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110화
의문이 채 뻗어 나가기도 전, 관중의 함성이 고막을 때렸다.
“앗!”
그렇다. 마지막 왕복인 것이다. 잠시 디마에 대한 것은 접어두고 호규를 응원했다.
“호규 이겨라, 호규 이겨라, 호규 이겨라!”
마지막 50m. 드디어 각자가 준비한 비장의 무기가 나왔다.
호규은 접영을 중단, 갑자기 머리를 물속에 박은 채 그냥 둥둥 떠 있는 자세를 취했다.
“저, 저거 큰일 난 거 아니에요?”
아란이 내 팔을 잡아당기며 소리쳤다.
“아닐 거야.”
호규는 출발선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그동안 다른 선수들에게 추월당해 등수는 7위까지 떨어졌다.
1위인 한백년은 조금도 속도가 줄지 않으며 완주 성공.
2위인 한유화는 수준급의 크롤영을 보여 주며 결승선까지 불과 10m를 남겨두고 있었다.
의외였던 것은 손평화.
손평화는 별다른 변화 없이 5위 정도로 순위를 유지했다. 그냥 저대로 완주할 모양이다.
2위인 한유화도 완주.
3위를 놓고 나머지 선수가 치열하게 경쟁 중이었다. 완주까지 약 20m. 그러나 그것은 한순간에 끝났다.
가만히 떠 있던 호규을 염려한 직원들이 레인으로 접근하자, 갑자기 거대한 물보라가 일며 호규의 몸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소리를 타고 뻗어 가는 로켓. 호규는 1초도 안 돼서 결승점에 도달, 그대로 머리를 결승선 벽에 찧었다. 그리고 차분해진 수면 위로 아란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객석까지 전해졌다.
“호규 씨!”
호규의 머리 절반이 벽에 박혔다. 몸이 축 늘어진 것은 방금 전과 같지만, 이번엔 정말로 기절한 것처럼 보였다. 완주는 완주인데…….
결국 호규는 정말로 직원에 의해 구출되어서 물속을 나왔다.
모든 선수가 완주하고, 직원들이 선수들에게 타월을 나눠 줬다. 머리를 다쳐서 실려 나간 호규를 제외하고, 모두들 타월을 걸친 채 대기실로 향했다.
“호규 씨는 괜찮을까요?”
“글쎄다. 죽지는 않았겠지. 근데 지금 네가 남 걱정할 때냐? 그래도 호규는 3등인데? ‘실격패 팀장님’아! 줄여서 실패장, 끌끌끌!”
“또 기묘한 줄임말을……!”
30분의 정비 시간 동안 필드가 어떻게 변하는지 볼 수 있었다. 무려 최첨단 전자동 시스템으로 필드 전체가 아래로 꺼지며 다른 필드와 교체되는 방식이었다.
“상팔아, 저것 봐라! 돈지랄이다!”
다른 때라면 아저씨의 말을 수정하겠지만, 이번엔 인정. 필드는 아예 다른 것으로 변경되었다. 다음 시합인 검술에 맞춰 바닥에 매트가 깔린 넓은 링이 올라왔다.
링 주변은 원형으로 잔디밭, 또 여러 무기가 놓인 진열장이 있었다.
“루호가 몇 등이었지?”
아저씨의 물음에 잠시 기억을 되짚었다.
“3등이요.”
순수한 능력 수치로 세 번째. 분명 엄청난 일이긴 하다. 그러나 방심해선 안 된다.
수영처럼 능력 수치 총합 1위가 또 랭킹 헌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2위인 최상길은 헌터 랭킹 72위.
3위인 루호는 헌터 랭킹 95위다.
“하아…….”
수영은 단거리, 장거리 전부 꽝이다. 설마 손평화가 5등을 할 줄이야. 그럼 뭣 하러 나온 거야? 몸매 자랑하려고?
한유화의 수영 실력도 예상 외였다.
역시 쉽게 돈을 벌려고 하면 쉽게 잃는 법이다.
하, 지, 만! 검술은 다르다.
수영과 달리 이 부분은 헌터로서의 역량이 충분히 발휘될 수 있는 종목. 그렇기에 적중률이 올라갈 것이다.
역시 수영의 두 세부 종목보다 검술에 더 큰 금액을 건 것이 정답이었다.
필드에 선 16명은 저마다 손에 무기를 든 채 관객을 향해 일렬로 섰다.
루호가 고른 무기는 채찍. 평소에 즐겨 쓰는 유성추와 비슷하기 때문인 것 같다.
검, 봉, 창, 도끼, 방패 등등 강철로 만들어진 무기들은 날이 서지 않았을 뿐 실제 병기와 다를 바 없었다.
“루호, 파이팅!”
