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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드헌터 김상팔-107화 (107/250)

107화

107화

최대한 말을 늘리며 심판의 반응을 살폈다.

심판은 똥마려운 표정으로 다리를 동동 굴렀다.

“그럼 이백?”

“그러니까…… 결승전…… 즉…… 지금…….”

“삼백?”

“지금…… 하려는…… 씨름…… 경기에서…….”

“사백?”

“경기에서…… 안타까운…… 심정으로…… 기…….”

‘기권’의 ‘기’까지 나오자 심판은 이성을 상실했다.

“그럼 천만!”

사백에서 단숨에 천만이 되는 기적!

“콜!”

천만 원이면 얼마든지 인간 샌드백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안타까운 심정으로 기깔 나게 최선을 다해 경기에 임하겠습니다!”

다시 자세를 고친 후 적지형의 샅바를 잡았다. 심판은 이마의 땀을 닦은 후 큰 소리로 외쳤다.

“시작!”

적지형은 또 능력발현. 하반신이 모래에 묻히며 사실상 씨름판 바닥과 한 몸이 되었다.

어차피 3위 입성이란 목표를 달성한 이상 지금 굳이 녀석을 이길 이유는 없다. 그냥 적당히 지자.

“아닛?”

적지형은 날 냅다 위로 집어 던졌다. 조금은 버티다 져 줄 생각이었는데, 그것은 내 커다란 착각이었다.

“금방 끝나진 않을 거야!”

적지형은 떨어진 날 정확히 잡아서, 다시 집어 던졌다.

그렇다. 녀석은 날 가지고 저글링을 시작한 것이다.

“천만 원, 천만 원, 천만 원!”

아래에서 위로 오르락내리락할 때마다 한 번씩 속으로 ‘천만 원’을 생각했다.

“토해 봐. 그럼 그만둬 줄 수도 있어. 하하하!”

적지형은 미친 듯이 웃으며 기분을 풀었다. 변태 같은 자식, 나보고 토하라고?

나도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다. 그러나 내가 비위 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아서 멀미는 할지언정 절대 토하진 않는다.

녀석은 날 절대 지지 않게끔 하면서 갖고 놀았다. 하하하. 미치겠네.

‘던졌다, 받았다’에 익숙해질 때쯤 녀석은 날 집어 던지는 것을 멈췄다. 그 대신 내 허리를 잡고 봉처럼 빙글빙글 돌렸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그래도 타격 종목이 아닌 게 어디야? 비록 내 위장들이 머리와 엉덩이 양끝으로 몰리는 중이지만, 그래도 아직까진 버틸 만하다.

이 녀석, 어지간히 사람 괴롭히는 걸 즐기는구나. 헌터가 아니었다면 100퍼센트 나쁜 길로 빠졌을 것이다. 주아라랑 붙여 보고 싶은 인성이다.

적지형은 씨름판의 모래를 전부 끌어 모아 자신의 하반신에 붙였다.

모래 더미는 커지고 커져서 탑처럼 높게 치솟아 올랐고, 그 위에 붙은 적지형의 몸도 덩달아 높이 올라갔다.

적지형의 손에 잡힌 채 아래를 내려다보니, 순간 아찔해서 눈을 찌푸렸다.

“정말 이러고 싶진 않았는데…….”

난 분명 페어플레이 하려고 했어. 적지형, 네가 먼저 시작했다!

몸이 회전하는 동안 양손에 소량의 H력을 모았다. 그리고 압축과 축소를 통해 그것을 작고 투명한 구슬 형태로 만들었다.

몸에 직접 맞지만 않으면 장땡! 완성된 무광탄 하나를 적지형의 하반신을 향해 쐈다.

정확히는 녀석의 허리와 맞닿은 모래 더미의 가장자리. 다른 사람 눈엔 갑자기 적지형의 하반신이 폭발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뭐, 뭐야?”

녀석은 깜짝 놀라 날 놓쳤다.

와, 떨어진다. 난 분명 씨름을 하고 있었는데, 추락하는 중이다. 이거…… 무슨 데자뷰 같네?

공중에서 몸을 회전시켜 두 다리로 착지, 아슬아슬하게 패배는 면했다. 대신 짜릿짜릿한 충격이 발바닥을 타고 올라와 두개골 속 뇌를 때렸다.

아! 그냥 바닥에 엎어질 걸. 그럼 그냥 게임 끝인데……? 이왕 착지한 김에 조금만 더 해 볼까?

역시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

“받아라!”

다른 한 손의 무광탄을 발사, 시원하게 날아가 적지형의 안면에……. 안면? 얼굴?

