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89화
양복 차림 남자는 손깍지를 낀 채 입을 열었다.
“며칠 후 협회에서 ‘헌팅페스티발’이 열릴 예정이다.”
헌팅페스티발.
2년에 한 번씩 세계 각지의 지부에서 열리는 헌터의 축제다. 헌터, 괴물, 능력, 지부를 총망라하여 여러 가지 볼거리, 즐길 거리가 가득한 행사이기에 굉장히 인기가 좋다. 거기에 어마어마한 인파와 돈이 움직이는 것은 기본 사항.
심지어 각 국가에서 이때만큼은 전적으로 협회에 협조하고, 방송국부터 시작해 정치권까지 잘 보이려 애를 쓴다.
전 국민적 관심을 받는 만큼 영향력이 강력해서 선거를 좌지우지할 정도다.
“우리의 목적은 헌팅페스티발에서 타깃을 제거하는 것이다. 이미 선불은 입금되었다.”
양복 차림 남자의 말에 나머지 넷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양복 차림 남자는 손에 쥔 리모컨의 버튼을 눌러 화면을 넘겼다.
“타깃은 정식 헌터이지만…… 제군들의 실력이면 충분할 거라고 생각한다.”
“타타타! 이 일은 나에게 맡겨 줘. 지난날의 오명을 씻겠어!”
미스터 타이거가 탁자를 두드리며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양복 차림 남자는 고개를 저으며 손사래 쳤다.
“자네의 열정은 높게 사네만……. 이번 일은 아주 중요하다. 보수도 보수지만, VIP의 의뢰거든. 그러니 이번 임무에 한해서는…….”
양복 차림 남자는 오른손가락으로 네 명을 한 번씩 가리켰다.
“총력전으로 한다. 실패는 용납하지 않겠다.”
“재미있군.”
미스터 버드는 팔짱을 끼며 양복 차림 남자에게 물었다.
“총력전이란 말은…… ‘그걸’ 써도 되는 건가?”
“허락한다.”
“키키키!”
미스터 버드는 뭐가 신났는지 고개를 위로 쳐들며 크게 웃었다. 그러는 동안 미스터 터틀이 조용히 손을 들었다.
“질문이 있습니다.”
양복 차림 남자는 미스터 터틀을 가리켰다.
“뭔가?”
“얼마나 대단한 자이기에 총력전으로 나가는 겁니까? 고작 타깃을 처리하는 것이라면 그쪽에 특화된 자들만으로도…….”
미스터 터틀은 냉정히 상황을 짚었다. 그러나 말을 끝내기 전에 양복 차림 남자가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은 다른 때와 다르다. 이번에 한해선 최대한 화려하고, 웅장하게 우리의 역량을 보여 줘야만 한다. 이번 일이 성공하면 이 나라에서의 입지는 180도로 달라지지. 보스께서 아주 기대가 크시다.”
‘보스’란 말에 네 사람의 눈빛이 번뜩였다. 미스터 터틀은 안경을 뺀 후 안경닦이로 렌즈를 닦았다.
“보스를 만나 뵐 수 있는 건가요?”
양복 차림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보스께선 언제나 제군들을 바라보고 계신다. 만약 이번 일에서 공을 세우면 보스가 계신 아지트로 갈 수 있을지 모르지.”
소녀는 대뜸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러자 양복 차림 남자는 헛기침을 하면서 목소리를 다듬었다.
“누군가에게는 별 흥미가 없겠지. 하지만 흥미가 있다면……. 열심히 하길 바란다. 이 구질구질한 나라를 떠나 더 큰물에서 놀 기회니까…….”
그것으로 기억은 끝났다.
대화나 시선 중에 끊긴 부분이 많았지만, 그래도 꽤 긴 시간 동안의 기억을 볼 수 있었다.
그만큼 내가 빨아들인 H력의 양이 많다는 뜻이다.
사흘간 입원하면서 간단한 검사를 받았다.
한돈 아저씨 소개로 알게 된 병원이었기에 망정이지, 평범한 병원이었다면 진작 해부당했을 것이다.
[이름 : 김상팔 / 성별 : 남 / 나이 : 29세]
[힘 : 50 / 속도 : 50 / 지구력 : 50 / 기술 : 50 / H력 : 0 / 기타 : 70]
지옥 훈련이 도움이 되긴 됐나 보다. 이렇게까지 능력 수치가 크게 오를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함께 입원한 유정과 변해라의 능력 수치는 다음과 같다.
먼저 유정.
[이름 : 유정 / 성별 : 남 / 나이 : 28세]
[힘 : 40 / 속도 : 50 / 지구력 : 50 / 기술 : 50 / H력 : 50 / 기타 : 20]
다음 변해라.
