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92화
“그, 그래도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에요.”
“알았어요.”
응? 대답의 상태가……?
대화가 뚝뚝 끊긴다. 더 이상 말을 잇는 것은 힘들어 보였다. 마지막으로 아란에게 속삭였다.
“두 사람 상태는 어떤 거야?”
내가 볼 땐 도무지 함께 사냥을 할 상태가 아닌데?
아란은 나처럼 똑같이 속삭임으로 답했다.
“아라 언니는 다움 오빠가 죽은 것 때문에 아직도 악몽을 꾸고, 공미 언니는 장달에게 받은 상처가 정말 큰가 봐요.”
어느 쪽도 희망적이진 않구나.
“넌 어때?”
아란은 내 귀에다 대고 바람처럼 속삭였다.
“좋아요.”
그 말을 하고 나선 잽싸게 고개를 돌린다. 그래도 얜 상태가 좋아서 다행이다.
울퉁불퉁한 바닥 때문에 걷기가 쉽지 않았다. 특히 대부분의 짐을 짊어진 불타는 고구마 4명의 불평은 대단했다.
“너무해요! 우린 아직 미성년이라고요.”
가장 먼저 오박이 푸념을 늘어놓았다. 너 미성년 아니잖아. 이게 어디서 형들한테 약을 팔아?
“조용히 걸어. 오빠.”
김미수가 오박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불타는 고구마에서 가장 덩치가 좋은 오박과 달리 나머지 세 사람은 또래의 평범한 여자애들. 솔직히 H력만 없었다면 짐꾼으로조차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노란 머리 아미리와 보라 머리 아미니는 군말 없이 일행의 중간에서 걷고 있었다. 두 사람은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노골적으로 윙크를 날렸다.
와, 쟤네는 진짜 부담스럽네.
여러모로 일행에 속한 여성들의 수준이 내가 감당할 정도를 넘어섰다. 그렇다고 해서 남성들의 상태가 양호하냐고 하면…….
“오늘은 카레를 만들어 드릴게요!”
호규가 배낭을 가리키며 흥분했다.
음침함을 벗어나 요리에 취미를 둔 것은 다행이지만 지금은 전투가 더 중요하다.
“기대해 보죠. 근데 제 입에 맞을지 모르겠군요. 이런 곳에서 먹는 음식은 대부분 저급하던데요?”
김대팔이 호규의 말에 대꾸했다.
이런 곳까지 공룡 탈을 입고 오는 징글징글한 놈!
“식사는 일이 끝나고 느긋하게 먹어도 늦지 않아요.”
루호가 두 사람을 향해 상냥하게 말했다. 역시 믿을 사람은 루호뿐이다.
한돈 아저씨가 안 오신 것은 불안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제대로 된 보수가 걸리지 않은 일에 나서는 성격이 아니니까…….
당사자 네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는 소소한 수준의 수고비를 주기로 약속했다.
“상팔 씨!”
뜨끔. 별안간 잘 걷고 있다가 손평화가 말을 걸어왔다.
“예?”
깜짝 놀라 손평화를 바라봤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무장, 그 수준이 공미보다 더 대단하다.
공미의 무장이 단순 중세 기사의 그것이라면, 손평화는 거의 로봇 수준이다.
거꾸로 된 오각형 상체는 머리와 일체형. 상부에 눈구멍이 뚫려 있다.
양쪽 어깨에는 따로 장갑이 덮여 있고, 팔은 길게 늘어져 무릎 밑으로 손이 내려왔다.
하체는 상체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가늘었다. 마치 젓가락 위에 만두를 꽂은 같은 형상이다.
키는 약 2m 정도. 랭킹 모임 때 만난 손평화는 나보다 키가 작았다.
“무슨 일이세요?”
“그게…….”
손평화는 로봇 팔을 올려 손가락으로 얼굴이 있는 곳으로 추정되는 부분을 긁적였다.
“의뢰 끝나면 사인 좀 해 주실래요?”
엥?
“사인이요?”
“네. 꼭 받고 싶어요.”
아니, 내 랭킹이 그쪽 랭킹보다 훨씬 낮은데요?
“하하하…….”
기뻐해야 하는 건가. 그나저나 손평화의 로봇 갑옷은 어떻게 움직이는 걸까?
분명 움직일 때마다 엔진음 같은 게 들리는데……. 그런 것치곤 에너지, 즉 배터리나 가스통 같은 것이 전혀 없다.
엄청 든든하긴 하네. 하긴, 이 정도니까 60위인 거겠지. 도대체 적지형 그놈은 얼마나 대단하기에 랭킹이 40위나 되는 거야?
랭킹 모임 때의 경험으로 추측해 보면 모래와 관련된 능력인 것 같다.
어차피 20위 아래는 개판이다. 어쩌면 김대팔이나 손평화가 실질적으로는 적지형보다 더 강할지 모른다.
