굴리며 입술을 씰룩였다.
“역시 뭔가 있군요! 입막음을 당해서 말해 줄 수 없는 거죠?”
나는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요.”
기기래는 신이 나서 열심히 적어 댔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 다음 두 번째. 지부에서 뭔가 보상을 받으셨나요?”
김익조가 아닌 한국지부에서 보상금이 나왔다. 물론 보상이 아닌 보수에 가까운 돈이었다.
“받았어요.”
“하지만 구체적인 것은 말해 줄 수 없겠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기래는 신이 나서 계속 질문을 이어 갔다.
“지금 헌한발은 다수의 랭커를 보유한 강팀이 되었는데요. 앞으로의 행보는요?”
강팀이라……. 미스터 블루나 미즈 드래곤을 생각하면 절대 동의할 수 없는 소리다. 아마 그 자리에 로얄이 있었다면, 충분히 두 사람을 제압했을 것이다. 물론 무명인 우리 팀이 플레잉의 간부들과 싸워 좋은 성과를 낸 건 사실이다.
“랭킹 1위요.”
“후후후.”
기기래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메모장을 집어넣은 후 다시 카디건을 입었다.
“저 말고 다른 기자한텐 방금 한 이야기는 비밀로 하셔야 해요. 아셨죠?”
“생각해 보죠.”
“저랑 친하게 지내면 상팔 씨한테도 꽤 유용할 거예요.”
흠, 생각보다 싱거운데?
치료 받는 중에는 외부와 철저히 차단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지금 세간에서 천민일의 죽음과 헌한발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있단 것을 알게 되었다. 알게 모르게 사람을 통해서 입에서 입으로 흘려지기 때문이었다. 기기래가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내 병실로 쳐들어온 것도, 지부 사람들이 수시로 들러 우리의 입단속을 당부한 것도 같은 이유였다.
기기래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아! 잠깐만요. 하나만 물어볼게요.”
기기래는 생각보다 정보에 빠삭하다. 어쩌면 알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끝에 뭔가를 조심스레 물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훨씬 자세한 것을 들었다. 아직 점심시간 전. 기기래가 떠나고 나도 짐을 챙겼다.
이제 퇴원할 시간이다.
“이제 시작인가…….”
이제, 시작. 숨이 찰 정도로 무서운 말이었다.
“후웁.”
숨을 크게 들이켰다. 다음 스텝을 밟기 전에 지금은 잠시 숨 고르기를 할 때였다.
우선, 아저씨부터……!
***
한돈 아저씨네 집은 처음 와 봤다. 언제나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여 주신 아저씨답게 거주지도 내 예상 밖이었다.
미래 고아원.
원장님과 부원장님 두 분과 아저씨, 이렇게 셋이서 운영하는 곳이었다. 엄연히 따지자면, 아저씨는 이곳에 주기적으로 들러 경제적 지원을 해 주고 계셨다.
아저씨가 예전에 말한 ‘부인들’의 정체는 바로 이 두 분이었다.
원장님이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건네주셨다.
“호호호. 설마하니, 아버님 친구 분이 오실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이곳에서 두 분은 어머님, 아저씨는 아버님으로 불리고 있었다. 확실히 아이들에게 있어선 그런 개념으로 다가가는 게 좋을 것이었다.
지금 이곳은 원장실, 원탁을 마주 보고 내 건너편엔 두 분의 ‘어머님’이 앉아 계셨다. 망할 ‘아버님’께선 잠시 화장실에 가신 상태였다.
“그, 그러게요. 갑자기 찾아봬서 죄송합니다.”
어색하다. 내가 예상한 건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어! 난 그냥 쓰레기가 가득 쌓인 집에 곰팡이 같은 걸 기대했는데…….
두 분 다 나이가 지긋하시다. 거기에 인상까지 인자하시고……들어오면서 시설을 슥 둘러봤는데, 최신식은 아니어도 부족한 건 없어 보인다.
이번엔 부원장님이 말했다.
“헌터라는 거 많이 위험하죠?”
“예? 아……네. 아무래도…….”
만날 험하고, 날뛰고, 거친 사람들만 상대해서인지 이런 분들은 참 대하기 난처하다.
“아버님 좀 잘 부탁드립니다. 저희한텐 정말 소중한 분이에요.”
“아……네.”
원장님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만약 아버님이 안 계셨다면 진작 사라졌겠죠. 지금이야 도와주시는 분들이 늘었지만, 8년 전까지만 해도 정말 힘들었어요. 그때 마침 아버님께서 나타나셨죠.”
