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105화
“상팔 씨도 랭킹 헌터신가요?”
처음 보는 헌터한테 대뜸 ‘랭킹 헌터’란 말을 꺼냈단 점은 자신이 랭킹 헌터란 뜻. 심지어 디마는 은연중에 상팔 씨‘는’이 아니라 상팔 씨‘도’라고 했다.
“디마 씨는 몇 위신데요?”
내 질문에 디마는 여유로운 웃음을 내비쳤다.
“상팔 씨보다야 높죠.”
뜨끔!
이 사람, 내 랭킹을 알고 있어? 갑자기 디마란 사람이 다르게 보인다. 스파이? 간첩? 첩자? 밀정?
아! 다 같은 말이구나.
디마는 벽에 기대서 느긋하게 TV 화면을 바라봤다. 우리의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TV 화면. 트랙에 그어진 선 10개를 따라 10명의 선수가 서 있다.
장마리의 번호는 2번. 제자리 뛰기로 몸을 풀고 있다.
“응?”
4번. 특이한 차림이 인상적이다,
파란색 쫄쫄이에 양쪽 구레나룻만 눈처럼 새하얗다. 게다가 가슴엔 떡하니 ‘4’라고 적혀 있다.
“불길하네. 4가 들어가면 망하는데…….”
“제자리에 준비.”
심판의 구호에 선수들은 제자리에 쭈그려 앉아 뒷다리를 편 채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심판은 신호총을 위로 향한 후 방아쇠를 당겼다.
흰 연기와 함께 약간의 폭음이 들렸다. 그리고 그것으로 10명의 선수가 각기 다른 능력을 발현했다.
다들 저마다의 고유한 능력으로 최선을 다해 달렸다. 불려 9초도 안 되는 시간 동안 100m를 질주하는 그들의 모습은 말이나 치타의 그것과는 또 다른 역동이었다.
“달려라! 1번 말, 달려!”
“2번 말, 지면 안 돼!”
객석에 두 사내는 어제 투기장에서 본 것과 똑같은 풍경이 연출되었다.
“이젠 우리가 괴물 신세네.”
평범한 사람들 입장에선 H력 보유자나 괴물이나 똑같이 기괴할 것이다.
머리에 불이 붙은 장마리는 정말 쏜살같이 결승선을 통과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결과는 2등이었다.
1등은 바로 문제의 4번. 다리가 고무줄처럼 쭉쭉 늘어나 단 두 걸음에 결승선을 넘어갔다.
“아깝다!”
속도는 분명 장마리가 1등이었는데……. 단거리가 끝나고 그다음 장거리. 장마리는 연달아 출전했다.
이번엔 아저씨도 트랙 위에 섰다.
“끌끌끌! 여보들, 이것 보시게. 나 TV 나왔어!”
한돈 아저씨는 자신을 찍고 있는 카메라를 향해 손가락으로 브이 자를 만들어 뻗었다.
아저씨가 말한 여보들이 여보‘들’인지, 아니면 3인칭인지는 좀 더 두고 보자.
아저씨와 장마리를 포함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장거리 달리기에 출전했다. 다만, 아까 1등 한 4번 남자는 나오지 않았다.
이번엔 30여명의 사람들이 그냥 마구잡이로 쭉 섰다. 이번에도 심판이 신호총을 쏘고, 목표인 트랙 10바퀴를 향해 모두의 다리가 움직였다.
필드 규모가 규모여서 아마 보통 사람은 한 바퀴 도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선두는 예상대로 장마리. 아저씨는 20등 정도에서 느긋하게 뛰고 있다.
처음 한 바퀴를 도는 동안 특별한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
“후후후.”
갑자기 디마가 기분 나쁘게 웃기 시작했다. 작은 소리였지만, 내 귀에 그 소리가 유독 잘 들렸다.
“재미있겠는데?”
“뭐가요?”
재빨리 그 말을 집어서 디마에게 물었다. 내 질문에 디마는 어깨를 으쓱이며 유쾌하게 답했다.
“그야 달리기 시합이죠. 아까 단거리 보셨어요? 환상적이었어요!”
이 사람, 정말 러시아인일까? 두 바퀴째. 선두와 후미가 확실하게 갈렸다. 두 집단으로 나뉜 선수들의 얼굴에서도 확연히 그 차이가 드러나고 있었다.
이 흐름은 한동안 쭉 이어졌다.
7바퀴째. 포기에 가까운 꼴찌 집단이 생겨났다. 무슨 가볍게 산보하듯이 걷는 선수들은 이미 선두 집단에 의해 한두 바퀴 정도 추월당한 상태였다.
다행히 아저씨는 꼴찌 집단에서 벗어나 중간 집단에 속해 있었다. 처음에 1등이던 장마리는 페이스 조절을 위해 3등으로 달리고 있었다.