“조루, 호! 끌끌끌!”
나와 아저씨의 응원에 루호가 응답하듯 손을 흔들었다. 호규는 그렇다 쳐도 우리 루호는……!
“루호야, 너만 믿는다!”
양손을 모아 깍지를 꼈다. 정말 기도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16강 첫 시합. 루호와 그 상대가 링 위에 올랐다.
루호는 당당히 상대와 마주했다. 반면에 상대는 시작 전부터 루호의 기세에 밀려 눈조차 마주치지 못했다.
“시작!”
심판이 구리로 만든 공을 치자마자, 상대는 겁에 질려 루호에게 돌진했다.
“야아아아!”
불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 상대는 H력을 뿜어내며 장검을 내려쳤다.
루호는 거기에 맞서 몸을 날렸다. 루호의 어깨를 아슬아슬하게 검 날이 스쳐 지나갔고, 그 위력으로 셔츠의 어깨 부분이 찢겼다.
“핫!”
루호는 채찍을 한 번 휘둘러 빠르게 상대의 얼굴을 감았다. 채찍이 얼굴을 감으며 1차적으로 압착, 다 감겨진 후 채찍 끝이 2차적으로 얼굴을 때리며 충격을 주었다.
시합은 그것으로 끝났다.
상대는 채찍 끝에 맞는 순간 옆으로 쓰러졌다. 직원들이 달려와 채찍을 풀어 줬을 때 상대는 기절해 있었다.
만약 평소에 쓰던 유성추였다면 쇠구슬로 인해 머리가 박살 났을 것이다.
“응?”
의자 뒤에서, 나와 아저씨 사이로 한 젊은 여성이 상체를 들이밀었다.
“이봐, 이게 뭐하는 짓이야? 여긴 공공장소라고!”
아저씨가 버럭 소리치며 여성의 어깨를 밀었다. 그러나 여성의 상체는 의자 사이에 끼인 형국이었기에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파요, 좀 살살 미세요!”
여성이 팔꿈치로 아저씨의 턱을 정확히 가격하며 말했다.
“이건 또 어디서 굴러먹던 개뼈다귀야?”
“개뼈다귀가 아니라 기자거든요?”
기자? 여성의 말을 듣고, 천천히 여성의 행색을 살폈다.
단정한 투피스 차림, 단발머리, 그리고 빨간색 안경. 안경이 포인트인 건가.
“누구세요?”
일단 예의상 물어봤다.
“어머, 제 소개를 깜빡했네요.”
여성은 아저씨를 흘겨보며 입으로는 활짝 웃었다. 참 묘한 표정이다.
“전 이런 사람입니다.”
여성은 품속에서 지갑을 꺼내 그 안의 명함을 꺼냈다.
또 명함이냐.
[사냥일보 기자 기기래.]
기자한테 악감정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이상하게 ‘기자’란 글자를 보자마자 경계심이 생긴다.
아저씨는 기기래의 상체를 밀면서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리고 나와 함께 명함을 보고는 폭소를 터뜨렸다.
“이름이 뭐 이 따위야? 영어 식으로 하면 ‘기래기’네? 끌끌끌!”
기기래의 얼굴이 아주 험악하게 망가졌다.
“제 이름에 무슨 불만이라도?”
“아, 아닙니다.”
일단 아저씨 얼굴을 밀어내고는 기기래가 있는 의자 뒤를 봤다.
하이힐을 신은 기기래는 바닥에 쭈그려 앉은 채 허리를 의자 사이에 끼워 매우 위태로운 상태였다.
“음, 자세를 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기자에게 이런 자세는 기본이니까요.”
아니요, 네가 아니라 보는 내가 불편해요.
“아저씨, 저 잠시 마실 것 좀 사 올게요.”
“끌끌끌! 올 때 메론나!”
“마실 거라니까요?”
루호가 없으니까 아저씨가 미쳐 날뛰시는구나. 일렬로 앉아 있던 팀원들은 너도나도 손을 들었다.
주아라.
“난 포도 맛 탄산!”
주아란.
“전 오렌지 맛 탄산이요!”
유정.
“전 탄산 없는 걸로 부탁드려요.”
변해라.
“아무거나.”
티라노 대가리.
“전 비싼 걸로 부탁드려요.”
“알았어요. 그럼 다녀…….”
잠깐, 티라노 대가리? 눈을 비비며 소리가 난 방향을 쳐다봤다.
“대팔 씨?”
“안녕하세요.”
디마가 앉아 있던 앞자리에 어느 순간 김대팔이 앉아 있었다. 이런 미친……!
“디마 씨는 어디로……?”
“디마 씨요?”
김대팔은 인형 옷의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전 방금 왔습니다. 빈자리가 있기에 그냥 앉은 건데요?”
