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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드헌터 김상팔-91화 (91/250)

91화

91화

“이 새끼가……!”

적지형이 주먹을 쥐자, 이번에는 양옆에서 루호와 호규가 달려들었다. 우리와 함께 있던 김대팔은 어딘가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적지형의 양손을 와락 움켜쥐고는 매섭게 노려봤다.

“어쭈? 이거 안 놔?”

“그쯤 해라.”

방금 전 ‘그만!’을 외친 목소리.

적지형 뒤에 거구의 남자가 서 있었다. 놀랍게도 적지형은 남자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루호와 호규를 뿌리치고는 뒤로 물러섰다.

“그렇게 거칠지도 않았어.”

적지형은 남자에게 한마디 던지며 구석에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남자는 적지형을 바라보다가 우리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해라.”

사과도 아니고, 달랑? 남자도 적지형을 따라 테이블로 가 버렸다.

“이, 이건?”

두 놈이 사라진 후 우리를 공격한 적지형의 능력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모래.

우리 테이블과 그 주위로 모래가 쌓여 있었다. 녀석은 모래를 이용해 우리를 제압한 뒤 느긋하게 갖고 논 것이었다.

“이것 참 다른 놈들도 참 너무하는군.”

아저씨의 말에 그제야 다른 사람들을 둘러봤다. 다른 테이블, 모두 우릴 보고 웃는 모습만 보였다.

유일하게 웃지 않는 것은 무뚝뚝한 최향자와 원래 표정이 적은 장마리뿐이었다.

“두 사람도 나서기 어려웠을 거예요.”

루호의 말을 들으며 분을 삭였다. 지금은 최향자와 장마리가 도와주지 않은 것보단 적지형에 대한 분노가 더 컸다.

“자리에 앉아 주십시오.”

박장은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우리에게 소리쳤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다들 제 잘난 놈들밖에 없다.

일단 테이블을 똑바로 돌리고 나서 자리에 앉았다. 아직도 귓가에 ‘피식’거리는 소리가 거슬린다.

“그럼 다시 진행하겠습니다.”

박장은 헛기침으로 관심을 모은 후 이야기를 이어 갔다.

“이제 곧 다가올 헌팅페스티발을 대비해 수많은 괴물이 필요합니다. 여기 계신 분들은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100인, 협회에 대한 충성심도 높으실 겁니다.”

박장이 손뼉 한 번을 치자, 직원들이 우르르 나타나 각자에게 의뢰서 한 장씩을 나눠 주었다.

“여러분의 랭킹과 능력을 고려해 목표물을 분배했습니다. 다가오는 헌팅페스티발 전까지 ‘무조건’ 완수하시기 바랍니다. 실패하시면…….”

박장이 평소와는 다르게 히쭉 웃었다.

“그에 상응하는 패널티가 부과됩니다.”

성공하면 랭킹 상승, 실패하면 불이익.

헌텅페스티발 자체가 랭킹 헌터에게 있어선 랭킹을 올릴 수 있는 기회. 다른 건 몰라도 반드시 적지형의 콧대를 꺾으리라 다짐했다.

그러기 위해선 랭킹 의뢰 완수가 필수! 어두운 와중에 H력으로 시력을 강화시켜 의뢰서에 적힌 목표물을 읽었다.

[불칸 2마리 생포.]

양아치네. 그냥 죽이는 것도 힘든데, 생포? 방 안의 불이 켜지고 옆에 앉은 루호의 얼굴을 바라봤다.

루호의 얼굴도 그다지 밝지 않다.

“넌 뭐 잡아오래?”

루호는 자신의 의뢰서를 보여 주었다.

[야생 드릴소 1마리 생포.]

와, 이거 설마……?

순간 번뜩이면서 뭔가가 떠올랐다. 협회가 괴물을 산 채로 잡아오라는 것은 분명 헌팅페스티발에서 ‘도박’을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국가에서 허락한 합법적 도박. 거기에는 매년 어마어마한 돈이 오간다.

괴물은 랭킹 헌터가 잡아오고, 돈은 협회가 버는 꼴이다. 우리를 아주 호구로 보는구나.

협회의 지원, 사회적 명예와 지위, 수수료 감면 등이 필요 없다면 굳이 랭킹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목돈을 계속 벌어 부자가 될 게 아니라면 굳이 높은 등급의 괴물들과 피터지게 싸우지 않아도 된다. 그냥 소소하게 조금씩 벌면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

뭐, 나야 랭킹 1위가 꿈이니까…….

“하아.”

지금이라도 꿈을 바꿀까? 고생길이 훤하다.

