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127화
녀석은 스트레칭을 하면서 대놓고 우리를 무시했다. 그 모습에 최향자와 한유화도 뒤로 물러서며 녀석과 거리를 벌렸다.
“하지만 확실히 검은 과부들의 전투력은 감탄했습니다. 두 분이 안 계셨다면, 지금 쓰러지신 분들은 아마 버터지 못하셨을 겁니다.”
블루스는 최향자와 한유화를 향해 검지를 까딱였다.
“크윽…….”
최향자는 입술을 씹으며 블루스의 도발을 참았다.
“안 오신다면, 제가 가겠습니다!”
블루스는 몸을 움츠렸다. 녀석의 몸은 압착이 되면서 내부로 빨려 들어가듯 쪼그라들었다. 장신의 키가 무릎 높이까지 줄어드는 데는 몇 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완전 극혐이네. 분명히 튀어 오를 준비를 하는 것이다.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런 생각을 한 것 같다.
최향자의 앞으로 한유화와 호규가 섰다. 두 사람 다 남은 H력을 쥐어짜서 능력발현을 준비했다.
블루스는 인간 용수철처럼 몸을 쫙 펴면서 앞으로 튀어 올랐다. 거기에 맞춰 호규는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아!”
호규의 목소리에 통로가 또 한 번 박살이 나며 파편이 날아다녔다. 그 와중에 블루스는 무중력에 있는 것처럼 호규의 바로 앞에서 정지해 공중에 떠 있었다.
싸움과 관련 없는 입장이었다면 참으로 재미있는 광경이겠지만, 당사자로서는 이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 없다.
블루스는 목소리를 거슬러 오르며 기어코 호규에게까지 당도했다. 그러나 호규에게 직접적으로 접촉하기 전 갑옷을 발현한 한유화가 사이로 끼어들면서 블루스를 막았다.
충돌, 일단 한유화의 상체 갑옷이 박살이 났다.
호규는 즉시 목소리 종료, 한유화가 블루스를 붙든 동안 나머지가 우르르 둘러싸서 산탄총의 고무탄을 난사했다.
야, 이건 너무하잖아.
블루스의 몸은 사방으로 늘어나고, 뭉개지면서 고무탄을 피했다. 살점이 부분적으로 움직이며, 형태가 뒤틀리는 광경은 정말 끔찍했다. 마치 세포 하나하나가 스스로 생각하면서 행동하는 것 같았다.
우주 괴물이냐?
빗나간 고무탄은 우리 동료들끼리 맞았다. 정신적, 체력적으로 한계인 상태에서 그것은 치명적이었다. 모두 맞은 부위를 움켜쥔 채 그 자리에 쓰러졌다.
맨 뒤에서 망연자실해서 보고 있는 나만 빼고…….
“겨우 이 정도가 전부는 아니시겠죠? 전 아직 준비운동도 못 했습니다.”
블루스는 다른 사람들을 지나쳐서 나에게 걸어왔다.
누더기인 주제에 뒤에서 후광까지 비춰질 정도로 위협적이다.
주머니에서 리볼버를 꺼내 블루스에게 겨눴다.
지금까지는 사람에게 실탄을 쏘는 것에 주저했지만, 이번엔 봐줄 상대가 아니다.
“꼼짝 마!”
미디어 속 경찰의 필수 대사. 참고로 이 대사를 친 다음엔 항상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
블루스는 나에게 맞춰서 걸음을 멈췄다. 두 손을 위로 든 것은 덤.
“이럼 되나요?”
“어!”
하하하. ‘어!’라고? 스스로 생각해도 참 한심한 대답이다.
“지금 여기에 일곱 분이나 계신다는 건 다른 통로에 있는 제 동료들이 당했단 뜻이겠죠?”
“잘 아네.”
블루스는 고개를 들어서 시선을 올렸다.
“대단하군요. 헌한발이란 이름은 좀 괴상하지만, 여러분의 실력은 진짜입니다. 좀 있으면 헌한발의 이름은 유명세를 떨칠 겁니다.”
갑자기 칭찬? 거기에 스포일러? 그만큼 여유가 있다는 소리겠지.
“글쎄? 그건 여기서 살아남아야 가능하지 않을까? 당신이야말로 정말 괴물인데?”
“제 능력은 신체변형. 신체를 자유자재로 조작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불가능한 동작뿐만 아니라 외형을 바꿔서 변신을 할 수도 있죠.”
“그럼 설마 당신이 다른 녀석들까지 변신시켜서 전국 헌터 체전에 참가한 거야?”
“그렇습니다. 다만 한 가지, 미즈 포인트께선 변장만 하셨습니다. 덕분에 괴물보호 운동가로 잠입할 때가 이번 계획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습니다.”
이런 미친……!