디마, 이 자식! 언제 사라진 거지? 어쨌든 김대팔을 뒤로하고 기기래와 함께 객석을 잠시 벗어났다.
우리는 음료수 자판기로 향했다. 한창 검술 시합 중이라서 그런지, 자판기 주변엔 사람이 없었다.
“마침 잘됐네요. 여쭈어 보고 싶은 게 많았거든요. 듣는 귀가 많으면 서로 불편하겠죠?”
기기래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한 손엔 수첩, 한 손엔 녹음기가 들려 있었다.
이 사람, 본격적이다? 침착하자. 내가 최근에 뭐 잘못한 적 있나? 아니면 물의를……. 크윽, 너무 많잖아! 짐작 가는 게 너무 많아서 문제다.
“녹음기는 좀 불편한데요?”
“왜요?”
기기래는 입을 벌리며 음흉하게 웃었다. 분명 내게서 뭔가를 기대하는 표정이었다.
“뭔가 찝찝하신가요? 아하! 혹시 무슨 죄라도 지으셨나요? 비리? 성추행? 폭행? 부당 청탁? 절도? 명예 훼손? 무단 침입? 이성 혐오?”
마지막 것은 범죄가 아닌데요? 그나저나 도대체 날 뭘로 보고……?
“지금 취조하십니까?”
잔뜩 인상을 구겼다. 신사적으로 대하려고 해도 이건 대놓고 싸우잔 거잖아.
“호호호, 아니요. 그냥 장난친 거예요. 찔리시는 게 없다면 떳떳하시겠죠?”
기자란 양반이 프라이버시의 개념을 철저히 망각하셨군.
“뭐가 궁금하신 거죠?”
쓸데없는 소리하면 그 즉시, 아저씨한테 바톤 터치다.
“제가 궁금한 건 지금 검술 시합을 치르고 있는 조루호 씨에 대한 거예요.”
“루호요?”
흠……. 다행히 취재 내용은 정상적인가 보네.
“네. 조루호하면 한때 업계에서 아주 핫한 신인이었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모든 활동을 접고 은둔에 들어갔었죠?”
본격적이군.
“그런데요?”
“은퇴 이유는 요양이라고 했지만, 병원 진료 기록을 살펴본 결과…… 뚜렷한 병명은 없었거든요. 그러던 조루호 씨가 갑자기 복귀한 이유가 뭔가요?”
그걸 지금 내 입으로 말하라고?
“본인한테 직접 물어보시죠?”
“그게……. 몇 번이나 찾아갔는데, 끝까지 거절하더라고요.”
당연히 거절하지! 어떤 미친놈이 자기 약점을 공개해? 더군다나…… 아저씨가 괜히 루호보고 ‘조루’라고 놀리는 게 아니잖아?
“그렇게 본인이 이야기하기 싫어한다면 묻지 않는 게 예의 아닌가요?”
어느새 기기래의 손가락은 녹음기의 녹음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제길, 아예 입을 다물어야 하나? 그러다가 아저씨한테 인터뷰를 해 달라고 하면…….
상상을 해 보자.
‘끌끌끌! 혼돈, 파괴, 망……!’
쉴 새 없이 떠드는 아저씨.
경악하는 기기래 기자.
헌한발의 참뜻, 그리고 이어지는 성희롱과 각종 혐오성 발언. 미디어를 통해 끓어오른 여론이 우리를 덮친다!
머릿속에서 완전 자동으로 영상이 펼쳐졌다. 정말로 아저씨가 그렇게 입이 쌀까? 기기래가 사례금을 준다고 한다면?
사! 례! 금!
“상팔 씨?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시는 거죠?”
아차! 너무 망상에 빠져 있었나?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럼 조루호 씨에 대해 한 말씀 해 주실 수 있을까요?”
“노코멘트 하죠. 본인이 그렇게 완강히 거부했는데, 팀장이란 사람이 입 가벼운 소릴 할 수는 없습니다.”
기기래는 고개를 돌린 채 입을 뚝 내밀며 중얼거렸다.
“멍청하게 생긴 주제에 잘도 지껄이네.”
다 들리거든? 가만 생각하면 얘도 인성이 좀 의심스럽다.
“하실 말씀은 그게 다인가요?”
그럼 그만 꺼져 주시죠?
“그래요? 흠, 안타깝네요. 저한테도 상팔 씨한테 유용할 정보가 있는데…….”
유용한 정보?
“세상은 ‘기브 앤 테이크’가 기본 아니겠어요?”
“관심 없습니다.”
“전 있는데요? 솔직히…… 헌한발? 팀 이름부터, 멤버 하나하나까지, 아주 흥미로워요. 다른 기자한테 뺏기고 싶지 않을 만큼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