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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드헌터 김상팔-90화 (90/250)

90화

90화

은색 몸체, 붉은 앰블럼, 넓적한 날개, 낮은 바닥과 두터운 타이어. 한눈에 봐도 ‘나 희귀하고, 비싼 차다!’란 느낌이 왔다.

“이봐, 당신!”

흠칫. 구경만 했을 뿐인데도 몸이 움츠러든다. 일단 뒤를 돌아봤다. 엥?

대략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까무잡잡한 얼굴. 말끔한 옷차림. 훤칠한 키. 좀 날카로운 인상의 미남이 서 있었다.

“무, 무슨 일이시죠?”

미남은 품속에 손을 넣어 카드 뭉치를 꺼냈다. 그리고 갑자기 카드를 섞어서 내게 내밀었다.

“뽑아 봐. 당신 운세를 점쳐 주지.”

뭐야?

도를 아십니까? 야매 점쟁이? 사기꾼? 아니면 그냥 돌아이? 일단 한 장을 뽑았다.

카드에 그려진 그림은 나무에 거꾸로 매달린 남자, 얼굴은 환하게 빛나고 있다.

그림 밑에는 영어로 The Hanged Man, 직역하면 그림처럼 ‘매달린 남자’가 된다.

미남이 내민 카드는 타로카드였다. 그는 내가 뽑은 카드를 낚아챈 후 내 얼굴과 번갈아 가며 봤다.

“당신, 오늘 아주 힘든 일이 있을 거야. 얼굴과 카드에 고생이 자글자글해. 그냥 집에 돌아가는 게 어때?”

넌 누구신데 나한테 반말을 하세요? 크윽, 점점 아저씨를 닮아 가는 것 같다.

“오늘 중요한 볼일이 있거든? 절대 그냥 돌아갈 수 없어.”

눈에는 눈, 반말에는 반말이다.

미남은 카드 뭉치를 다시 품속에 넣었다.

“당신 마음대로 해. 사람의 미래는 정해져 있지만, 노력하면 바꿀 수 있을지 몰라.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포기하지 말고 열심히 해.”

왜 ‘가정’형이니? 병 주고, 약 주냐?

“알았어. 그런데 당신도 랭킹 헌터야?”

평일 오전에 협회에 올 사람이라면 둘 중 하나. 오늘 모임에 온 랭킹 헌터거나, 출근한 직원일 것이다.

“내 이름은 이태한. 오늘은 더 이상 볼 일 없을 거야.”

싸가지를 밥 말아먹은 미남, 태한은 자기 할 말만 마치고는 건물로 들어갔다. 심히 거슬리는 화법이다.

“이상한 놈이네.”

한돈 아저씨 다음으로 이상한데?

“끌끌끌!”

이 웃음소리는……?

역시 아저씨는 양반이 못 될 분이다. 아저씨 생각을 하자마자 바로 나타나시다니…….

오늘 모임에선 동행자를 한 명 데려올 수 있다. 그래서 루호는 호규를, 난 아저씨를 선택했다.

유정과 변해라는 입원 중, 아란은 언니를 위로하느라 여유가 없다.

아저씨는 오늘도 변함없이 거대한 배낭을 메고 있었다.

“오늘은 남자들끼리 뭉치는 날인가?”

“유정 씨도 남자인데요?”

일부러 ‘남자’란 부분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알고 있었냐?”

“네.”

아저씨는 내 시선을 피하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미안하지 않아서 미안하다.”

뭔 소리야?

“그건 됐고요. 오늘은 정말 얌전히 구셔야 해요. 아셨죠?”

아저씨는 오늘 모임에서 제공되는 ‘점심 뷔페’를 기대하는 중이다.

“노력해 보마.”

과연 믿어도 되는 걸까? 몇 분 뒤 루호와 호규까지 도착. 우리는 함께 건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1층 로비에는 직원들이 나와 우리를 반겨 주었다. 몇 달 전 자격시험 볼 때를 생각하면 정말 감정이 북받친다.

정식 자격증을 내밀어 본인 확인 후 직원은 엘리베이터를 가리켰다.

“모임 장소는 35층입니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엘리베이터는 우리를 태운 채 35층으로 직진, 중간에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35층 연회장. 테이블부터 벽지까지 광채가 눈이 부셨다. 안에는 벌써 30여 명의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저 멀리 최향자와 장마리가 다른 여자 헌터들과 함께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원하시는 자리에 앉으시면 됩니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빈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원형 테이블 하나당 의자는 8개. 현재 방 안에 있는 테이블은 총 12개, 좌석의 수는 96개다.

