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93화
“제가 공미 씨한테 맞출게요.”
손평화는 걸음을 늦추며 양팔을 벌려 공미를 보호했다.
탄환에 맞을 때마다 움찔거리는 공미와 달리 손평화의 로봇은 조금도 꿈쩍이지 않았다.
나와 김대팔은 몸을 최대한 움츠려 두 사람 뒤에 붙어서 걸었다.
“오!”
불칸에게 가까이 다가가서야 탄환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었다.
탄환의 정체는 바로 ‘거품’이었다.
“게거품이 이렇게 무서울 줄이야.”
거품이라면 녀석의 체내에서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다. 그야말로 무궁무진한 탄환이다.
어떻게 거품이 탄환으로서 이 정도의 강도를 가지게 된 걸까? 역시 괴물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시급하다.
녀석과의 거리 불과 3m. 바로 코앞까지 왔다.
“제 광탄으로 녀석의 시야를 차단하겠습니다. 그사이 여러분은 녀석에게 접근해서 뒤집으세요.”
김대팔이 입을 열었다.
“광탄이요?”
그래, 어디 한번 그 잘난 광탄 실력 좀 보자.
“실수하시면 안 돼요.”
“염려 마세요.”
김대팔은 별다른 준비 동작 없이 대뜸 불칸을 향해 양손을 뻗었다. 그러자 두 개의 공룡 손에서 형성된 빛의 원형이 불칸을 향해 직선으로 날아가 폭발했다.
인형 탈 손에서 광탄이 형성돼 불칸에게 날아가 폭발하기까지 약 2초. 무슨 구식 기관총을 보는 기분이다.
“역시 대단하구나.”
살짝 질투가 나서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저 정도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
“지금입니다!”
광탄의 폭발로 인해 연기가 생기자 우리는 동시에 불칸에게로 달렸다.
가장 먼저 도착한 사람은 가장 무거운 무장을 두른 손평화. 로봇이 좋긴 좋다.
“로보트 펀치!”
육중한 몸통이 오른쪽으로 회전하며 왼팔을 질렀다.
강철로 된 주먹이 불칸의 집게를 강타, 바위 틈새에서 튕겨 내듯 뽑아내 불칸의 몸을 위로 뜨게 만들었다.
“좋았어!”
다음으로 도착한 사람이 나. 김대팔만큼은 아니더라도 최대한 빠르게 양손에 H력을 모아 불칸 밑 땅바닥을 향해 광탄을 쐈다.
내가 쏜 광탄의 폭발로 불칸의 몸통이 90도 각도로 돌아가 공중에서 수직으로 섰다.
마무리는 공미.
“합!”
공미는 반쯤 뒤집힌 불칸을 밀어서 완전히 뒤집었다.
“해냈다!”
완전히 뒤집힌 불칸은 대롱을 쏙 집어넣은 채 다리를 버둥거렸다.
뒤집힌 다음에도 대롱으로 거품을 쏠까 봐 걱정했는데, 의외로 간단히 풀려서 허탈했다.
아무래도 뒤집히면 완전하게 무력화되는 모양이다.
“덕분에 일손 덜었네.”
4급이란 이름값에 비하면 좀 허탈하지만, 내가 정말로 놀란 것은 이런 공격을 맞고도 멀쩡한 손평화의 로봇 갑옷의 방어력이다.
공미의 갑옷과 방패가 거의 폐급이 되어 버린 것과 반대로 손평화의 로봇은 흠집 하나 없었다.
확실히 랭킹 헌터는 차원이 다르다. 우리 팀에서 저 정도의 방어력을 가진 사람은 아마 변신한 루호 정도일 것이다.
“괜찮아요?”
공미는 체력도 완전 방전. 결국 손평화 혼자 방어를 담당했다.
같은 방법으로 주변에 있던 불칸 3마리를 추가로 잡았다.
뒤집힌 녀석들은 밧줄로 다리와 집게, 그리고 몸통을 꽁꽁 묶어서 ‘포장’했다.
운반은 불타는 고구마 4명. 다행히 머릿수와 딱 일치했다.
2마리는 랭킹 의뢰로 넘기고, 1마리는 부산물 체취, 나머지 1마리는 변해라에게 주기로 했다.
“팔아서 나온 돈으로 수고비 더 얹어 줄게.”
불타는 고구마는 환호.
아란, 주아라, 공미는 수고비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어두운 얼굴들이지만, 그나마 공미의 표정이 한결 밝아진 것이 다행이었다.
역시 몸을 좀 움직인 게 좋은 방향으로 작용한 것 같다.
현재 시각 낮 정오.
예상보다 빠른 진행. 느낌이 좋다.
가지고 나온 불칸 4마리를 트럭짐칸에 실었다. 그리고 다음 목적지인 5급 사냥 구역을 향해 차를 몰았다.
트럭은 놀랍게도 김대팔이 운전, 손평화는 로봇 갑옷에 탄 채 트럭 짐칸에 탔다.