모임은 이것으로 종료. 박장은 방 안에 뷔페가 차려지는 동안 얌전히 있어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아무래도 우리와 적지형 사이에 있던 일 때문인 것 같다.

방 한쪽에 음식이 가득 있는 탁자가 옮겨지는 동안, 직원들이 다가와 우리 테이블 밑을 청소했다.

“저놈은 랭킹이 몇인지 알아?”

적지형 놈을 가리키며 루호에게 물었다. 그러나 루호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잘 모르겠어요. 랭킹 헌터들은 의외로 폐쇄적이라 소문이 잘 안 돌거든요. 협회에서도 신경 써서 관리하는 것 같고요.”

그건 그렇지. 랭킹 헌터란 곧 한국 지부의 간판, 헌터협회의 힘이다.

각 나라에 있는 지부마다 랭킹 헌터가 있으니, 전 세계적으로 족히 수천 명은 될 것이다.

“저기…….”

흠칫.

김대팔? 망할 티라노 대가리가 돌아왔다?

뻔뻔하게도 김대팔이 우리 테이블 옆에 서 있었다. 아까는 잘도 내빼셨어요?

“왜요?”

냉정하게, 모르는 척 물었다.

“같이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요. 함께 랭킹 의뢰를 해결하지 않으실래요?”

이건 또 무슨 조화지? 적지형과 부딪쳤을 때 혼자 사라진 것은 참 괘씸하다. 그러나 김대팔의 실력은 외면하기 힘들다.

녀석의 광탄은 쓸 만하다.

“앉으세요.”

언젠가 내가 네 인형 탈을 씹어 먹어 주마! 김대팔은 내 맞은편에 앉은 다음, 공룡 손가락으로 적지형을 가리켰다.

“적지형 씨의 랭킹은 40위입니다.”

너무 높은데? 갑자기 숙연해진다. 내가 아까 우리나라 40위랑 싸운 거야? 근데 그걸 싸움이라고 볼 수 있나?

음식이 다 차려지고, 점심 뷔페가 시작되었다. 일단 대화는 중단,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음식을 덜었다.

“끌끌끌! 오전에 모래를 많이 먹어서 그런지, 배가 고프네?”

오전에 모래를 많이 드셨으면 배가 덜 고프셔야죠? 아저씨는 오늘 가장 밝은 얼굴이다.

루호와 호규는 적지형을 살피며 경계, 김대팔은 배가 고프지 않단 이유로 그냥 자리에 앉아만 있었다.

적지형은 거구의 남자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음식 덜면서 또 싸울까 노심초사했는데, 불행 중 다행이다. 우리는 음식을 한가득 덜어와 자리로 돌아왔다.

“와, 대박!”

응? 여자 목소리가 뒤통수를 때린다.

“저것 좀 봐!”

아! 아저씨 때문이구나.

한돈 아저씨는 한 접시 위에 엄청난 양의 음식을 담았다. 내 음식을 담을 땐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거의 건설 수준의 음식 탑. 큰 접시 위로 높이는 대략 1m. 음식 가짓수는 다 셀 수가 없다.

“드실 만큼 담으신 거 맞습니까?”

보다 못한 루호가 한마디 내뱉었다.

“끌끌끌! 이건 준비 운동이야. 내가 오늘 블랙홀을 보여 주마!”

자랑이십니다요.

“저기요!”

또 여자 목소리. 아저씨가 어지간히 신기한가 보다. 입에 갈비를 집어넣은 채 고개를 돌렸다.

적당히 타일러서 돌려보내자.

“무슨 일이시죠?”

젊은 여성. 나이는 내 또래 정도로 보인다. 여성은 수줍은 얼굴로 손가락으로 콕, 나에게 삿대질을 했다.

“혹시 김상팔 씨 맞으신가요?”

“그런데요?”

내 대답에 여성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트튜리팟에 영상 올리신 분 맞으시죠?”

격양된 목소리.

“그런데요?”

여성은 내 손을 와락 붙잡았다.

“영상 잘 봤어요! 드래건, 쌍두하피, 나이트윙. 모두 하나같이 희귀한 영상이더라고요. 꼭 한번 직접 만나 보고 싶었어요.”

여성은 대뜸 내 옆자리로 의자를 갖고 와 한돈 아저씨를 밀어냈다.

“이건 또 뭐야?”

아저씨가 눈살을 찌푸린다. 아무래도 밥 먹는 데 방해가 되는 모양이다.

“호오.”

김대팔이 쓴 티라노의 주둥이가 조금 벌려지며 그 속에서 안광이 번뜩였다.

“손평화 씨가 여긴 어쩐 일이시죠?”

