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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드헌터 김상팔-103화 (103/250)

103화

103화

피로 범벅이 된 드래건의 비늘은 서로 엉겨 붙여 돌아가지 않았고, 반면에 드릴소의 뿔은 피로 물들여 붉게 번쩍였다.

“상팔 씨? 망한 것 같은데요?”

김대팔이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하하, 이 요망한 공룡 대가리가 지금 시비 거나?

“아직 안 끝났어요.”

다소 딱딱한 어조로 받아쳤다. 그래, 아직 끝나지 않았어.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야. 주먹을 꽉 쥐며 긴장과 절망을 억눌렀다.

드래건은 피를 흘리면서도 드릴소와 싸우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대신 처음보다 훨씬 둔해진 몸부림으로 드릴소를 몰아붙였다.

육체와 육체가 부딪치며 대기를 흔들고, 그 진동이 유리 막까지 흔들었다.

두 종의 괴물은 본래의 기계적 움직임이 아닌 짐승에 가까운 움직임을 보였다.

무기란 개념이 없던 시절의 사람도 저렇게 싸웠을까?

드래건은 꼬리를 이용해 드릴소 한 마리를 감아 들었다. 그리고 붙잡은 드릴소를 무게추 삼아 꼬리를 둔기처럼 휘둘러 나머지 한 마리를 때렸다.

“바로 그거야!”

객석의 함성과 동시에 내 입에서도 감탄이 터졌다.

오늘의 마지막 시합, 최고의 배팅이 걸린 승부에서만큼은 절대 질 수 없다!

휴대전화를 꺼내 현재 시각을 확인했다.

현재 시각 오후 4시 50분.

앞의 시합들이 30분 이내에 끝난 것을 감안하면 슬슬 끝날 때가 됐다.

드래건의 비늘이 망가진 만큼 드릴소의 뿔 역시 부서졌다. 두 마리의 뿔은 끝이 부러지고, 금이 간 채 뭉개져 찌그러졌다.

드릴소는 서로 간의 충돌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특히 붙잡힌 녀석은 완전히 기절해서 축 늘어진 상태였다.

드래건은 기절한 드릴소를 필드 위에 내려놓은 후 다른 녀석에게 꼬리를 내밀었다. 드릴소는 꼬리를 피해 필드 반대편으로 뛰어갔다.

그때 또 한 번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다. 뿔이 뭉개진 처참한 몰골로 기절했던 드릴소가 어느 순간 벌떡 일어서 있었다.

녀석은 드래건이 다른 녀석에게 한눈을 판 사이, 회전하지 않는 뿔을 앞세워 냅다 드래건의 복부를 찔렀다.

이번엔 다른 때와 달리 드래건의 복부에서 다량의 피와 함께 내장의 일부로 보이는 건더기가 흘러나왔다.

드래건은 몸부림치지 않고 재빨리 자신을 찌른 드릴소를 떼어 내려고 했다. 그러나 하나가 달라붙자마자 나머지 녀석이 드래건의 꼬리를 찔러서 힘껏 눌렀다.

거대한 두 개의 핀셋, 그리고 거기에 찍힌 표본. 그것이 지금의 드래건과 드릴소의 관계였다.

드래건의 꿈틀거림은 점점 힘이 빠져 왔다. 6급의 괴수에게 최후가 다가오고 있었다.

“팀장님…….”

호규가 유리벽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김대팔은 그런 호규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위로했다.

“포기하면 편합니다.”

지금 그걸 위로라고 하냐? 티라노사우루스 인형 옷을 입었다고, 지능도 파충류 수준이 된 거냐?

“일어나요!”

억지로 호규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호규의 등을 두드리며 외쳤다.

“저길 봐요!”

다른 곳을 보거나, 잡담을 나누던 사람들이 내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물론 그중엔 김대팔도 있었다.

“아니?”

이번엔 나존귀가 무릎을 꿇었다. 정부가 드래건에 관해 사냥 의뢰를 하는 이유, 그리고 성체와 유체 간 결정적 차이.

드래건은 긴장을 푼 채 갈기를 늘어뜨렸다. 그러자 갈기 사이사이에서 뭔가 보라색 기체가 뿜어져 나왔다.

“우리가 잡은 녀석은 성체가 아니라서 저런 게 없었지만, 대신 정보 수집은 확실하게 했었죠.”

“호오.”

김익조가 절도 있는 손동작으로 박수를 쳤다.

드래건의 유독가스는 폐쇄된 필드를 순식간에 채웠고, 육체적 방어 외의 다른 부분엔 취약한 드릴소들은 순식간에 중독되어 쓰러졌다.

[드래건 승.]

“으아아아!”

다리에 힘이 풀려 뒤로 풀썩 쓰러졌다. 그 와중에 팔다리엔 힘이 넘쳐서 위로 허우적거렸다.

“와! 땄다! 해냈다! 2억이다! 승리했다고! 2억을 벌었어! 완벽히 부활했어! 님도 보고, 뽕도 따고! 빚은 더 이상 질색이야! 으아아아아, 아아아아아!”