족히 몇 미터는 될 거대한 바위가 눈앞에 널려 있다.
저 바위들 아래 오늘 첫 번째 목표인 ‘불칸’이 있을 것이다.
불칸.
4급 괴물로 거대한 게의 형상을 하고 있다. 크기는 송아지 정도지만, 절대 만만한 녀석이 아니다.
트튜리팟에서 본 영상에서 녀석은 자신을 둘러싼 헌터들을 단숨에 전멸시켰다.
물론 영상에 나온 헌터들이 방심한 탓이 크지만, 일격에 10여 명을 쓰러뜨린 것은 대단한 전투력이다. 여차하면 우리도 한 방에 전멸할 수 있다.
“아저씨가 계셨다면 경고해 주실 텐데…….”
참 계륵 같으신 분이다.
“저기 봐요!”
루호의 외침. 모두가 바위 뒤로 몸을 붙였다.
불그스름한 배, 새하얀 등껍질. 작은 집게와 거대한 다리. 그리고 배 밑에 붙은 두 개의 눈.
꼭 평범한 꽃게를 거대화시킨 뒤 뒤집은 모양이다.
“와!”
지금, 두 마리의 불칸이 서로를 마주 보고 있다. 아무래도 한판 붙으려는 것 같다.
사냥업계에 뛰어든 이래, 처음 보는 광경이다.
“무슨 푸켓몬 같네요.”
아란이 고개를 빼꼼 내밀며 말했다. 그러자 다들 배낭을 내려놓은 채 바위에 찰싹 달라붙어 불칸의 싸움을 구경했다.
불칸 둘은 서로를 마주 보다가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졌을 때 양쪽의 집게로 바위를 꽉 잡은 후 남은 8개의 다리를 자갈 속에 파묻었다.
“서, 설마?”
난 녀석들의 싸움 방식을 미리 조사해서 알고 있다. 그리고 내가 아는 바에 따르면…….
불칸의 등껍질이 갈라지며 그 안에 숨어 있는 입이 드러났다.
평범한 게의 그것처럼 입은 참 흉측하고 복잡하다. 그러나 정말 무서운 것은 입이 벌려진 직후 입 밖으로 쭉 뻗어 나온 대롱이다.
“저게 뭐죠?”
루호가 내게 물었다.
난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모두가 들으란 의미에서 크게 소리쳤다.
“기관총이야!”
그렇다.
두 불칸은 몸통을 고정시킨 채 움직이지 않는 서로를 향해 사격을 개시했다.
대롱처럼 보이는 부분이 기관총의 총열처럼 회전하며 무지개빛 탄환을 쏟아냈다.
사실상 ‘너 죽고, 나 죽자!’ 공격. 저기에 생존 본능 따윈 없다. 그저 상대를 죽이려는 살육 본능만 있을 뿐이다.
기관총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다들 고개를 피해 바위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불과 1초도 안 돼서 기관총 사격에 의한 충격과 진동이 우리가 있는 바위에까지 전해졌다.
굵고 짧은 굉음. 소리가 멈추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벌써 끝난 건가요?”
호규가 덜덜 떨면서 물었다.
난 모두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손짓한 후 조심스레 고개를 내밀었다.
“하하…… 하…….”
어이가 없네.
불칸 두 마리는 서로를 향해 난사를 한 후 장렬하게 죽어 있었다.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눈 어리석은 자의 말로. 의사 없이 힘으로만 해결하려 하는 괴물의 도달점이다.
누군가는 이런 것을 보며 ‘캬, 사이다!’라고 소리치며 좋아하겠지.
결론은 너도 한 방, 나도 한 방!
“아깝다. 살아만 있었으면 클리어인데…….”
다들 바위에서 나와 죽은 불칸의 시체를 뒤졌다.
시체가 곤죽이 돼서 헤집긴 좋은데 온전한 부산물이 없어서 건질 게 하나도 없다.
“그래도 어떤 점을 조심해야 하는지 알게 된 것 같아요.”
루호가 반으로 갈라진 대롱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대롱에서 과연 어떤 총알이 나왔을까?
“응?”
주변 바위에 난 총알 자국을 조사해도 박힌 총알은 하나도 없었다.
바위와 자갈이 부서질 정도로 많은 수의 총알이 날아다닌 것은 분명하다.
총알의 흔적은 산재한데, 정작 총알이 안 보인다? 이상한 일이다.
“총알 비슷한 거라도 보신 분?”
내 말에 다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총은 있는데, 총알은 없다. 가능한 일인가?
“저기에 또 한 마리가 나타났어요!”
바위 위에 올라간 김미수가 저쪽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좋았어. 다들 준비합시다요!”
김미수가 가리킨 방향을 경계하며 다들 손에 무기를 들었다.