참고로 밴 운전은 나!
아침부터 과격하게 몸을 움직였더니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5급 사냥 구역에 도착하면 일단 점심부터 먹어야겠다.
다음 목표물은 드릴소와 카멜레더.
두 종은 불칸보단 안심하면서 사냥할 수 있다.
드릴소는 이름처럼 머리가 드릴로 되어 있는 괴물이다. 쉽게 말하자면, 드릴로 된 코뿔소.
온순한 성격 덕에 유니콘처럼 목장에서 사육되는 괴물이다. 랭킹 의뢰서에서 ‘야생’이라 강조된 것도 사육된 드릴소가 너무 순하기 때문이다.
5급 사냥 구역 주차장으로 들어서고, 밴과 트럭이 나란히 주차됐다.
다들 밴에서 내린 다음, 트렁크에서 점심거리를 꺼내 주차장 한쪽에 자리를 폈다.
“근데 여기서 취사해도 돼요?”
어느 정도 생기를 찾은 공미의 질문. 오전 일로 인해 배가 무척 고픈 표정이다.
“다 방법이 있죠.”
일반적으로는 불법이다. 그러나 주차장 옆 정문의 관리기에 입력을 하면 합법이 된다.
요지는 바로 [취사비]를 내는 것이다.
사냥 구역은 주차장을 포함해 전 구역 24시간 감시 체제다. 만약 얌체족처럼 몰래 취사를 하려고 하다간 10분도 안 돼서 순찰대가 출동, 무지막지한 벌금 폭탄을 맞게 된다.
“이제 됐어요.”
하나부터 열까지, 돈이면 다 된다.
어떤 의미론 정말 혁신적이다.
돗자리 여러 개를 깔아서 만든 자리에 버너와 그릇을 놓았다. 그리고 모두 그 주변을 빙 둘러앉아 침을 질질 흘렸다.
오늘의 요리사는 호규!
나이트윙 사냥 때부터 호규의 요리 실력이 물올랐다. 빠르게 칼로 재료를 손질하고, 불 조절과 밑간까지. 요리 경진 대회에 나가도 손색없는 실력이다.
“완성!”
호규가 자신만만하게 냄비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그 안에서 김이 자욱하게 펴지며 황금빛 카레가 자태를 나타냈다.
“아저씨가 계셨다면 좋아하셨을 텐데…….”
곁에 있으면 암 걸리고, 옆에 없으면 허전하다.
카레는 맛있었다. 다들 연신 ‘맛있다.’를 외치며 맛있게 먹었다. 특히 공미는 혼자 카레를 3그릇이나 먹으며 부활을 알렸다.
“한 그릇 더!”
정정한다, 4그릇이다. 이제 주아라만 정신을 차려 주면 좋을 텐데……. 그녀는 아직도 멍한 얼굴이다.
아란이 억지로 떠밀어서 몇 숟가락 먹었지만, 여전히 주아라의 그릇에는 카레가 한가득이었다.
“언니 더 먹어.”
“응.”
주아라는 대답만 하고 더 이상 먹지 않았다.
“저질 재료로 만든 것치곤 나쁘지 않군요.”
저 망할 티라노!
김대팔은 카레를 무려 인형 탈 쓴 채로 먹고 있었다. 팔 부분만 인형 옷에서 빼낸 다음 숟가락으로 카레를 퍼서 공룡 주둥이에 집어넣는 방법이었다.
대단하다, 저렇게까지 처먹어?
“맛있어요, 상팔 씨!”
손평화의 감탄. 왜 나한테 맛있다고 하는 거야? 로봇에 탄 채로 카레를 먹는 손평화도 참 가관이다.
두꺼운 상체가 앞뒤로 쪼개지면서 오픈, 그 안에 탑승한 손평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로봇 안은 좁은 좌석과 함께 여러 가지 장치가 있는 형태, 무슨 만화나 영화에 나오는 광경이다.
“이거 얼마짜리예요?”
오박이 손평화에게 물었다. 역시, 숫자에 대한 의문만 세계 최고인 민족! 그것이 바로 자랑스러운 세계 속의 한국이다.
“돈 주고 산 거 아니에요.”
손평화는 카레를 조종석에 흘리지 않으려 조신하게 떠먹었다.
“그럼요?”
이번엔 호규가 손평화에게 물었다.
“선물 받은 거예요.”
선물? 정말로 이 세상 어딘가에 로봇 군단을 만드는 미치광이 과학자라도 있나?
“아, 그러고 보니까 랭킹 헌터 중에 특이한 장비를 직접 제작하는 분이 계시다고 들었던 것 같네요.”
불쑥 김대팔이 말을 뱉었다. 랭킹 헌터 중에 사냥용 로봇을 직접 제작할 능력이 되는 사람이라면…….
분명 10위권 안에 든 헌터일 것이다.