물론 타인의 신체를 조작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아마 변해라의 경우처럼 일정 시간 H력을 공급하지 못하면, 금방 조작이 풀릴 것이다.
블루스는 전신에서 H력을 뿜어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내려서 날 쳐다봤다.
“역시 머리가 좋으시군요. 당신의 능력과 그 우수한 지성, 그리고 지겨울 정도로 끈질긴 행적까지, 모두 훌륭합니다. 어떠십니까, 저희 조직에…….”
“날 스카웃하고 싶은 마음은 너무 잘 알겠는데, 내가 좀 통이 크거든? 남의 밑에 있는 건 사양할래. 그냥 죽여.”
딱 잘라 거절. 이런 일은 확실히 해야 한다.
“그럼 원하는 대로 해 드리죠.”
블루스는 양손을 내린 다음 주먹을 쥐어서 옆구리에 붙였다. 그리고 상체를 숙이며 내게 돌진했다.
“와라!”
H력을 모두 머리로 집중해 감각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블루스의 속도는 초인의 영역, 보통 방법으로는 총알을 명중시킬 수 없다. 다른 사람도 평범한 능력발동 상태에서 움직임을 읽는 데 실패했다. 그렇기에 보통의 능력발동이 아니라 최대한으로 감각을 향상시켜야 한다.
일단 리볼버로 정면을 공격, 당연히 녀석은 왼쪽으로 움직이며 총알을 피했다.
왼쪽, 왼쪽 아래, 중앙 아래, 오른쪽. 차례차례 사격이 빗나갔다.
녀석은 별로 어려워하는 얼굴도 아니다. 그저 ‘보이니까 피한다.’라고 말할 것 같은 표정이다.
바로 앞까지 온 블루스의 주먹이 복부에 꽂혔다.
“커헉!”
몸이 붕 뜨면서 숨이 턱 막혔다.
아뿔싸! H력을 전부 머리로 보낸 게 오히려 방어력을 낮추는 결과가 될 줄이야.
내장이 입과 항문을 통해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사실 맞는 순간, 오줌은 살짝 지렸다.
몸이 뒤로 젖혀지며, 한참을 뒤로 날아갔다. 떨어질 때도 머리부터 착지, 토사물이 입과 코로 나와서 아무렇게나 날렸다.
“더럽군요.”
정신없는 와중에도 블루스의 목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말도 안 돼. 너무 세잖아?
“같은 계급의 세 사람을 이겼다고, 절 너무 우습게 본 모양이군요.”
그럴지도 모른다. 보스가 미즈 드래곤이라면 저 녀석의 계급은 간부인 하트. 그렇다면 미스터 타이거, 미스터 터틀, 미스터 버드와 동급이란 뜻이다.
하긴, 다른 세 사람도 만만찮은 상대였다. 다들 자기 전문 분야에선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실력이었다. 애초에 우리가 그런 녀석들과 싸워 이기거나, 비긴 게 기적이었다.
블루스는 내 멱살을 잡아 한손으로 날 들어 올렸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제 이름은 미스터 블루, 평소엔 보스를 대신해 조직을 운영하는 일을 맡고 있습니다.”
즉, 실세라는 뜻? 사천왕 최강이란 거네! 다른 녀석들과 다르게 이 녀석은 밸런스형. 가장 무난하면서도, 가장 공략하기 까다로운 상대다.
그냥 플레잉 한다고 할 껄 그랬나? 그랬다면 한 방 먹일 기회를 잡았을 텐데…….
“이걸로 끝입니다!”
블루스 김, 미스터 블루의 주먹이 이번엔 면상으로 날아들었다.
이를 꽉 물면서 녀석의 주먹이 닿기 전 내가 먼저 움직였다. 머리를 앞으로 전진, 이마로 녀석의 주먹을 때렸다.
이마를 통해 머리에 가해진 충격은 또렷한 자극으로 다가왔다. 일반인이었다면 뇌가 곤죽이 되면서 즉사했겠지만, 전력으로 머리만 H력으로 강화시킨 나에게는 오히려 정신을 말똥하게 만드는 효과로 나타났다.
쉽게 말하자면, 한참 졸릴 때 바닥에 떨어진 장난감 블록을 밟은 격이다.
뒷머리까지 쭈뼛 서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잠깐이지만, 감각의 향상으로 이어졌다.
어디 이것도 피해 보시지? 통증이 느껴지자마자 반사적으로 총구를 녀석의 배에다가 댔다. 총을 통해 분명하게 녀석의 감촉이 느껴졌다.
이렇게까지 한가운데를 노리면 피하기 힘들 것이다.
본능적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총을 쥔 손으로 분명하게 감각이 느껴졌다. 총알은 분명 명중, 녀석과 내 총구가 서로 밀려나며 우리의 거리가 조금 벌어졌다.