“안 돼!”

망했다.

내 무광탄이 적지형의 얼굴에 시원하게 명중하며 폭발했다.

졸지에 테러를 당한 적지형은 얼굴이 뭉개지면서 쌍코피를 뿜어냈고, 충격의 여파로 능력이 풀리면서 모래 더미가 무너졌다.

“푸에에엑!”

나와 적지형은 쏟아지는 모래 더미에 파묻혀 씨름판 바깥으로 쓸려 나갔다.

그 모습이 카메라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참 꼴사납다.

“김상팔 선수, 반칙패입니다. 따라서 우승은 적지형 선수!”

너무 당황한 나머지 별 개소리가 다 나왔다.

“파, 판사님! 제 머릿속엔 고양이가 있습니다. 그 있잖아요! 만인블랙처럼 사실 전 로봇입니다. 본체는 제 머릿속에서 조종간을 잡고 있는 고양이입니다! 그러니까…….”

정신을 차리기도 전, 적지형의 회복이 한발 빨랐다. 녀석은 펄펄 뛰면서 모래를 조종해 내 목을 졸랐다.

“켁, 켁!”

와, 모래 입자 하나하나에서 느껴지는 압력으로 인해 금방이라도 목이 터질 것 같다. 마치 수천 개의 바늘이 꽂힌 느낌이다.

적지형의 폭주에 심판은 그냥 멀뚱히 구경만 하고 있다. 하긴, 상위 랭킹 헌터를 어떻게 막겠어.

“그만!”

누군가가 적지형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적지형의 모래가 힘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뭐야?”

적지형은 흉하게 미간을 찌푸리며 뒤를 돌아봤다.

“디마 씨?”

디마는 능글맞게 웃으며 적지형의 어깨를 세게 비틀었다. 그러자 적지형이 너무나 쉽게 쓰러지면서 바닥에 엎어졌다.

“어떻게?”

적지형은 기절. 디마는 윙크를 하면서 어깨를 들썩였다.

“비, 밀.”

이 사람, 진짜 러시아인일까.

“구해 줘서 고마워요.”

디마에게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분위기로 봤을 때 아마 협회 직원이나 심판은 내가 목 졸려 죽었어도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직원들은 기절한 적지형을 들것에 실어서 의무실로 옮겼다. 쌍코피와 교살의 맞교환이라……. 입안이 씁쓸하다.

결국 난 최종적으로 탈락하고 말았다.

젠장, 결승에 올랐는데 왜 수상을 못하니……, 왜 수상을 못하니…….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마음속으로 울고, 눈으로도 울었다. 오늘은 내가 김첨지다.

현재 시각 5시. 해가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수상식이 열렸다.

육상 단거리.

1등 왕오릉.

2등 장마리.

3등 나비상.

육상 장거리.

1등 장마리.

2등 나비상.

3등 한돈.

씨름.

1등 적지형.

2등 홍길동.

3등 전우치.

아저씨와 장마리는 날 발견하고 단상 위에서 환하게 손을 흔들었다.

단상 아래 서서 다른 패자들과 보는 기분이 퍽 서글펐다. 부럽다.

나도 답례로 활짝 웃으며 엄지를 들어 보였다. 하아. 그나저나 팀원들은 결국 끝까지 응원하러 안 왔구나.

수상에는 무려 지부장이 직접 상장과 부상을 전해 주러 나왔다.

헌터협회 한국 지부장, 천민일.

듣기론 나이가 80이 넘었다고 하던데, 소문처럼 정말 꼬부랑 할아버지다.

속되게 말하면 오늘내일 하게 생겼고, 좋게 말하면 나이에 비해 정정하다.

눈 옆으로 늘어진 눈썹과 길게 내려오는 수염은 하얗게 새서 실처럼 얇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고작 1m. 양복을 입었음에도 체격은 왜소하기만 하다. 살은 거의 없고, 뼈에 살가죽만 있다.

저런 허약해 보이는 사람이 지팡이 없이 똑바로 걷는다는 게 참 신기하다.

“홀홀홀. 축하드리오.”

천민일 뒤엔 김익조가 허리를 90도 이상으로 굽히며 뒤따르고 있었다. 김익조 뒤에는 박장, 박장 뒤에는 직원들이 뒤따랐다.

무슨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 같다. 아, 물론 저기서 공주는 장마리다.

차례차례 상을 나눠 주면서 천민일은 유독 장마리의 손만 놓질 않았다.

몇 번을 만지작만지작, 섬세하게 주물주물. 무슨 찰흙 빚으시나?

