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94화
“근데 얜 덩치가 꽤 큰데, 어떻게 제압하죠?”
드릴소에게는 특별한 약점이 없다. 머리에 달린 드릴의 강도는 특수합금 수준이고, 몸통의 피부도 강철에 필적한다.
다들 뾰족한 수가 없는지 입을 열지 않았다.
힘으로 잡아? 손평화가 있으니까, 가능할 것도 같은데…….
“일단 고전적인 방법을 쓰죠.”
김대팔이 거대한 배낭을 멘 김미수를 가리켰다. 그러자 김미수는 자신의 배낭을 내려놓은 후 그 속에서 그물을 꺼냈다.
“덫을 놓자는 건가요?”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그런데 그물이 드릴소의 무게를 충분히 버틸까?
“아주 질긴 그물입니다. 군대에서 공중으로 물자를 운송할 때 쓰기도 하죠.”
좋아. 그렇단 말이지?
“어?”
김미수가 꺼낸 그물이 사라졌다? 그물을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리자, 드릴소가 있는 늪 바닥 옆에서 오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잡았어요. 제가 잡았다고요!”
그사이를 못 참고 혼자서 한 거야? 이놈의 오박을 그냥……! 일단 황급히 늪 바닥으로 달려갔다.
“하하하! 제가 해냈어요!”
가만히 서 있는 드릴소, 그 위에 펼쳐진 그물. 그리고 대머리 오박.
드릴소는 그물에 덮인 채 그냥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었다.
자기가 잡힌 건 알고 있는 건가?
“어서 끌고 가요.”
오박이 자신만만하게 그물을 당겼다. 그러자 그물 속에 있는 드릴소가 고개를 위로 치켜들고 울음소리를 냈다.
“포위!”
다들 늪째로 드릴소를 둘러쌌다. 그러나 우리는 아주 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
드릴소는 머리의 드릴을 회전시켜 간단히 그물을 찢어 버렸다. 그리고 그대로 머리를 땅바닥에 박아서 땅속으로 쏙 파고들어 갔다.
“무슨 두더지냐?”
어이가 없네.
성격이 순해서 다행이지, 다른 괴물처럼 난폭했으면 기습 공격당하기 딱 좋은 상황이다.
녀석이 판 굴속에 최루탄이라도 하나 까서 집어넣을까 싶었지만, 지반 자체가 물렁거리는 곳이라 굴이 금방 메워졌다.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그때 손평화의 로봇이 번쩍 손을 들었다.
“좋은 생각이 있어요!”
“뭐죠?”
손평화는 덜컹거리며 늪 바닥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오박에게 뒤로 물어서란 손짓을 했다.
“땅이 축축하니까, 땅속까지 전기가 잘 통할 거예요.”
손평화의 로봇은 몸통을 숙여 땅바닥에 양손을 댔다.
“하압!”
기합과 함께 로봇에게서 눈부신 전격이 쏟아졌다. 저 로봇, 동력원이 전기였어?
오박과 함께 우리는 허겁지겁 거리를 벌렸고, 전기는 그 주변을 까맣게 태우며 사방으로 퍼져 갔다.
“오오?”
전기가 확실히 지하까지 퍼졌나 보다.
손평화가 전기를 뿜어낸 지 불과 1분도 안 되어 땅속에서 드릴소가 튀어나왔다.
그것도 1마리가 아니라 3마리.
“3마리나 있었어?”
드릴소들은 고개를 미친 듯이 흔들면서 땅바닥에 축 늘어졌다.
손평화는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는 우리를 향해 로봇 손가락으로 브이 자를 만들었다.
“어때요, 잘했죠?”
참 잘했어요.
오늘은 느낌이 좋다.
이런 식이라면 마지막 목표물인 카멜레더도 금방 해결할 것 같다.
방금 전 전기 충격으로 손평화와 로봇은 더 이상 싸울 수 없었다. 그래서 불타는 고구마 중 오박, 김미수와 함께 기절한 드릴소를 들고 정문 앞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잘 감시하고 있어. 놓치기라도 하면 다시 와야 하거든.”
오박을 보면서 세 사람에게 신신당부했다.
“걱정 마세요, 오빠. 제가 잘 감시할게요.”
김미수가 세끼손가락을 펴며 내게 내밀었다. 난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김미수에게 대답했다.
“그래. 잘 부탁해.”
손평화가 있으니까, 괜찮겠지?
세 사람이 떠나고, 남은 사람들은 늪지대 구석에 있는 카멜레더의 서식지로 향했다.
단 한 마리만 잡으면 되는 괴물, 카멜레더. 녀석은 불칸처럼 위험한 무기도 없고, 드릴소처럼 튼튼한 외피도 없다.
한국어로 된 자료 영상이 없어서 영어로 대충 검색했지만, 내가 본 영상에선 이미 잡은 후의 모습이었다.
