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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드헌터 김상팔-111화 (111/250)

111화

111화

“어때요? 독점 인터뷰를 해 주시면, 섭섭지 않게 해 드릴게요.”

“글쎄요.”

구체적으로 제시하시죠?

“흐음…….”

기기래는 잠시 나에게서 물러나 뭔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녹음기는 집어넣은 채 검지 가운데 마디를 깨문 모습이 흡사 고양이 같았다.

그냥 도망칠까? 따돌릴 자신은 있는데……. 기기래는 다시 돌아와 진지하게 물었다.

“그럼 제가 밥을 사 드리는 건 어떨까요?”

“예?”

밥? 누굴 거지로 아나? 아놔! 한참 고민하더니, 이게 최선입니까? 확실해요?

“방금 승낙한 거죠?”

기기래는 내 손을 잡으며 펄쩍 뛰었다.

“예에?”

그건 그냥 되물은 거잖아!

“설마 사내대장부가 한번 한 말을 취소하진 않겠죠?”

“우리나라 국민정서상 구두계약은 그냥 헛소리 아니던가요?”

“녹음이 되었다면, 이야기가 다르죠.”

기기래는 주머니에서 좀 전에 집어넣은 녹음기를 꺼내 보여 주었다. 녹음기는 쭉 녹음상태였다.

“도청은 불법 아닌가요?”

“대화 당사자가 직접 한 거라면, 합법이죠.”

“제가 정말로 응했다고 생각하세요?”

이런 말까진 하고 싶지 않았지만……이 기기래란 기자, 은근히 끈질겨. 루호도 진땀 꽤나 뺐겠는데?

“당, 연, 하, 죠.”

안경알 뒤로 보이는 기기래의 눈동자에 빨려들 것 같다. 확실히 매력적이다.

일단 시선을 회피.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았다.

오오, 음료 종류가 엄청나게 다양하다. 이런 자판기는 처음이다! 포도맛 탄산 하나, 오렌지맛 탄산 하나, 홍차 하나, 사이다 하나, 멜론맛 우유 하나, 숙취용 음료 하나. 음, 난 뭘로 할까?

“기자님은 뭘로 드실래요?”

“네? 어……전 그냥 흰 우유요.”

이 자판기, 없는 게 없다. 우리나라에서 유통되는 거의 모든 음료수가 다 있는 것 같다. 흰 우유를 뽑아서 기기래에게 건넸다.

“드세요. 그럼 전 이만…….”

“잠깐만요!”

“왜 그러시죠?”

이제 슬슬 헤어지시죠?

“아직 이야기가 안 끝났어요! 조금, 아주 조금이면 돼요. 몇 마디도 안 되나요?”

“루호에 대해선 한 마디가 아니라 한 글자도 말할 수 없어요.”

내 말에 기기래의 표정이 싹 바뀌며 눈동자가 번뜩였다.

“그럼 질문을 바꾸죠. 그럼 되겠죠?”

“뭐가 궁금하신데요?”

음료수가 식거든요? 아무도 미적지근한 설탕물 따위 좋아하지 않는다고요!

“유정이란 분…….”

더 들을 것 없다.

“바이, 바이.”

객석 자리까지 전력질주로 뛰었다. 뒤에서 기기래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 소리가 멀어질수록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거기 서요!”

앗! 멀어지던 목소리가 다시 또렷해진다. 살짝 고개를 돌리니까, 뒤에서 날 따라 뛰는 기기래가 보였다. 투피스 치마가 위로 밀려 올라가는데도 아랑곳 않는 모습에서 그녀의 집념이 느껴졌다. 집요하다! 저러다가 치마가 완전히 올라가서 속옷이 보일 것 같다.

“하는 수 없지.”

발걸음을 멈추고는 기기래를 기다려 줬다. 헉헉거리며 쫓아온 기기래는 내 어깨를 붙잡으며 당당하게 중얼거렸다.

“드디어 잡았다, 넌 내 거야……!”

내가 무슨 푸켓몬입니까?

“참 고생하시네요.”

진짜로 한돈 아저씨한테 맡길까. 아저씨한테 맡기면 볼 만할 텐데…….

“제발, 제발 인터뷰 좀…….”

싫은데? 갑자기 장난기가 돈다.

“좋아요, 해 드릴게요. 대신……!”

일단 승낙하는 내 말에 기기래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대신?”

“대신, 노코멘트하는 질문은 더 이상 물어보지 마세요.”

“앗, 그건…….”

왜 고민하는 거야? 당사자가 싫다는데? 기기래는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기기래는 주머니에서 무려 수갑을 꺼냈다. 그리고는 나와 자신의 손에 각각 한쪽씩 수갑을 채웠다.

“이게 뭐죠?”

“후후후, 체포하겠어요!”

이건 또 뭐야? 어째 만나는 사람마다 정상이 없어!