여성, 손평화는 나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한 가지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요.”

부탁? 아침에 만난 점쟁이도 그렇고, 오늘은 왜 이렇게 사람이 꼬이지?

“너 오늘 뭐 잘못했냐?”

심지어 아저씨도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저도 미스터리예요.”

어차피 김대팔 이야기도 들어야 하는데, 한 명 더 늘어나도 상관없겠지?

결국 우리 테이블에는 나, 루호, 아저씨, 호규, 김대팔, 그리고 손평화까지 모두 여섯 명이 앉게 되었다.

김대팔이 먼저 입을 열었다.

“랭킹 의뢰는 버거운 일입니다. 성공해도 따로 보수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잡은 괴물을 팔 수도 없죠.”

설마?

“연합하자는 건가요?”

어금니가 뭐가 아쉬워서? 김대팔은 공룡 손가락을 흔들었다.

“연합이 아닙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협동이죠.”

팀이 아닌 개인의 입장에서 힘을 합치자는 건가. 나쁘지 않은 제안이다.

“혹시 손평화 씨도?”

“네! 꼭 같이 일해 보고 싶어요.”

김대팔의 랭킹은 80위, 손평화의 랭킹은 60위다.

지금 다시 가서 적지형한테 싸우자고 할까? 근데 적지형은 혼자가 아닐뿐더러 제 랭킹이 우리보다 훨씬 높잖아. 안 될 거야, 아마.

이로써 랭킹 헌터 네 명이 뭉치게 되었다.

유정과 변해라, 그리고 주아란의 빈자리가 작지 않은 이상, 두 사람의 합류는 두 팔 벌려 환영할 일이다.

불칸, 4급 2마리.

드릴소, 5급 2마리.

카멜레더, 5급 1마리.

이게 전부 나, 루호, 김대팔, 손평화가 받은 랭킹 의뢰다.

다섯 마리 모두 생포해야 하기에 만만치 않은 일. 게다가 3종의 습성은 제각각이다.

일단 불칸 2마리를 잡기 위해 우리는 4급 사냥 구역에 와 있었다.

현재 시각 오전 9시.

4급 사냥 구역 주차장에 밴 1대와 5톤 화물트럭 1대가 주차되어 있다.

멤버는 나, 루호, 호규, 오박, 김미수, 아미니, 아미리, 김대팔, 손평화, 주아라, 주아란, 공미 이상 12명.

주아란의 귀환은 환영할 일이었지만, 언니 주아라와 공미의 참가는 의외였다.

얼굴빛이 어둡고 말수가 적은 것으로 볼 때 아직 두 사람은 ‘최상’의 상태가 아닌 듯했다.

“그래도 언니들이 얼른 기운을 차리려면 실전이 가장 좋을 것 같아요.”

아란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어차피 이번 일은 다른 때와 달리 목숨을 걸고 완수할 필요가 없다. 상황을 봐서 불리하면 언제든 빠질 생각이다.

4급이면 뿔개인 세바스찬과 동급. 나이트윙 사냥 땐 세바스찬의 덕을 톡톡히 봤다.

다만 끝에서…….

이번에 아예 변해라 몫까지 생포해 줄까? 어차피 괴물 하나 필요할 텐데…….

배낭을 메고, 어깨엔 지지대와 함께 휴대용 캠코더를 장착. 다들 자신의 장비를 챙겼다.

4급 사냥 구역은 일명 ‘돌판’이라 불리는 곳이다.

바닥에는 자갈이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깔려 있고, 사방에는 커다란 바위가 널려 있다.

걷는 것이 순탄치 않다는 점만 빼면 나쁘지 않은 환경. 자갈 아래 물이 있는 걸까? 코로 들이쉬는 숨에서 습기가 느껴진다. 꼭 물가에 온 것 같다.

가는 동안 주아라에게 말을 걸었다.

“괜찮아?”

“문일이가 팀을 나갔어.”

헉!

“어, 어?”

“‘세손가락’은 해체야.”

무,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딱 두 마디 했을 뿐인데, 벌써 말문이 막힌다.

내 기억 속의 주아라는 언제나 피 속을 누비는 ‘광년이’였다. 머리에 꽃을 꽂지 않아도, 소복만 입고 다니지 않아도 특유의 기질만으로 사람을 질리게 하기 충분했다.

그렇게 생기발랄하던 주아라가 이렇게 말이 짧아지다니…….

주아라에게서 고개를 돌려 그 옆에 있는 공미를 바라봤다. 공미는 전신 갑옷 차림, 얼굴은 투구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다.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어요?”

“아니요.”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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