너무 혈압이 높은 탓인지 갑자기 눈앞이 흐려졌다. 그리고 그런 시야로 보인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악귀의 형상으로 일그러졌다. 김익조, 나존귀, 김대팔, 호규, 그리고…….

하얀 원피스를 입은 소녀와 양복 차림 남자? 미스터 버드의 기억에서 본 사람들이다.

“뭐지?”

서둘러 눈을 비비며 시야를 회복했다. 그러나 맑게 보인 방 안에선 두 사람의 모습 따윈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내가 잘못 본 건가?”

다음 날. 우리는 최고급 호텔에서 눈을 떴다.

김익조는 약속대로 20억의 10%인 2억을 내게 주었고, 덕분에 우리는 좋은 숙소에서 묶을 수 있게 되었다.

“끌끌끌!”

방귀 소리와 함께 내 옆의 아저씨가 일어났다.

무려 2인 1실. 하지만 유정은 사정이 있어서 혼자 1인실로 배정되었다.

“유정이는 좋겠다. 나도 1인실 쓰고 싶은데…….”

아저씨가 발가락으로 코를 후비며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어떻게 저런 비대한 신체로 저런 동작이 가능한 거야?

“끌끌끌! 비싼 곳에 왔으니, 뽕을 뽑아야겠지?”

아저씨는 객실에 비치된 전화기를 들고는 공짜로 제공되는 아침 식사 서비스에 어마어마한 양을 주문했다.

“좋은 곳에 오셨으니, 좀 교양 있게 행동하시죠?”

뿡. 내 말에 아저씨는 방귀로 답했다.

“도대체 어젯밤에 뭘 드신 거예요?”

“중동 요리 풀코스.”

“중동 요리 풀코스요?”

어젯밤 2억을 딴 기념으로 다 같이 먹고 마셨다. 그런 와중에 혼자 풀코스를 시켜서 드셨단 말이지……?

“왜? 네가 쏜다고 했잖아? 설마, 남자가 한 입으로 두말하진 않겠지?”

하고 싶다. 상대가 아저씨라면 너무나 하고 싶다.

“쳇!”

혀를 차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예상보다 일찍 올라온 종업원의 눈치를 보며 아침 식사에 정신을 집중하기로 했다.

오늘도 어제만큼이나 긴 하루가 될 것이었다. 아침 식사는 간단하게 식빵과 달걀, 그리고 소시지였다.

내가 각각 하나씩 먹는 동안 아저씨는 무려 10개씩 먹어 치웠다.

“먹어야 남는다! 먹어야 남는다! 먹어야 남는다!”

무슨 주문을 외우듯 아저씨의 양손은 쉴 새 없이 음식을 쑤셔 넣었다.

“잘도 드시네요.”

아저씨 먹는 걸 보니까 식욕이 싹 사라진다.

“당연하지. 먹어야 남으니까!”

무슨 전투 식사 하세요? 아저씨는 기어코 주문한 음식을 다 먹어 치우고는 동산처럼 부푼 배를 움켜쥔 채 방바닥에 드러누웠다.

“오늘 일정이 어떻게 됐지? 오늘도 배팅이냐?”

어제 김익조에게서 스페셜 매치 배팅 자격은 얻었지만, 오늘은 다른 행사에 참여할 예정이었다.

“오늘은 투기장이 아니라 경기장에 갈 거예요.”

이곳 헌팅페스티발 축제장에는 여러 대형 건축물이 있다.

그중 어제 우리가 시간을 보낸 투기장은 오직 ‘괴물’끼리의 싸움을 보기 위한 곳.

반면에 경기장은 바로 우리 ‘헌터’들이 활약하는 장소다. 여기서 성과를 내면 적지 않은 랭킹 점수를 얻을 수 있고, 단번에 랭킹 상승! 고속 출세의 기회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1층 로비에서 집합. 곧장 경기장으로 향했다.

오늘은 어제보다 더 사람이 많아 보인다. ‘바글바글, 북적북적’의 수준을 넘어서 인파가 움직이는 모습이 말 그대로 바닷물 같다.

“상팔아.”

아저씨가 갑자기 가슴을 부여잡고 미간을 찌푸렸다.

“왜요?”

“나, 사람들을 보니까 갑자기 속이 메슥거려.”

밥을 10인분이나 드시니까 그렇죠.

“시야를 넓게 보지 마세요. 멀미 나셔서 그런 거예요.”

아저씨는 내 조언에 따라 얼굴을 루호의 등에 묻었다. 혹여나 아저씨가 루호 등에 토할까봐 염려스러웠지만 당사자는 루호는 담담했다.

“괜찮습니다, 한돈 아저씨도 사람인데요. 비록 보는 각도에 따라서 바퀴벌레 같기도 하고, 또 어떨 땐 호모사피엔스가 아니신 것 같지만…… 그래도 엄연히 우리와 같은 유기체신 걸요.”

그냥 싫다고 해. 웃는 얼굴로 침 뱉지 말고…….