“이러면 도망치지 못하겠죠?”

자신만만해하는 기기래. 흠, 그냥 힘으로 끌고 다녀도 될 것 같은데……. 그러면 너무 불쌍하려나?

“인터뷰는 관람이 다 끝난 후에 하겠어요. 알았죠?”

“좋아요!”

기기래는 고개를 위로 치켜들며 크게 웃었다. 그 소리에 근처를 지나던 사람 하나가 우리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객석으로 돌아오고 아저씨에게 양해를 구했다. 아저씨는 투덜대면서 자리를 한 칸 옆으로 옮겼다.

“젠장, 어디서 또 이상한 여자를 데려왔어?”

아저씨는 기기래를 흘겨보며 이를 갈았다.

“그러게요.”

아저씨에게 멜론맛 우유를 건넸다. 아저씨는 건네받은 우유를 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오오! 이런 것도 있어? 세상에, 이러다가 나중엔 된장맛 우유도 나오겠는데?”

멜론과 된장 사이에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지 모르겠다. 그냥 무시하자.

16강 시합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이씨 형제들과 최상길, 심지어 나존귀까지 8강에 진출했다.

마지막 시합은 정체불명의 1위, 블루스 킴의 차례였다.

이름 때문인지 입고 있는 양복은 파란색. 어쩌면 팬티까지 파란색일지 모른다. 훤칠한 키에 잘생긴 얼굴. 그런 와중에 날카로운 눈매가 매섭다. 이름이 블루스 킴인 것을 감안하면 한국계 외국인이거나, 혼혈이 아닌가 싶다.

최향자나 변해라와 붙여 보고 싶은 눈이다. 좋게 말하면, 차도남. 나쁘게 말하면…….

“저 자식, 무슨 눈깔이 사람 죽인 눈깔이네?”

뜨끔. 아저씨 말에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우리의 생각이 이심전심인 것을 보면,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닌 모양이다.

블루스의 선택은 놀랍게도 단검. 무기의 강함을 논할 때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바로 ‘길이’다.

무게와 함께 가장 강력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요소. 단검의 길이가 겨우 식사용 나이프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굉장히 불리한 점이다.

블루스의 상대는 봉을 들고 있다. 봉은 전체적으로 나무지만, 양끝이 강철로 덥혀 있는 형태였다. 능력수치의 차이를 감안하면 별로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시작!”

블루스는 시작과 동시에 단검을 상대에게 던졌다. 그러나 던진 것 자체는 평범했기에 상대는 봉을 회전시켜 간단히 단검을 튕겨 냈다. 그리고 블루스는 맨손이 되었다.

검술 종목의 규칙상 맨손이 된 시점부터 1분 이내에 다시 무기를 쥐지 않으면 실격패가 된다.

상대는 봉 끝을 블루스에게 겨누며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블루스는 손을 까딱이며 도발했다.

“날 놀리는 거냐?”

상대는 이를 갈면서 조금씩 발을 움직였다. 꼼지락거리며 블루스와 거리를 좁히는 모습이 참 안쓰러웠다.

블루스는 말없이 상대를 쳐다보다가 서로의 거리가 5m 정도 됐을 때 쏜살같이 움직였다.

질풍. 바람이 거세게 일며 블루스를 밀어줬고, 블루스는 그 바람에 몸을 맡겨 단번에 상대의 바로 앞까지 움직였다. 그리고 상대가 별다른 방어 자세를 취하기도 전에 검지로 살짝 상대의 명치를 찔렀다.

“억!”

상대는 그 순간 기절. 블루스는 다른 손으로 주머니에 넣어 손수건을 꺼냈다. 그리고 상대에게 닿았던 검지를 손수건으로 닦았다.

“블루스 킴이라…….”

과연 루호에게 위협이 될 만하다.

“흠, 자료에는 없는 이름이네요.”

기기래는 한손으로 휴대전화를 조작해 블루스에 대해 검색하고 있었다. 기기래의 휴대전화에는 갖가지 이름이 저장되어 있었다.

“이번 대회에는 숨어 있던 실력자들이 대거 참여한 것 같아요. 물론 제 관심은 오로지 하나지만……!”

기기래의 시선이 실로 부담스럽다. 기자로서의 열정은 인정하지만, 그 외엔 그냥 비정상처럼 보인다.

“그러세요?”

일부러 심드렁하게 대응한다. 성실하게 상대해 주면, 그만큼 사람 피곤하게 할 타입이다.

8강에 오른 사람들은 상처 하나 없이 대부분 압도적인 실력을 보여 줬다. 아직까진 내 예측대로 시합이 진행되고 있다.

루호의 다음 상대는 이이. 비록 정식 헌터 자격시험에선 떨어졌지만, 그래도 무시할 수 없는 강자다.