현재 1등은 헌터 랭킹 76위인 왕오릉. 2등은 나비상. 왕오릉은 미끄러지듯 달리고 있었다. 마치 스케이트를 타는 쇼트트랙 선수 같았다.
나비상의 경우는 더 괴상하다. 나비상은 통통 튀면서 고무공에 가까운 주행을 보여 주고 있었다.
“마리 씨!”
아저씨는 모르겠고, 장마리가 우승했으면 좋겠다. 검은 과부들과 함께 사냥하면서 장마리의 속도에 도움을 정말 많이 받았다.
이변은 9바퀴에서 벌어졌다.
“끌끌끌!”
아저씨.
많고 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 한돈 아저씨가 변수인 걸까. 중간에 있던 아저씨가 조금씩 앞으로 치고 나왔다.
아저씨에게 추월당한 사람은 아저씨의 괴상한 웃음소리와 외모에 전의를 상실하고, 달리는 것을 포기했다.
“응?”
작은 화면에 얼굴을 붙이고는 자세히 아저씨의 행색을 살폈다.
뒤쳐진 선수들의 얼굴. 뭔가 이상하다. 그들은 하나같이 코를 붙잡으며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방귀 뀌셨구나!”
아저씨의 숨은 필살기. 아저씨 몸에서 나오는 냄새엔 묘한 힘이 있다.
뒤쳐진 선수들에게 애도를 표한다. 아저씨는 땀 한 방울도 흘리지 않으며 유유히 5위까지 나아갔다.
“이, 이러다간 마리씨가?”
마지막 바퀴.
아저씨는 무려 4위까지 따라붙었다. 좀 넘어지시면 안 되나? 아니, 몸매는 난쟁이 똥자루인데 왜 저렇게 잘 뛰는 거야? 아저씨의 뱃살은 오늘따라 출렁거리지도 않았다.
장마리와 아저씨는 2위인 나비상을 향해 나아갔다.
오래달리기의 핵심은 조절 능력. 무조건 빠르다고 이기는 것이 아니다.
장마리는 머리에서 불을 힘껏 뿜어내며 빠르게 나비상을 추월했다.
아저씨는 나비상 바로 뒤에 붙는 것이 한계.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1등인 왕오릉은 자신의 뒤에 붙은 장마리를 떨쳐 내려고 무리하게 속도를 올렸다.
지금까지 규칙적으로 움직이던 왕오릉의 다리가 불규칙적으로 움직였다.
“앗!”
왕오릉은 결국 자기 다리끼리 꼬여서 트랙 위에 넘어졌다. 이제 1등은 장마리. 나비상과 한돈 아저씨는 나란히 2등이다.
아저씨는 평지에선 잘도 뛰시는구나. 산길에선 저질 체력이시면서……. 역시 몸매 때문이겠지?
10바퀴. 등수에 이변은 없었다.
장마리는 랭킹 헌터도 아님에도 당당히 1등으로 골인. 아저씨는 살짝 뒤쳐져서 나비상 다음인 3등을 하셨다.
아저씨 몸으로 3등을 한 것 자체가 인간 승리다.
“시상식은 씨름 경기가 다 끝나고 한꺼번에 하겠습니다. 육상 경기에서 3등 이내 든 수상자분들께선 대기실로 가 주십시오.”
이제 우리와 바꾸는 건가. 화면에서 말이 나온 직후 직원이 대기실로 와서 우리를 인솔했다.
우리는 직원을 따라 다시 필드로 향했다.
“상팔 씨.”
디마가 말을 걸어왔다.
순수하게 환히 웃는 모시가 심히 마음을 어지럽힌다.
“왜요?”
“혹시 저랑 붙게 되면 져 주지 않을래요?”
이 사람 보소?
“그건 안 되겠는데요. 페어플레이 정신을 지키셔야죠.”
내가 뾰로통하게 나오자, 디마는 내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돈 드릴게요. 어때요?”
돈? 돈이란 말에 살짝 고민이 되긴 했다.
“적당한 가격이라면……?”
“천만 원. 어떠세요?”
미치셨어요? 내가 아무리 도박으로 사냥 자금을 땄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합법의 영역. 허나 승부 조작은 이야기가 다르다.
이 자식, 날 완전 물로 보고 있잖아?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다. 겨우 천만 원으로 양심을 팔라고? 나, 이래 봬도 2억 있는 남자야!
“사양할게요.”
엄숙, 근엄, 진지. 요즘은 이래야 사람들이 진심이라고 믿는다.
디마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흠, 싫다면 하는 수 없죠. 후후후.”
필드에 도착하고 나서 우리는 모래가 가득 찬 씨름판 옆에 정렬했다.
육상 경기가 막 끝난 탓인지 관중도 그렇고, 필드 자체의 온도도 그렇고, 아까완 다르다.