1.5m 정도의 거대 카멜레온, 그것이 카멜레더다.
카멜레더는 카멜레온과 레더의 합성어로 레더는 가죽이란 뜻.
여러 색과 녹색의 줄무늬가 있는 카멜레더의 가죽은 가격이 꽤 비싸다. 단순 소재로서의 가치를 제외하더라도 줄무늬의 변칙적인 패턴과 색 배열에 예술적 가치를 부여하는 패션디자이너도 많은 편이다.
카멜레더의 전법은 몸을 투명하게 만든 뒤 긴 혀로 기습하는 것. 이렇게만 말하면 그냥 덩치만 큰 카멜레온이랑 뭐가 다르냐고 할 테지만…….
“으악!”
녀석의 서식지에 발을 들어선 뒤, 우리는 모두 쓰러졌다.
8명이 한 대씩 8초, 생각보다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철퇴의 공격. 카멜레더의 혓바닥은 그냥 살덩어리가 아니었다.
머리를 노리는 정확함은 물론이고, 두개골에 가해지는 충격은 욕이 절로 나오게 만든다.
그냥 맞는 순간 ‘아, 끝났다.’란 생각과 함께 쓰러지는 것이다.
다들 정신을 잃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함부로 일어서지도 않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가 누워 있는 동안은 공격이 날아오지 않았다.
“어디 있는 거야?”
살짝 고개를 드는 순간, 공격이 날아와 뒤통수를 때렸다.
“아오!”
바로 엎드렸다. 예전에 헌터 자격 시험 때 만났던 안구가 생각나네.
H력으로 머리를 집중 강화했음에도 얻어맞은 뒤통수엔 불룩하게 혹이 솟았다.
평범한 사람이면 일격에 머리가 터져서 죽었을 위력이다. 이건 사기잖아?
“제가 해 보겠습니다.”
루호는 맨몸으로 일어서서 유성추를 휘둘렀다.
특수 소재의 실 끝에 달린 유성추는 궤적을 그리며 허공을 자유로이 날았다.
루호는 딱히 카멜레더의 혀를 확인하고 유성추를 돌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방어. 정확한 손놀림으로 유성추의 궤도가 자신의 몸을 빈틈없이 돌도록 하고 있었다.
보기엔 쉬워 보여도 자신의 몸에 금속구가 닿을락, 말락 하는 거리를 유지하며 고속 회전시키는 작업이다.
어지간한 감각이 아니고선 할 수 없다.
“앗!”
갑자기 잘 돌던 유성추가 튕겨 나가듯 방향을 바꿨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 카멜레더의 혀와 충돌한 것이다.
“이제 시작이야!”
루호는 혼잣말처럼 카멜레더에게 선언하며 더 힘차게 유성추를 돌렸다.
“흰 사슴, 화이팅!”
“오빠 힘내세요!”
“이기면 메롱바!”
루호를 응원하는 여자들의 목소리. 그중에 스파이가 있다.
유성추의 움직임이 점점 불규칙적으로 변하면서 루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계속해서 유성추가 카멜레더에 의해 튕겨 나갔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허공을 가르는 뭔가가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저게……?”
카멜레더의 혀. 허공이 뭉개지는 기묘한 현상, 마치 아지랑이처럼 굴곡 같은 것이 보였다.
수풀과 나뭇가지, 그리고 넝쿨의 너저분함에 가려진 녀석의 긴 혀가 점점 뚜렷해졌다.
“루호야! 조금만 더 버텨라!”
이거 대박인데?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카멜레더의 혀가 보이기 시작했는지 우리는 한 방향으로 기어갔다.
우리가 있던 쪽을 향해 길게 뻗어 있는 나뭇가지. 굵기는 대략 사람 허리통만 하다. 흐릿한 뭔가가 거기에 달라붙어 있었다.
“일격에 끝냅시다!”
나와 김대팔은 양손에 광탄, 호규는 능력발현을 준비했다.
“죽이면 안 돼요.”
“그럴 일은 절대 없습니다.”
김대팔은 내 염려에 콧방귀를 뀌었다.
“그럼 전 하지 말까요?”
숨을 들이키던 호규가 급하게 물었다.
“호규 씨 공격은 범위가 넓으니까, 혹시 돌발 상황이 생기면 발사해 주세요. 일단은 준비하시고요.”
호규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인 후 입을 오므렸다.
“준비하시고…….”
네 개의 광탄이 한 곳을 노린다.
“쏘세요!”
우리는 동시에 광탄을 쐈다.
당연히 김대팔이 쏜 두 개가 내 것을 제치고 앞서서 날아갔다.
내가 쏜 광탄과의 거리는 점점 벌어지고, 내 것이 아직 중간 정도 왔을 때 김대팔의 것은 목표에 명중.