응? 왜 자리가 모자라지?

“자리가 좀 부족한데요?”

아저씨는 점잖은 말투로 설명을 시작했다.

“10위까지는 따로 모이거든. 나름 우등반 같은 거지. 듣자 하니, 1위부터 10위는 괴물보다 더한 녀석들이라더라?”

루호는 테이블에 구비된 물병에서 물을 따라 각자의 자리에 놓았다.

아저씨는 루호가 준 물을 마시고 말을 이었다.

“일종의 ‘우등반’인 셈이지. 그다음 11위부터 20위까지는 소위 ‘2군’이라 불리는 녀석들인데, 우등반 녀석들하고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하더구나. 여기까지가 한국에서 활동하는 헌터들의 정점이야. 그 밑까진 실력이 좀 모자라도 올라갈 수 있지만, 20위부터는 칼 같지.”

즉, 나한테 20위 이상은 불가능하단 건가. 그때 누군가가 우리 테이블로 다가왔다.

“앗?”

“오랜만입니다, 상팔 씨.”

티라노의 발……톱이 아니라 티라노 대가리!

“네. 대팔 씨도 잘 지내셨어요?”

이런 자리에서까지 인형 옷을 입고 오냐? 참 징글징글하다.

티라노 탈을 쓴 김대팔은 혼자서 왔는지 대뜸, 우리 테이블에 합석했다.

“아시는 사이신가요?”

후드를 쓴 호규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까, 호규는 김대팔이랑 처음 보는구나.

일단 내가 아는 선에서 호규에게 김대팔을 소개했다.

“저랑 같이 헌터 자격시험을 본 김대팔 씨예요. 굉장히 광탄에 능하시죠.”

아직도 김대팔이 보여 준 광탄이 잊히지 않는다. 이젠 나도 자유자재로 광탄을 쓸 수 있지만, ‘연발’이란 개념에선 김대팔만 못하다.

“대단하시네요.”

호규가 입을 벌리며 김대팔을 바라봤다.

“별것 아닙니다.”

김대팔은 짧게 대꾸한 후 나에게 말했다.

“듣자 하니 무광탄이란 기술을 쓰신다면서요?”

어떻게 무광탄에 대해 알고 있지?

“네.”

김대팔은 공룡 손가락으로 티라노 주둥이를 긁었다.

“그 정도 발상은 여기서 기본입니다. 그렇기에 상팔 씨 랭킹이 고작 100위인 거겠죠.”

시비 거는 건가. 이 자식, 이상하게 정이 안 가. 이야기를 듣던 루호가 김대팔에게 물었다.

“대팔 씨는 몇 위시죠?”

티라노머리는 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이번에 새로이 랭킹에 오른 사람은 모두 5명. 미친년, 갈리. 티라노, 김대팔. 검은 곰, 최향자. 흰 사슴, 조루호. 그리고…….”

김대팔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무뚝뚝하게 내뱉었다.

“김상팔 씨입니다.”

왜 나만 앞에 별칭이 없니?

“제 순위는 80위입니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멀죠.”

최향자보다 높잖아!

“어느 팀에 계세요?”

일단 물어나 보자. 녀석에 대해서 너무 정보가 부족하다.

“어금니입니다.”

뭐라고? 우리는 모두 화들짝 놀라 입을 ‘쩍’ 하고 벌렸다. 지금 김대팔이 말한 ‘어금니’는 바로 우리나라 최고의 헌터 팀이자, 헌터 랭킹 1위가 이끄는 집단. 그야말로 최고 중의 최고다. 이 자식, 인형 탈을 언제 벗겨 본담?

김대팔에 대한 의문이 가중되어 가던 중 방 안의 불이 꺼졌고, 가장 앞에 있는 테이블에 조명이 비쳤다.

거기에는 박장이 손에 마이크를 들고 있었다.

“모이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이번에 모임을 갖게 된 이유에 대해 설명드리겠습니다. 참고로 전원 참석을 강제한 이유는 랭킹 의뢰가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으로 받는 랭킹 의뢰! 랭킹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더 많은 부와 명성이 자연스레 따라온다.

웅성이던 방 안은 한순간에 조용해지고, 박장은 의기양양하게…….

“찾았다!”

윽! 갑자기 우리 테이블이 뒤집히더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흙 같은 것으로 뒤덮였다.

단 한 순간의 공격에 바닥에 널브러졌다.

“야, 이 새끼야, 내가 너 찾는다고 했지?”

누군가 쓰러진 내 가슴 위에 발을 올렸다. 어두운 탓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대충 예상이 됐다.

