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106화
디마는 씩 웃으며 상대의 귀에 대고 무어라 중얼거렸다. 그러자 상대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며 종아리가 떨리는 게 보였다.
“시작!”
이번에도 시작 구호와 동시에 승부가 갈렸다.
디마는 너무나 가볍게 상대를 들어서 씨름판에 내동댕이쳤다.
뭐라고 한 거지? 설마, 또 승부 조작?
디마는 씨름판 가장자리에 서서 모래를 털고 있었다. 재빨리 디마에게 다가가 물었다.
“뭐라고 속삭인 거죠?”
이번엔 디마의 목소리 톤이 달랐다.
무겁고, 차가운 음성.
“알아서 뭐하게?”
순간 소름이 돋았다.
얼굴은 여전히 웃고 있는데, 입은 아니다. 이 녀석, 왠지 웃는 얼굴로 사람 찌를 것 같은 부류다.
디마는 내 어깨를 토닥이며 유쾌하게 소리쳤다.
“다음은 상팔 씨 시합이죠? 파이팅!”
디마의 뒤를 이어 똑같은 자리에 내가 섰다.
상대는 오시오.
마주선 우리는 서로 멋쩍게 인사를 나눴다.
“안녕하세요.”
“그래, 오랜만이군.”
함께 드래건을 잡았던 동료를 상대로서 마주하게 될 줄이야. 내심 드래건을 사냥할 때 일이 매우 오래전 일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서로의 샅바를 잡은 채 시작 구호를 기다렸다.
“시작!”
“헛차!”
오시오는 앞으로 달려들며 몸을 최대한 쫙 폈다. 그리고 무게중심을 위로 옮겨 자신의 몸을 나에게 부딪쳤다.
“엇?”
샅바를 잡고 있기에 난 도망칠 수 없었다. 오히려 팔로 끌어당기는 힘까지 더해져 더 강하게 충돌했다.
우리는 동시에 균형을 잃었다. 그러나 오시오의 덩치와 높은 무게중심으로 인해 자연스레 내 몸이 오시오의 아래에 깔리는 형상이 되었다.
제법인데?
물 흐르듯 능숙한 기술에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나 나도 순순히 당하기만 하진 않았다.
뒤로 쓰러지려는 힘을 이용, 그대로 몸을 옆으로 180도 돌렸다. 덕분에 나와 오시오의 상하 위치는 정반대가 되었다.
“어이쿠!”
우리는 그대로 함께 모래 위에 쓰러졌다. 그리고 경기는 내 승리로 끝났다.
“하하하. 이거, 한 방에 끝나서 아쉬운데?”
오시오는 모래를 툭툭 털며 일어나 쓰러진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능력발현을 쓰지 않으셨네요?”
의외다. 분명 빙결 능력을 쓸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정당당하게 자신의 육체와 기술만으로 승부해야지. 안 그래?”
“네!”
백번 옳으신 말씀.
오시오는 나와 악수를 나눈 후 홀가분한 걸음으로 필드를 떠났다.
16명이 8명으로 줄기까지 1시간.
씨름 경기가 모두 끝날 때쯤엔 해가 질 것이다.
아직은 노을이 아닌 햇살을 밭으며 우리 8명은 투지를 불태웠다.
8강의 첫 시합이자, 가장 주목을 받는 두 사람의 대결.
김호랑과 적지형이 붙는다!
객석에서 어제 투기장에서 봤던 우레와 같은 함성이 쏟아졌다.
“미리 보는 결승전!”
“이겨라, 적지형! 마누라 몰래 모은 비상금, 너한테 다 걸었다!”
“지지 마, 김호랑! 난 너한테 아들 생일 선물을 걸었다!”
배팅이 크게 걸린 모양이다. 투기장과 달리 대놓고 배팅을 보여 주진 않으니, 정확한 정보는 알 수가 없다.
김호랑과 적지형은 씨름판 위에서 서서 서로를 마주 봤다. 둘 다 체형이 그렇게 크거나 육중하진 않았다.
둘은 엉덩이를 쭉 뺀 자세를 취한 후 서로의 샅바를 붙잡았다.
후후후, 나로선 참 잘된 일이다. 나보다 능력 수치가 월등하게 높은 둘이 붙다니!
운이 좋다. 어디, 느긋하게 구경해 볼까.
“시작!”
두 사람의 몸에서 아지랑이가 뿜어져 모래를 날렸다. 그리고 그것이 모래바람으로 변해 씨름판 전체를 휘감았다.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금 저 두 사람은 어마어마한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중이다.