작은 폭발과 함께 카멜레더가 모습을 드러냈다.
녀석의 녹색 몸체가 모습을 보인 직후, 내가 쏜 광탄이 폭발. 뿌연 연기에 카멜레더가 가려졌다.
“상팔 씨, 힘을 잘 조절하셨어야죠?”
크윽, 김대팔에게 한소리 듣다니…….
굴욕이다.
“호규 씨! 쏘세요!”
바로 호규에게 지시를 내렸다.
혹시라도 잠깐 동안 시야가 차단된 틈에 카멜레더가 모습을 감추면 안 되기 때문이다.
호규의 우렁찬 고함이 물리적인 힘으로 변해 카멜레더가 달린 나뭇가지를 통째로 눌렀다. 그러자 그 굵은 나뭇가지가 ‘우지끈’ 부러지며 땅으로 떨어졌다.
녀석의 무기는 혓바닥뿐, 그것만 빼면 그냥 덩치 큰 도마뱀이다.
“덮쳐!”
이게 5급인지, 2급인지. 다들 우르르 달려들어 카멜레더를 끌어안았다.
모습을 드러낸 녀석은 우리의 찐한 포옹에 저항하며 몸을 꼼지락거렸다. 그러나 투명한 몸이 드러난 이상, 녀석은 조금도 위협거리가 안 됐다.
“혀만 조심하세요!”
녀석이 최후의 수단으로 혀를 날름거렸다. 그러나 이미 녀석에게 찰싹 달라붙은 우리에게 녀석의 혀는 닿지 않았다.
확실히 우리가 세지긴 세졌구나.
카멜레더의 허리를 움켜진 내 손이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하게 느껴졌다.
더 강해지고 싶다. 지금이라면 혼자서 3급 괴물을 상대할 수 있을까?
“꺅!”
카멜레더의 목을 끌어안은 아란의 몸이 옆으로 휙 날아갔다. 그리고 아란을 시작으로 아미니, 아미리, 주아라가 날아갔다.
“팀장님, 저기 좀 보세요!”
녀석의 다리를 붙잡은 호규가 다른 나무의 줄기 위를 가리켰다.
“어?”
거기에는 카멜레더가 붙어 있었다.
“다른 개체?”
엥? 우리가 나무 녀석을 발견하자마자, 우리가 끌어안고 있던 카멜레더가 흐물흐물해졌다.
무슨 풍선에 바람이 빠지는 것처럼 형체가 뭉개지며 완전히 쪼그라들었다.
“설마……?”
어쩐지 너무 쉽더라. 우리가 끌어안았던 것은 카멜레더가 아니라 녀석의 혀였다!
놀랍게도 녀석은 혀를 부풀려서 자신처럼 만든 뒤, 혀끝을 투명하게 만들어 우리를 공격한 것이다.
“역시 아까 호구 씨 공격으로 빈틈이 생겼을 때 내뺀 거였군요.”
김대팔이 양손에 광탄을 모아 나무 위를 겨눴다. 그러나 발사 직전, 녀석은 재빨리 몸을 투명하게 만들고는 우리 시야에서 사라졌다.
“호구 씨 한 번 더 가능하세요?”
“네. 괜찮아요.”
H력을 눈과 귀에 집중, 카멜레더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온 신경을 동원했다.
“보고 있어요?”
김대팔도 잠시 광탄 발사를 대기.
“네, 찾았어요.”
몸을 투명하게 만들 수 있어도, 존재감까지 지울 수는 없다. 왜곡된 광경, 흐릿한 윤곽. 나무에서 뛰어내린 녀석이 머리를 우리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오른손에 소량의 H력을 보내 응축시켰다.
“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쏘세요.”
김대팔과 호규는 발사 준비를 마치고 내 지시를 기다렸다.
카멜레더도 우리처럼 긴장하긴 마찬가지. 이건 순발력 싸움이다. 마음속으로 셋을 세자.
하나.
둘.
“둘!”
셋은 오지 않는다. 내 손에 조용히 모은 ‘무광탄’을 두 사람보다 먼저 카멜레더에게 쐈다.
녀석은 우리를 주시하느라 무방비, 내 무광탄을 그냥 맞았다.
“지금이에요!”
가죽이 좀 훼손되더라도 일단 잡고 보자.
김대팔과 호규는 동시에 광탄과 목소리를 날렸다. 그리고 두 사람의 공격에 적중당한 카멜레더는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너 죽었어!”
쌍둥이인 아미니, 아미리가 동시에 외쳤다. 그리고 카멜레더에게 당한 여자들이 우르르 몰려와 충격 때문에 정신이 나간 카멜레더를 구타했다.
“앗! 카멜레더가?”
김대팔이 내 팔을 잡으며 외쳤다.
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