이이는 봉을 돌리며 몸을 풀고 있었다. 루호의 채찍과 비교하면, 둘 다 길이 면에선 밀리지 않았다.

“누가 이길 것 같아요?”

기기래가 흥미로운 말투로 물었다. 내 대답은 정해져 있다.

“루호요.”

“그래요? 물론 조루호 씨가 능력수치에선 우세하죠. 하지만 이이에게는 조루호 씨에게 없는 것이 있어요.”

서, 설마……지구력을 말하는 건가?

“뭔데요?”

“경험이죠.”

아! 일리 있는 말이다.

“상팔 씨가 업로드한 영상은 전부 봤어요. 꽤 흥미롭더군요. 솔직히 단기간에 그런 성과를 낸 부분은 놀라운 수준이에요. 하지만……동급의 다른 헌터팀과 비교하면, 헌한발은 아직 불완전해요. 그런 면에서 조루호 씨도 미숙하다 할 수 있죠.”

기자가 맞긴 맞나보네.

“그럼 기자님은 이이가 이길 거라고 보시나요?”

내 질문에 우리팀 전원의 얼굴이 어두워지며, 시선이 기기래를 향했다.

“네. 경험은 무시할 수 없으니까요.”

독재국가 가서도 지도자 욕하실 분이네! 심판은 링 옆에 서서 힘차게 공을 때렸다.

“시작!”

루호와 이이는 동시에 거리를 좁혀 무기를 휘둘렀다. 루호의 채찍이 뱀처럼 허공을 헤엄쳐 이이의 얼굴을 노렸다. 첫 시합처럼 상대의 얼굴을 감아 기절시킬 심산이었다. 그러나 이이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이는 봉을 살짝 젓는 것으로 채찍이 봉 끝에 감기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봉을 힘껏 당겨서 역으로 루호를 잡아끌었다.

양쪽 모두 능력 발동! 두 줄기의 아지랑이가 공명하듯 용솟음치며 하늘로 올라갔다.

팽팽한 힘 싸움. 양쪽 모두 밀리지 않겠단 각오가 보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균형은 금방 깨졌고, 루호가 조금씩 앞으로 끌려갔다.

힘에서는 루호가 아래인 건가.

기기래가 말한 경험과는 별개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루호의 천재적 재능은 기술적 영역, 신체적인 부분은 순전히 노력으로 이룬 것이다. 그렇다면 신체적인 면에서는 더 많이 노력한 사람에게 밀리는 것이 당연하다.

“역시 경력의 길이가…….”

분하지만, 기기래가 옳다. 루호는 최대한 버텼지만, 한 번 기울어진 힘의 방향을 바꿀 수 없었다. 그러자 과감히 힘겨루기를 포기, 채찍을 손에서 놓고는 상대에게 달려들었다.

“바라던 바다!”

루호를 따라 이이도 봉을 놓았다. 그리고 자신에게 달려든 루호를 향해 시원한 지르기를 날렸다.

루호의 안면으로 날아드는 이이의 주먹. 루호는 몸을 기울여 이이의 주먹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했다. 빗나간 이이의 주먹이 루호의 뺨을 스쳤다.

루호는 주먹을 피한 직후, 몸을 낮춰 이이의 뒤로 돌아갔다. 그리고 양 주먹으로 각각 이이의 무릎 뒤를 때렸다.

“으아아악?!”

무릎이 접히며, 이이의 몸이 앞으로 쏠렸다. 양손으로 상체를 지탱하면서 무릎을 꿇은 모습. 완벽한 OTL자세였다.

루호는 씩 웃더니, 재빨리 이이를 돌아서 채찍을 쥐었다. 루호가 힘을 빼서 천천히 잡아당기자 채찍은 봉 끝에서 스르르 떨어져 나왔다.

“감히 날 구경거리로 만들어?!”

이이는 이를 갈면서 봉을 잡았다. 그리고 봉을 지팡이 삼아 몸을 지탱해 일어섰다.

“흐음…….”

이이는 두 팔을 머리 위로 쭉 펴서 봉을 들었다. 그리고 헬리콥터의 프로펠러처럼 봉을 빙글빙글 돌렸다.

“남자답게 한 방 승부 어때?”

이이의 아지랑이가 팔에서 봉으로 옮겨 가 오로라처럼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상관없습니다.”

루호는 일관 모든 힘을 전신에 집중하며 이이의 기세에 맞섰다.

“으랏차차!”

이이는 기합과 함께 전신을 회전시켰다. 몸과 함께 봉이 돌면서 바람을 일으켰고, 그 바람이 회오리를 일며 이이를 집어삼켰다.

뭐, 뭐지?! 저런 건 반년 전엔 없었는데……? 이이는 회오리째 날아올라 공중에서 한 바퀴 돌았다.

“필살! 회오리 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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