“아…….”
정신은 멀쩡한데, 몸이 무너진다. 역시 이런 살인적인 주먹을 연달아 맞는 건 미친 짓이었나 보다.
옆으로 고꾸라지며 시야가 꺾였다. 그런데…….
망했다.
시야에 보인 미스터 블루의 발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하다못해 총 맞은 부위에서 피라도 떨어져야 하는데, 그런 것도 없었다.
“대단하군요.”
미스터 블루가 몸을 낮춰서 내 시야에 자신의 얼굴을 내보였다.
대단한 자비네.
녀석은 싱긋 웃으며 내 손에서 리볼버를 뺏었다.
“지금까지 당해 본 부상 중 최고입니다. 아무리 저라도 영거리 사격으로 이런 구경의 총알을 맞으면 위험하거든요.”
부상?
미스터 블루는 복부를 가리켰다. 분명 총을 맞은 상처 주변의 옷이 갈가리 찢겨 있었다.
“지금 필사적으로 몸을 압축시켜서 버티는 중입니다. 아무래도 놀이는 여기까지 해야겠군요. 이 이상 지체하다간 밖의 포위를 돌파할 체력이 남아나질 않을 겁니다. 게다가…….”
미스터 블루는 갑자기 벽을 쳐다보면서 표정을 지웠다.
“다른 분들을 옮기는 것도 힘든 일이겠죠.”
녀석은 별다른 인사 없이 통로 저편으로 달려갔다.
안심해야 하나? 아니면 무력함에 분노해야 하나?
태어나서 지금처럼 혼란스러운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는 그래도 능력자가 아니어서, 돈이 부족해서, 아님 약점을 제대로 공략하지 못해서 등 뭔가 이유라도 있었다.
근데 이건 그냥 우리가 약해서 진 거잖아?
제기랄, 심지어 저놈은 총알이 자기 배 속에 박혔는데 멀쩡하게 뛰어다닌다고! 리볼버 정도면 아무리 능력발동으로 강화시켜도 관통이란 말이야!
꼬치꼬치 짜증만 늘어간다. 거기다가 제어실 상황은 짐작도 안 간다.
‘상팔 형.’
루호?
침착하게 팀원들의 상태를 점검했다.
오오! 다들 쓰러지긴 했지만, 기절까지 한 건 아니다.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여 동료들에게 기어갔다. 다들 쓰러진 채 눈만 말똥말똥 떠서 날 쳐다보고 있었다.
“미안해. 한심하게 져 버렸어.”
날 믿고 최선을 다해 준 모두에게 사과했다.
“형,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어요.”
루호가 힘겹게 손을 뻗어 내 어깨에 얹었다.
“포기하면 안 돼요. 저희는 더 이상 몸을 일으킬 수 없지만, 적어도 형만이라도 일어서야 돼요. 형이라면……어떻게든 해 주실 거잖아요?”
아니야, 루호야. 형도 한계야. 넌 나보다 강한 애가 그걸 모르는 거니?
“모두, 상팔 형에게 손을 주세요. 그럼 상팔 형에게 남은 힘이 전해질 거예요.
루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들 내 몸에 손을 올렸다.
이러지 마. 난……그럴 자격이 없어. 입술을 씹으며 망설인다. 내가 정말 할 수 있을까?
“앗, 따가워.”
최향자의 손이 내 목을 꼬집고 있다. 덜덜 떨면서 손을 뻗은 주제에 꼬집을 힘은 남은 모양이다.
“어서 가져가! 내 동생을 구해!”
최향자의 엄포와 함께 다들 격려와 응원을 한마디씩 보냈다. 덕분에 뒷목을 시작으로 온 등에 닭살이 돋았다.
하는 수 없지.
“고마워요.”
성의를 무시할 수 없는 법. 눈을 꼭 감은 채 마음속으로 모두에게 감사의 인사를 보냈다. 그리고 모두의 손을 통해 얼마 안 되는 H력을 빨아들였다.
한 번에 이렇게 다양한 H력을 받아들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양은 미비해도 가지각색의 힘이 몸으로 흘러와 심장을 주물렀다. 혈압이 빨라지고 초점이 뭉개지다가, 이내 멀쩡해졌다. 그리고 몸을 다시 일으킬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희망을 담아 인사를 건넸다.
“그럼 다녀올…….”
아……. 마지막 힘을 나에게 준 후, 모두 탈진으로 인해 실신해 있었다. 감겨 있는 눈과 희미한 미소를 띤 입, 안심하고 잠든 얼굴이 날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썅!
“죽더라도 해 볼게.”
들리든, 안 들리든 맹세했다. 그리고 다리를 절뚝이며 제어실로 뛰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