계속 건방진 태도로 일관하던 적지형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진 것이 그 증거다.
두 사람은 부둥켜안은 채로 요동도 치지 않았다. 대신 두 사람 발 주변의 모래가 지진이 난 것처럼 ‘위아래’로 흔들렸다.
능력 수치 총합은 적지형이 위지만, 힘에 있어선 동일. 두 사람의 팔뚝 위로 힘줄이 불룩 튀어나왔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팽팽함.
객석의 응원과 함성으로 두 사람 사이의 투지는 더 뜨거워졌다.
“남자는…….”
김호랑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잇몸을 드러냈다. 그리고 버럭 소리를 지르며 적지형을 들어 올렸다.
“남자는 힘!”
힘에 있어선 김호랑이 한 수 위?
적지형도 놀랐는지 입을 벌린 채 그냥 순순히 들어 올려졌다. 이대로 승부가 나는 건가?
“앗!”
그럴 리가 없지. 드디어 적지형의 능력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아니?”
김호랑도 놀란 눈치. 적지형은 바닥에서 10cm정도 뜬 채 더 이상 올라가지 않았다.
씨름이란 종목에서 지독할 정도로 사기적인 기술. 기술이기 이전에 엄청난 반칙성 이점.
적지형은 모래를 조종해 자신의 다리를 모래바닥에 묶어 놓았던 것이다.
마치 모래로 만든 줄로 묶어 놓은 모양새. ‘장외’와 ‘들어 올리기’는 절대 통하지 않는다.
적지형의 양쪽 발목을 잡은 모래는 천천히 적지형을 바닥으로 끌어당겼다.
김호랑이 어이 상실을 해서인지 적지형은 손쉽게 바닥으로 내려왔다.
“이번엔 내 차례다!”
모래가 적지형의 다리를 바닥에 파묻듯이 고정, 적지형은 거리낄 것 없이 김호랑을 들어 올렸다.
“하반신만 고정되면, 효율 100%의 강한 힘을 낼 수 있지!”
저 자식, 단순 양아치가 아니었구나. 적지형은 김호랑을 180도 돌려 수직으로 바닥에 꽂으려 했다.
저거 씨름 기술인가? 프로레슬링기술에 더 가까운 것 같은데…….
씨름은 대학교 때 취미로 잠깐 한 것이 전부, 그래서 세세한 사항까진 모른다.
“남자는 힘!”
김호랑은 머리가 바닥에 닿기 직전, 몸 전체를 활시위처럼 튕기며 그 반동으로 적지형의 손에서 벗어났다.
오직 능력자끼리의 대결이기에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김호랑은 씨름판 가장자리에 착지, 그 순간 심판이 두 사람 사이로 들어왔다.
“정지! 다시 샅바를 잡으십시오.”
심판의 중재에 두 사람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다시 준비 자세를 취했다.
“좋습니다. 계속!”
심판이 빠지고, 두 사람은 또 힘겨루기를 했다. 그러나 이젠 경기 시작 때와 상황이 달라져 있었다.
적지형의 모래는 민달팽이처럼 스멀스멀 움직여 주인의 하반신을 덮었다. 그리고 모래가 모이면 모일수록 조금씩 김호랑이 힘에서 밀리기 시작했다.
“더, 더, 더!”
피라미드를 쌓는 노예처럼 씨름판의 모래는 적지형에게 몰려갔다. 그리고 적지형의 하반신을 뒤덮었다. 적지형의 하반신은 모래 더미에 묻힌 형국이 되었다.
“이젠 지지 않아. 하하하!”
저건 그냥 사기잖아! 저러면 어떻게 이겨? 축구를 할 때 골대 앞에 장벽을 세운 꼴. 질 만한 요소를 원천봉쇄한 것이다.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저렇게 이겨도 안 좋을 것 같은데…….
“포기하시지? 네 녀석의 완력이 나보다 강할지 몰라도, 그래 봤자 나보다 아래야!”
적지형의 선언. 찢어지는 목소리가 씨름판을 뒤흔들었다.
“그냥은 안 끝나! 감히 나한테 이런 기술까지 쓰게 만들었으니, 각오해! 마구 짓밟아 주겠어. 콧구멍부터 위장 속까지 모래로 꽉 채워 주마!”
적지형은 미친 망아지처럼 울부짖었다. 그것은 폭력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씨름이란 종목으로 얼마나 상대를 망가뜨릴 수 있을까.
앞으로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이 나올 것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항상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심판, 기권하겠습니다.”
오잉? 나도 놀라고, 객석도 놀라고, 적지형도 놀랐다.