8년 전……. 기억해 둬야 할 단어다.
“이봐! 화장실에 휴지가 다 떨어졌잖아!”
아저씨가 문을 열면서 소리쳤다. 그러자 원장님이 밝은 미소로 답했다.
“어머, 제 정신 좀 봐요. 지금 곧 갈아 놓을게요.”
휴지가 다 떨어졌는데, 어떻게 닦고 나오셨지? 후, 후우, 진정하자. 어쩌면 그냥 작은 거 보고 오신 건데, 내가 혼자 오버하는 걸 수 있다.
아저씨는 자기 배낭을 맨 후 내 손을 잡아 의자에서 일으켰다.
“상팔아, 이제 가라.”
“네? 저 여기 온 지 10분밖에 안 됐는데요?”
“그래. 배웅해 줄게.”
엥? 그냥 일방적이라는 건……?
아저씨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원장실을 나왔다. 그리고 건물 밖 마당까지 질질 끌려갔다. 평소라면 그냥 힘으로 버텨 볼 시도라도 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마침 마당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과 마주쳤다. 아이들은 우릴 보더니 우르르 몰려왔다.
“뭐야? 아버님 친구야?”
애들도 아버님이라고 부르네?
아이들은 날 굉장히 신기한 동물 보듯 쳐다봤다. 왠지 이해가 됐다.
“너희는 가서, 마저 놀아라.”
아저씨는 손을 휙휙 내저으며 아이들을 뒤로 물렸다. 그러고는 큰소리로 아이들에게 물었다.
“운동 열심히 하고, 골고루 안 먹으면 어떻게 된다고 했지?”
아이들은 입을 모아 동시에 소리쳤다.
“아버님처럼 돼요!”
헉! 아저씨는 거기서 또 물었다.
“나처럼 되면?”
“안, 돼, 요!”
아이들은 우렁차게 대답한 후 우리에게서 떠나갔다. 그리고 다시 자기들끼리 노는 것에 열중했다.
너무 밝고 활기차서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뭐, 뭐죠? 방금…….”
아저씨는 겸연쩍게 웃으며 날 이끌고 고아원을 나갔다.
고아원은 꽤 외곽 지역에 있었다. 주변은 온통 논밭, 거기에 저 멀리 사냥 구역을 둘러싼 벽이 보였다. 우리는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며 이야기를 나눴다.
“여기가 지금 내가 머무는 장소야. 소감이 어떠냐?”
아저씨는 항상 그랬듯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 모습에 조금의 구김이나, 그늘은 보이지 않았다.
“글쎄요.”
잘 모르겠다. 왠지 주눅이 든다. 분명 난 아저씨에게 해명을 들으러, 따지러 온 거였는데……. 어쩌다 보니 입장이 뒤바뀐 것 같다.
우리는 노랗게 익은 들판 사이로 걸었다.
아저씨는 벼들을 보며 씁쓸하게 말했다.
“이제 여기도 작별이군.”
“네?”
계속 놀라기만 하네.
아저씨는 뒤통수를 긁었다.
“이젠 내가 없어도 경제적으로 문제없어. 후원자가 많아졌거든. 어차피 나야 여길 주소지 정도로 썼던 것뿐이니까……. 볼일 없으면 그만 폐 끼쳐야지, 안 그러냐? 끌끌끌!”
원장님과 부원장님, 그리고 아이들의 얼굴. 누구 하나 아저씨를 꺼리는 사람이 없었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나조차 그들이 진심으로 아저씨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섭섭하지 않으시겠어요?”
“전혀. 어차피 인생이란 게 그런 거니까…….”
그 말은 ‘우리’ 사이도…….
나도 모르게 입술을 씹었다. 그리고 힘을 짜내 아저씨에게 물었다.
“이제 말씀해 주실 때가 되지 않았어요?”
최대한 점잖은 말투로 여쭈었다. 이게 지금 내가 아저씨에게 해 드릴 수 있는 최선이었다.
아저씨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입을 여셨다.
“익조와 처음 만난 건 녀석이 14살 때쯤, 그러니까 아마 26년 전일 게다.”
김익조가 올해 40이니까, 확실하다. 그때쯤이면 지부가 정부의 영향력에서 점차 벗어나게 된 시기다.
“장소는…….”
아저씨는 검지로 관자놀이를 찌르며 기억을 짚었다.
“한국이었던 건 확실한데, 좀 가물가물하다. 끌끌끌!”
“그래서요?”
나도 모르게 냉정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