철갑을 몸에 두른 공미와 손평화가 맨 앞. 오늘은 두 사람만이 방어를 담당한다.
두 사람의 임무는 단순 방어가 아닌 공격의 보조. 오늘은 모두가 공격 담당이자, 정찰 담당이다.
불타는 고구마는 짐꾼이라 뒤로 대피, 나와 함께 상황을 주시하기로 했다.
나머지는 전부 공격!
“오늘은 절대 무리하지 마세요.”
우리를 위한 것도 아니고, 협회 좋으라고 하는 사냥에 목숨을 걸 필요는 없다.
바위 몇 개를 돌아서 접근하자, 아까 본 두 마리보다 더 큰 불칸이 모습을 드러냈다.
“앗?”
불칸은 우리를 발견했는지, 다리를 고정시키고 있었다.
대롱만 꺼내만 사격 준비 완료. 우리는 서둘러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정확히 1분 뒤.
“어어어어?”
우리가 숨은 바위를 향해 집중사격이 시작됐다. 바위가 떨리며 머리 위로 자갈과 부스러기가 쏟아졌다.
뿌옇게 일은 먼지가 눈앞을 가리고, 돌들이 부서지는 소리에 귀가 아프다.
내가 지금 사냥 구역에 불칸 잡으러 온 건지, 아니면 참호 속에서 고생하는 세계 1차 대전 참전용사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정공법으로 할까요?”
손평화가 몸통에서 증기를 뿜으며 물었다.
정공법.
흔히 말하는 방어, 공격, 지원의 삼박자다. 이 방법을 유용하게 쓴 팀이 바로 ‘세손가락’이다.
“아니요. 오늘은 정공법 말고 다른 걸로 할 거예요.”
불칸의 약점은 간단하다.
겉보기와 달리 일반 게와 흡사한 몸 구조를 가진 탓에 거북이처럼 뒤집어 버리면 끝. 문제는 저 기관총과 생포 방법이다.
방어 인원을 방어벽으로 세우든지, 아니면 양동작전을 쓴다든지 하면 뒤집는 것은 간단하다. 그러나 녀석을 무력화시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협회에서 원하는 ‘생포’는 말 그대로 괴물의 몸에 티끌 하나 문제가 없는 포획이다.
쉽게 말하면 진짜 ‘푸켓몬스터’를 하면 되는 것이다. 젠장, 어디서 푸켓볼 안 파나? 대출 내서라도 사고 싶다.
일단 뒤집고 생각하자!
“평화 씨, 공미 양. 부탁드릴게요.”
두 사람은 군말 안 하고 나란히 섰다. 루호랑 호규는 능력 특성상 좀 아끼고, 남은 사람 중에…….
“아란 양. 같이 갈래요?”
제발?
“언니는…….”
아란이 주아라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주아라는 자기가 먼저 고개를 숙이며 거부했다.
“난 아직…….”
“언니…….”
자매가 쌍으로 우울하다. 이러면 나 혼자 해야 하나?
“제가 가죠!”
김대팔이 공룡 팔을 번쩍 들었다. 인형 옷 팔에 달린 짧은 손가락이 촐싹거리는 게 참 요망스럽다. 애들이 좋아서 환장할 것 같은 움직임이다.
“죽이면 안 돼요, 알죠?”
근데 광탄 쏘는 게 주특기인 녀석을 믿어도 될까?
“걱정 마세요.”
공룡 인형 탈 입은 놈은 단번에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함께 공미와 손평화 뒤에 섰다. 그리고 바위 뒤에서 나가기 전에 마지막 점검 겸 공미에게 물었다.
“공미 양. 잘 부탁드려요.”
“네.”
단답형, 이 정도면 합격이다.
“갑시다!”
4인 1조의 생포 작전. 우리는 벅찬 가슴으로 바위에서 나왔다.
적의 참호를 향해 돌격하는 보병보다 우리 사정이 좋은 점 하나는 앞에 든든한 방패 벽이 있단 것이다.
전신 갑옷 차림의 공미는 양팔에 낀 소형 방패를 움직여 탄환이 날아오는 괘도에 댔다.
일단 방패로 탄환을 튕겨 내는 것은 성공. 걱정한 것보다 탄환의 위력이 강력하진 않은 모양이다. 그러나 공미의 육체는 평범한 사람이다.
바위도 깎는 불칸의 탄환에 공미의 발걸음은 점점 느려져 갔다.
아무리 갑옷과 방패로 방어를 해도 탄환에 실린 힘 자체는 육체로 고스란히 전달된다.
H력이 있다면 인체 내부도 강화되어 원활하게 버티지만, H력이 없다면 체력이 관건이다.
반면에 손평화는 로봇이라 그런지 쌩쌩하다. 도대체 저 안은 어떤 구조로 되어 있을까?
탑승형? 장착형? 아니면 사실 저 안에 사람은 없고, 무선조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