김호랑은 적지형의 울부짖음이 끝나기 무섭게 적지형의 샅바에서 손을 뗐다.
“김호랑 선수, 기권. 따라서 적지형 선수의 승리!”
김호랑은 도망치듯 씨름판에서 나갔다.
푸훗! 잔뜩 지껄인 적지형은 오갈 데 없는 분노와 뜬금없는 배신감에 그대로 조각상이 되었다. 지금 얼마나 약이 오르고 창피할까?
자긴 자기 수단을 다 공개했는데 막상 상대가 도망쳤으니……! 김호랑에게 박수를 보낸다, 브라보!
다음 8강전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다음은 나와 디마의 경기.
디마는 나에게 의미심장한 윙크를 날렸다.
“살살 부탁해요, 상팔 씨.”
얘는 자기 마음대로 반말했다가 존댓말 했다가 하네? 이놈이 한국어를 제대로 할 줄 몰랐다면 그냥 그러려니 했을 텐데…….
“그래요. 한번 해봅시다!”
어디 실력 한번 보자.
디마와 마주 보고 서로의 샅바를 잡았다. 새삼 샅바를 통해, 그리고 맞댄 어깨를 통해 디마의 신체에 대한 정보가 간접적으로 전해져 왔다.
훤칠한 키는 곧 체중으로 이어진다. 거기에 근육까지 더한다면 견고한 요새와 같다. 이 자식, 잘생긴 데다가 몸까지 좋잖아?
간만에 유정에게 쏟지 못한 남자의 질투가 샘솟는다.
남자의 질투는 여자의 5만 배! 갑자기 힘이 샘솟았다.
“시작!”
“으랏차차!”
속전속결. 심판의 팔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자마자 디마의 다리 사이로 오른쪽 다리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집어넣은 다리를 갈고리처럼 디마의 다리에 걸어서 앞으로 잡아당겼다.
“오호?”
다리와 함께 어깨로 디마를 밀었다. 디마는 허무할 정도로 쉽게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어라? 벌써 끝? 너무 싱거운 승리였다.
디마는 어리둥절한 날 보며 또 윙크를 날렸다.
설마, 이 자식! 일부러……?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다.
어쨌든 이걸로 4강 확정!
씨름판을 중심축으로 동서남북에 해당하는 방향에 네 명의 선수가 섰다. 연속된 경기로 다소 체력과 H력 소비가 있었지만, 넷 모두 생생한 편이었다.
적지형은 2번 연속으로 기권승을 거두었다.
상대는 화가 잔뜩 오른 적지형의 위압에 질려서 지레 기권하고 말았다.
내 상대도 지극히 평범했다. 차라리 오시오가 더 강했을 정도.
결국 나와 적지형은 결승에서 붙게 되었다.
“하하하! 넌 뒤졌어!”
적지형은 김호랑과 준결승 상대에게 못 푼 분노를 나에게 향했다.
나도 그냥 기권할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심판이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기권은 좀 자제해 주십시오.”
이런 젠장? 나보고 적지형한테 당하라고?
“제가 왜요? 다른 사람들은 다 기권해도 됐는데, 저한테만 그러시는 건 좀 불합리한데요?”
경기가 시작하기도 전에 기권해 버릴까 보다. 내 비협조적인 대답에 심판은 쩔쩔맸다.
“부탁드립니다. 지금 TV로 생중계 중인데, 이렇게 계속 기권이 나오면 모양새가 좀…….”
협회의 모양새를 위해 날 제물로 비치시겠단 뜻? 이 사람들 양심이 내 통장 잔고 수준이네?
“맨입으로요?”
제가 이래 봬도 헌터 랭킹 100위거든요?
“어떤 걸 원하시는지……?”
“어떤 걸 제시하시는지……?”
‘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어요?’와 ‘얼마까지 깎아 주실 수 있으세요?’의 싸움. 이제 저쪽에서 ‘손님, 맞을래요?’가 나올 차례다.
심판은 굳은 얼굴로 5초간 고민에 빠졌다. 굳이 H력을 흡수하지 않아도 저 얼굴 속 고뇌가 한눈에 보였다.
“좋습니다. 그럼 돈을 드리죠.”
“돈이요?”
생각지도 못한 제안. 설마 돈을 준다고 할 줄이야!
“얼마요?”
액수, 액수를 보자!
“파이트머니 개념으로 특별히 백만 원 드리죠.”
아주 날로 먹으려고 하네? 심판에게 보란 듯이 한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것은 아주 명백한 ‘기권’ 의사였다.
“저…… 김상팔은…… 이번…… 시합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