예선 때는 그냥 얼렁뚱땅 미적지근했다면, 지금은 후끈후끈했다. 특히, 우리를 찍는 방송 촬영용 카메라를 보고 나서야 실감이 났다.
“이걸 옷 위에 입으십시오. 탈의 하실 분들은 상의까지만 허용합니다.”
직원이 우리에게 샅바용 허리띠를 나눠 주었다. 허리띠에는 청홍의 구분 대신 숫자가 찍혀 있었다.
허리띠를 매고, 토너먼트는 곧장 시작되었다.
첫 번째 시합은 비쩍 마른 김호랑!
나보다 능력 수치가 높은 사람은 무조건 경계해야 한다.
김호랑의 상대는 최강민. 거대한 근육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왜 보디빌딩이나 역도에 안 나간 거야?’란 말을 절로 나오게 하는 체형이다.
“하하하! 상대가 이렇게 비실비실해서야 시합할 맛이 안 나는데?”
전면 이두근, 전면 광배근, 측면 가슴, 후면 이두근, 후면 광배근, 측면 삼두근, 그리고 복직근.
최강민은 몸을 비틀듯 자세를 취하며 자신의 근육을 뽐냈다. 힘줄이 솟아난 근육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부풀었다.
마치 근육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 것 같다. 선수 둘과 심판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은 씨름판 주위로 물러났다.
“준비!”
김호랑과 최강민은 허리를 앞으로 살짝 기울이며 서로의 샅바를 움켜잡았다.
“난 지지 않는다!”
최강민의 능력 수치는 300. 두 사람 사이에는 100이란 이름의 벽이 있다.
“시작!”
시작과 동시에 둘 다 능력발동!
최강민은 재빨리 오른쪽 다리를 내밀어 김호랑의 왼쪽 다리에 걸었다. 그리고 단숨에 몸을 돌려 승부를 결착 지으려 했다.
“아이고!”
김호랑은 속수무책으로 균형을 잃었다. 능력 수치상으로는 분명 김호랑이 위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함정이 있다.
바로 각 항목별 수치. 즉, 총합은 높을지 몰라도 한두 항목에선 낮을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 경기를 하고 있는 두 사람을 비교할 때 ‘속도’ 면에서는 확실히 최강민 쪽이 위라고 할 수 있다.
“아이고!”
그냥 넘어갈 것 같았던 김호랑은 엉덩이를 뒤로 쭉 빼면서 균형을 되찾았다. 그리고 두 다리에 힘을 꽉 주면서 꿋꿋이 버텼다.
“이, 이럴 수가!”
빠르게 승부를 끝내려던 최강민의 전략은 보기 좋게 깨졌다.
“남자는 힘!”
김호랑은 최강민을 아령처럼 다루며 아예 씨름판 바깥으로 휙 집어 던졌다. 날아가지 않으며 버티던 최강민은 무력하게 내동덩이 쳐져 굴렀다.
최강민의 손에는 끝까지 놓지 않은 김호랑의 샅바 조각이 있었다. 샅바가 찍어질 정도로 두 사람의 힘은 강력했던 것이다.
“승자, 김호랑!”
김호랑.
힘에서만큼은 최고다. 비실비실한 겉모습은 속임수. 어쩌면 적지형보다 더 셀지도? 의외의 다크호스다.
김호랑은 흐뭇한 얼굴로 씨름판에서 나왔다. 최강민은 자신이 약골처럼 생긴 김호랑에게 졌단 사실에 충격을 받았는지 한동안 일어서지 못했다.
다음은 적지형의 시합.
경기는 심판의 “시작!” 구호와 함께 끝났다. 적지형이 슬쩍 상대를 밀자, 상대는 뒤로 벌러덩 쓰러졌다.
“모래를 움직인 건가?”
랭킹 모임 때 경험을 토대로 추측해 보면 적지형의 능력은 간단명료하다.
모래와 흙을 조종하는 것. 지금 시합에서도 모래를 조종해 상대방을 쓰러뜨린 걸까?
그럼 규칙 위반이잖아?
“심판!”
큰소리로 심판을 불러 내 생각을 이야기했다.
“영상 판독을 해 보죠.”
심판은 시합 영상을 시청했다. 그것은 비디오처럼 보이는 ‘판독기’로 찍은 것이었다.
판독기는 무려 H력을 감지할 수 있는 기계. 그래서 적지형의 경기 중 녀석의 몸에서 나온 H력이 씨름판 모래를 어떻게 조종하고 있는지 뚜렷하게 볼 수 있었다.
“확인 결과, 문제는 없습니다.”
뭐라고? 문제가 없어? 젠장, 실격패로 몰아가려고 했는데…….
가장 중요한 내 차례는 맨 마지막. 그전에 한 경기가 또 독특했다.
바로 디마의 시합.
상대는 신장 180cm의 건장한 신체를 가진 헌터였다. 그러나 디마는 그 남자보다 머리 하나 차이로 더 컸다.
“준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