“적지형?”

“그래. 내가 바로 적지형이다. 이 망할 자식아!”

적지형은 흙 같은 것을 내 눈에 뿌렸다. 치사한 자식. 눈이 쓰라리면서 고개가 절로 흔들린다. 상처의 고통은 참을 수 있어도 눈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은 견디기 힘들다.

“네가 날 찾은 거냐? 내가 나타난 거지?”

한마디라도 지기 싫은 마음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주변에서 웃음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다들 널 보고 웃는데?”

앞이 보이지 않는다. 아저씨, 루호, 호규는? 세 사람 다 뭔가 말은 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행동이 느껴지지 않는다.

움직일 수 없는 상태?

적지형은 내 멱살을 잡아 단숨에 들어 올렸다. 그리고 날 무슨 먼지떨이처럼 바닥에 흔들어 댔다.

녀석의 손을 통해 H력이 전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억지로 빨아들이지 않아도 상당한 양이 몸 안으로 흘러들었다.

“쓰레기로 바닥 청소나 합시다!”

사방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아무도 안 말리는 거야? 비범함이란 범인의 영역을 뛰어넘은 경지. 실력이 미치면 머리도 미치나 보다. 잘났으면서 정상적인 사람은 정녕 없는 걸까?

“세 자릿수 주제에 감히 나한테 까불어?”

적지형은 날 냅다 던졌다.

벽에 부딪치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눈은 아직 떠지지 않았지만, 녀석에게 닿은 동안 H력을 흡수할 수 있었다.

벽을 등지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흡수한 H력을 전부 얼굴에 집중. 시각을 뺀 나머지 감각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쫄았냐?”

녀석의 목소리로 보건대, 나와 녀석의 거리는 3m 정도. 주위의 비웃음 속에서 녀석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죽지 않을 정도로만 때릴게. 난 자비롭거든.”

퍽이나 자비롭다.

적지형의 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지금이다!

녀석의 거리가 1m 정도일 때 앞으로 돌진하며 녀석을 밀쳤다. 그러나 내 어깨에 닿은 물체는 사람이 아니었다.

뭔가가 바스러지며 뒤가 휑했다. 덕분에 한 번 더 균형을 잃고 쓰러져 바닥에 쓰러졌다.

“혼자 쇼 하냐?”

왼쪽 옆구리에 사정없이 발길질이 날아든다. 적지형 놈, 아주 날 갖고 스트레스를 푸는구나. 이렇게 가까우면 시력은 별 상관없다. 어차피 녀석도 능력 발동, 나도 능력 발동이다.

머리에 집중했던 H력을 전신으로 전개, 신체 능력을 강화시켰다.

“여긴가?”

다리가 떨어진 짧은 틈을 노려 주먹으로 놈의 정강이를 힘껏 때렸다.

“윽!”

정강이와 주먹이 부딪치며, 나와 적지형은 동시에 신음 소리를 냈다. 그리고 녀석이 낸 소리는 앞을 볼 수 없는 나에게 자신의 면상 위치를 확실히 알려 주는 신호가 되었다.

“받아라!”

벌떡 일어서면서 아래에서 위로 주먹을 올려쳤다. 이번에도 턱에 제대로 명중. 묵직함이 느껴지면서 녀석이 뒤로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떠냐?”

바닥에서 적지형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녀석은 대답하는 대신 그저 웃기만 했다.

“뭐가 우스워?”

“어디 이것‘들’도 한번 막아 봐!”

녀석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많은 수의 기척이 느껴졌다. 대략 7명 정도. 한순간에 나타나 날 포위하고 있다.

“이럴 수가?”

이젠 하다하다 다굴. 어째 랭킹 높은 애들이 더 비겁하다?

일단 살고 보자. ‘항복’이라고 외치면 봐주려나?

“그만!”

엥? 내가 항복하기 바로 직전,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날 에워싼 기척이 모두 사라졌다.

아저씨의 치료로 시력도 회복. 환해진 시선으로 눈앞에 있는 적지형을 노려봤다. 근데 진짜 왜 나 혼자 싸우고 있었던 거야?

비쩍 마른 얼굴, 낮은 눈썹, 휑한 눈, 그리고 오뚝한 코와 깊은 팔자 주름. 노란색으로 염색한 머리카락 아래로 음흉함이 가득한 인상이다.

공식 프로필상 나이는 24세. 그러나 겉보기엔 무슨 34세로 보이는 노안이다.

“뭘 꼬나봐?”

나도 모르게 가운데 손가락을 올려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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