경기 참가는 온라인이나 전화로는 신청이 불가능하고, 오직 당일 건물에 직접 방문해야만 할 수 있다. 그만큼 경쟁이 치열하고, 참가자가 많다.

“헌터 자격시험 볼 때 생각나네.”

그때도 참 사람 많았다가 바로바로 줄어들었지.

“어서 오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경기장 1층 사무실. 협회 직원이 반쯤 잠긴 눈으로 물었다.

“경기에 참가하고 싶어서 왔는데요?”

내 대답에 직원은 크게 하품을 했다.

“오늘 열리는 경기요? 어느 걸 말씀하시는 거죠?”

직원은 사무실 벽에 붙은 일정표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오늘부터 폐회식까지 펼쳐지는 모든 경기에 대한 일정과 정보가 적혀 있었다.

일단 오늘부터 6일째까지 열리는 개인 대회 종목은 다음과 같다.

검술, 양궁, 사격, 권투, 보디빌딩, 수영, 씨름, 격파, 역도, 육상.

총 10가지에서 각 종목별로 또 세부 종목이 있다.

예를 들어 육상은 단거리와 장거리로 세부 종목이 나뉜다. 육상이란 큰 틀 안에서 이 2가지를 다 할 수도 있고, 하나만 고를 수도 있다.

일명 전국 헌터 체전. 당연 H력을 사용해도 된다.

“흠, 다들 정하셨어요?”

“꼭 해야 하나요?”

공미가 손을 들며 질문을 했다.

앗, 공미가 있었구나. 미처 생각 못한 부분이다. H력이 없는 공미에겐 출전은 무리일 것이다.

“아니요. 강제성은 없어요. 하하하.”

“그럼 전 응원할게요.”

공미를 빼고 나머지 8명은 각자 참가할 종목을 골랐다.

한돈 아저씨는 놀랍게도 육상!

하긴, 아저씨가 날 단련시켜 주셨을 때를 생각해 보면…… 의외로 잘 하실지 모른다.

루호는 검술.

루호라면 뭘 하든 우승을 기대해 볼 만하다. 믿고 보는 루호!

호규는 수영.

가장 의외다. 저번에 요리도 그렇고, 말수가 적고 내성적인 것치곤 의외로 능수능란하다.

유정은 양궁.

사격을 고를 줄 알았는데, 일부러 변해라를 피해 양궁을 고른 걸까? 참고로 양궁의 경우 정밀성, 사격의 경우 속사에 중점을 둔다.

주아란은 격파.

아란의 발차기…… 위력은 맞아 본 내가 보장한다.

주아라는 권투.

쌍도끼 휘두르던 팔 힘으로 펀치? 상대가 불쌍하다.

마지막 변해라는 사격.

세바스찬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다행이다. 그나저나 데려간 불칸은 언제 쓸 거니?

“흠, 시합 시간은 다들 똑같네?”

그럼 구경할 수가 없잖아? 그냥 최단으로 탈락하고 다른 사람 경기 볼까? 접수를 마치고, 우리는 남는 시간 동안 축제를 즐기기로 했다.

“형하고 호규 씨는 어제 제대로 못 다니셨죠? 오늘은 오전만이라도 재미있게 노세요.”

루호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오늘 경기는 씨름과 육상. 즉, 나와 한돈 아저씨의 경기뿐이다.

주아라 자매, 변해라, 유정, 그리고 공미는 응원 아닌 응원만 남긴 채 사라졌다.

“젠장, 이렇게 된 이상 우리도 남자들끼리 재미있게…….”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저씨가 입을 열었다.

“내가 말이야. 어제 아주 기가 막힌 집을 찾았거든? 거기 가자. 거기가 분위기도 좋고, 음식도 좋아. 게다가 볼거리도 있지.”

“정말요?”

아저씨가 호언장담하시니까 정말 심히 걱정되는데……. 근데 딱히 갈 데가 있는 것도 아니니 한 번 믿어볼까?

“좋아요. 대신, 이번에는 더치페이예요. 알았죠?”

“오냐. 끌끌끌!”

우리는 아저씨의 안내를 따라 작은 영화관을 찾았다. 외간을 보자마자 아저씨가 이곳을 왜 마음에 들어 했는지 단번에 깨달았다.

벽돌, 그것도 꽤 오래된 벽돌들이 쌓여 있다. 포스터는 B급 분위기를 간직한 옛날 정취의 것, 거기에 매표소가 매점 옆이 아닌 정문 앞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다.

심지어 상영 중인 영화는 제목은 어디서 많이 들어 봤지만, 결코 본 적은 없는 ‘서양의 무법자’다. 아저씨를 믿은 내가 잘못이지…….

“이거 요번에 HD 화질로 수정한 버전이야. 어서 들어가서 보자고!”

아저씨는 무려 자기 돈으로 우리 표를 모두 계산하신 뒤 혼자 쪼르르 영화관으로 들어갔다.

“세상에……! 아저씨가 돈을 쓰셨어?”

“별일이네요.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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