결국 장마리가 먼저 천민일의 손아귀에서 손을 뺐다. 그러자 지부장의 눈썹이 위아래로 들썩였다.

“건방진……!”

천민일은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주변 카메라를 의식해서인지 금방 차분해졌다. 대신 나머지 수상을 거부한 채 단상에서 내려갔다.

그 뒤는 김익조가 대신 진행했다.

옛말에 이런 말이 있다.

‘남자는 밥숟가락 들 힘만 있어도 바람을 핀다.’

흠흠. 그러고 보니까, 우리 팀 이름이 ‘헌터협회 한국 지부장은 발기부전’이었지?

천민일과 접촉조차 못한 나비상은 고개를 푹 숙이며 아쉬워했다. 그래서 김익조와도 대충 악수를 하고 보냈다.

참고로 김익조와 아저씨는 서로 눈길도 마주치지 않으며 무시했다. 참 다행이다.

“축하해요!”

오오? 관중석 맨 꼭대기 자리에 그토록 찾던 팀원들이 보였다.

조루호, 호규, 유정, 주아라, 주아란, 변해라, 공미.

금이야, 옥이야 모인 동료들이다.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글썽거렸다.

“어디 갔었어?”

내 외침이 들리지 않는지, 다들 손만 흔들었다. 그나저나 아까 심판이 말한 천만 원은 어떻게 된 거지?

나랑 이야기를 했던 심판을 찾아가 대놓고 물었다.

“돈은 언제 주세요?”

심판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대답했다.

“무슨 돈이요?”

와, 이런 개양아치가……. 이래서 구두 계약을 믿으면 안 된다.

“파이트머니요.”

“실격하신 주제에 무슨 말씀이신지?”

“안 주시겠다?”

“안 주는 게 아니라 못 주는 거죠. 천만 원이 뉘 집 개 이름입니까? 천만 원을 받고 싶었으면 똑바로 시합을 했어야죠. 그래야 저희도 협회에 자금을 요청할 것 아닙니까?”

크윽, 틀린 말은 아닌데……. 살짝 양심에 찔린다.

“그래도 돈의 지급 조건은 제가 기권하지 않는 거였지. 실격은 이야기에 없었잖아요?”

“아몰랑! 난 못 줘! 협회에 가서 따져.”

야, 이 양반 보소! 감히, ‘아몰랑’을? 아몰랑. 그것은 현대인이 쓸 수 있는 말 중에 가장 무책임하고, 개념 없으며, 논리적 언사를 포기하겠단 뜻이다.

지성인으로 남고 싶다면 절대 써서는 안 된다. 이쯤 되면 그냥 멱살 잡고 싸우잔 소리.

“하는 수 없죠. 아까 나눈 대화를 그대로 김익조 씨에게 말씀드릴게요.”

내 말에 심판은 눈 하나 깜짝 않았다.

“하이고! 그러시든지! 너 따위가 총괄팀장님하고 아는 사이라고? 랭킹 헌터쯤 되면 뭐 그럴 법도 한데, 당신은 그래 봐야 100위잖아?”

100위도 랭킹이거든요?

“어제 제가 그분 카드를 빌려서 크게 땄거든요! 모르세요?”

“뭐?”

흠칫. 심판의 얼굴이 단번에 어두워졌다.

“어제라면……. 서, 설마 그 10억짜리?”

“맞아요. 그게 바로 저예요.”

“세상에……! 어느 도박 중독자가 전 재산 몰빵해서 안 되니까, 노예 계약문서를 써서 10억을 걸었다고 했는데……. 그게 사실은 김 팀장님 돈이었다고?”

도대체 이 망할 소문이란 놈은 어떻게 와전된 거야? 한 번을 제대로 퍼지는 꼴을 못 봤네. 그래도 심판은 내 말을 듣고 진실을 깨달은 눈치다.

“험험. 그…… 돈을 꼭 다 드리기엔…… 이쪽도 사정이…….”

“그건 그쪽 사정이죠. 전 고작 100위밖에 안 돼서 그쪽 사정을 봐드릴 주제가 안 되거든요.”

심판은 이를 갈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계좌로 넣어 드리죠. 협회에 등록한 계좌면 되겠습니까?”

“좋네요!”

심판은 두 주먹을 꽉 주며 어딘가로 걸어갔다.

이걸로 2억 1천만. 남은 축제 일정을 즐기면서 다음 사냥감을 정해 봐야겠다.

투기장은 2주일 내내 계속되고, 경기장은 딱 5일간만 진행된다.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남은 8일 동안 펼쳐지는 랭킹 헌터의 올스타전.

아직 진짜 승부는 시작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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