“상팔 씨 능력은 뭔가요?”
김대팔의 티라노 대가리가 날 향했다. 순간 흠칫 놀라며 숟가락을 떨어뜨렸다.
“제, 제 능력이요?”
“네. 꼭 알고 싶습니다.”
티라노 입속의 눈동자가 반짝인다. 참으로 부담스러운 시선이다.
하하하, 이놈 봐라?
요즘은 그래도 주기적으로 아저씨와 루호를 만나 H력을 충전하고 있고, 능력발동도 잘 조절하게 돼서 H력 보존에 많이 신경 쓰고 있다.
“제 능력은…….”
이럴 땐 실눈을 뜨면서 고개를 45도 각도로 기울이며 검지를 흔들면 된다.
“비, 밀?”
김대팔은 가만히 날 바라만 봤다. 내가 너무 오버했나? 김대팔의 침묵이 계속된다.
“대팔 씨?”
김대팔은 깊은 한숨을 쉬다가 대답했다.
“안 어울립니다. 닭살 돋았습니다.”
“죄송해요.”
한번 해 보고 싶었어요. 김대팔은 내 사과를 받은 후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점심 식사가 끝나고 5급 사냥 구역으로 들어갔다. 오전의 싸움으로 피로가 누적된 공미는 밴에 남아 쉬기로 하고, 남은 11명이서 드릴소의 서식지를 향해 나아갔다.
나무가 우거진 숲, 줄기와 넝쿨이 사방에 널려 있다. 바닥은 축축하고 곳곳에 작은 연못 크기의 늪이 즐비하다.
보통 늪 하면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물의 비율이 높고, 다른 하나는 점토의 비율이 높다.
흔히 위험하다고 하는 늪은 바로 후자인 점토층이 있는 부류다.
끝을 알 수 없는 진흙의 함정. 그런 늪이 사방에 있다.
발이 푹푹 빠지고, 사냥 구역 내부의 기온은 후덥지근하다.
5급 사냥 구역인 ‘늪지대’를 오가려면 체력이 필수! 공미를 놔두고 오길 참 잘했다.
불타는 고구마의 표정이 썩 좋지 않다.
“죽을 것 같아요.”
오박이 울상을 지으며 칭얼댔다.
얼굴은 ‘천하장사 만만세!’ 할 것 같은 놈이 엄살이 심하다.
“좀 참아. 그게 너희가 할 일이잖아?”
내가 너희 한두 푼 주냐? 아니면 돈을 떼먹었냐? 조금 감정을 실어 오박을 나무랐다.
“제가 저희들 중에 가장 능력발동에 서툴단 말이에요!”
아오, 자랑이다!
“오박 씨.”
루호가 나 대신 오박을 상대했다.
“오박 씨가 힘드신 건 이해하지만, 이젠 조용히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여긴 정말 위험하거든요.”
루호는 검지로 ‘쉿’ 자세를 취했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여자들이 환호를 쳤다.
“오빠, 너무 잘생겼어요!”
“사생팬 하고 싶어요!”
“쓰리사이즈 알려 주세요!”
얘, 얘네들 보소? 여자들의 아우성에 오박은 입을 꾹 다물었다.
가만 보면 불타는 고구마의 구멍은 바로 오박, 저 녀석이다.
최대한 늪지대를 피해 숲 깊숙이 들어갔다.
드릴소의 덩치가 웬만한 코뿔소랑 맞먹는다고 하는데, 이런 곳에서 어떻게 그 큰 녀석이 살지?
신발에 묻은 진흙을 보니 궁금증이 샘솟는다.
“어?”
드릴소의 서식지 근처. 앞에 있는 늪지대가 바닥까지 파헤쳐져 있다.
늪이란 게 원래 한번 빠지면 자력 탈출은 거의 불가능, 반드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왜 이 모양이지? 진흙에 찍힌 발자국이 보였다.
원형 발바닥. 그리고 발굽이 앞에 3개, 뒤에 1개. 분명 사전에 조사한 드릴소의 것이다.
“어어?”
갑자기 땅이 덜덜덜 떨렸다. 그리고 빈 늪 밑바닥에서 뭔가가 솟아올랐다.
“드릴소다!”
오박이 비명을 지르며 나무 뒤에 숨었다. 그러자 오박을 따라 나머지 불타는 고구마 3명도 나무에 몸을 가렸다.
땅속에서 튀어나온 드릴소는 몸을 털면서 진흙을 털어냈다. 드릴소란 이름처럼 머리 전체가 드릴처럼 생긴 뿔에 휘감겨 있었다.
“저게 5급?”
바로 위인 6급 괴물들과 바로 아래인 불칸과 비교해 우리 앞에 나타난 드릴소는 온순하기 그지없다.
막 땅속에서 나온 녀석은 김이 나는 숨을 뿜어내며 가만히 우릴 쳐다봤다.
야생이 이 정도면 길들인 개체는 도대체 얼마나 순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