[이름 : 변해라 / 성별 : 여 / 나이 : 19세]
[힘 : 30 / 속도 : 30 / 지구력 : 80 / 기술 : 80 / H력 : 80 / 기타 : 50]
난 오늘 퇴원하지만, 두 사람은 좀 더 입원해야 한다고 한다.
아저씨의 치료술 덕에 구사일생으로 목숨은 건졌으나, 완치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집으로 오는 길. 버스정거장에서 누군가와 마주쳤다.
“앗!”
박장. 왠지 이번에는 지난번과 분위기가 다르다.
“아이고, 상팔 씨 아니십니까?”
깍듯한 인사. 그리고 살가운 악수. 불길하다.
“예. 잘 지내셨어요?”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잠시 대화를 나눴다. 역시 주제는 김익조와 약속한 ‘돈’이었다.
“돈이 아직 입금이 안 됐는데요?”
억이 우스워 보이세요?
“하하하. 상팔 씨의 활약에는 정말 마음속 깊이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박장의 말투가 어쩐지 수상쩍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저희가 한시름 놓았습니다. 정말 대단하셨어요! 나이트윙을 정말 멋지게 처리하셨습니다.”
계속되는 노골적인 칭찬.
“협회 내에서 상팔 씨의 입지는 정말 많이 올라갈 겁니다.”
박장은 품속에서 흰 봉투를 꺼냈다. 오오, 드디어 돈이구나! 얼른 받아서 봉투를 펼쳤다.
엥? 안에는 돈 대신 종이 한 장이 들어 있었다.
[헌터 랭킹 100위, 김상팔]
“이건…….”
그것은 일종의 임명장이었다. 바로 나, 김상팔이 대한민국에서 활동하는 모든 헌터 중 100위에 오른 것이었다.
“드래건, 쌍두하피, 미스터 타이거, 유니콘 뿔, 군단개미, 그리고 나이트윙까지.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협회에선 상팔 씨의 공로를 치하하고, 앞으로 더 나은 성과를 기대하고자 상팔 씨를 당당한 헌터 랭킹 100위에 임명했습니다.”
꿈은 아니겠지? 슬쩍 볼을 잡아 꼬집었다.
“썅!”
아프다. 그렇다면 꿈이 아니다.
“하하…… 하하…….”
어이가 없는 웃음. 그러나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웃음이다. 간절히 원했지만 정말 받을 줄은 몰랐다.
군대 제대할 때보다, 헤어진 전 여친의 추악한 비밀을 학교 홈페이지에 올릴 때보다, 꿈에서 여자가 된 루호한테 고백받을 때보다 더 기분이 좋다.
“가, 감사합니다.”
박장은 안경을 들썩이며 콧김을 내쉬었다.
“다음은 보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목소리 톤이 살짝 무거워진다. 박장은 품에서 서류 한 장을 꺼냈다. 거기에는 처음 김익조가 약속한 항목에 대해 쓰여 있었다.
“나이트윙의 현상금 3억, 미스터 버드의 현상금 3억, 성공 보너스 3억. 총합 9억입니다. 그런데…….”
왜, ‘그런데’가 나와요? 불길한 예감이 든다.
“일단 미스터 버드의 체포에 실패했기 때문에 마이너스 3억, 성공 보너스의 조건인 모든 사항 달성에 실패했기 때문에 마이너스 3억.”
최악의 결과구나.
“협회에서 3억 지급을 결정했습니다. 협회의 결정에 따라 주시기 바랍니다.”
어미는 ‘바랍니다.’이지만, 사실상 ‘시키는 대로 해.’나 다름없다.
“나, 나이트윙은 어떻게 됐나요?”
설마 그것도 날로 먹으려고?
“지부에서 나이트윙을 해체한 결과 아주 우수한 품질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나이트윙의 부산물 값으로 7억 원을 지급하기로 했습니다.”
박장은 서류 맨 아래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운송 비용을 포함한 수수료를 제외하고 남은 순이익이 적혀 있었다.
“총 9억여 원. 축하드립니다.”
다른 팀에게 입금 및 대출금을 갚고 나면 순이익은 2억. 이걸 팀원들과 나누게 되면, 개인당 25,714,285원. 거기에 에이스가 받게 될 2천만 원은…….
“그럼 고생하셨습니다. 서류에 쓰인 날, 지부에서 뵙겠습니다.”
박장은 버스정류장 옆에 세워진 고급 승용차에 올라타고는 멀리 사라졌다.
“서류에 쓰인 날?”
서류 중간.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정기 모임―반드시 참석할 것.]
랭킹에 오른 헌터들이 모두 모이는 날! 가슴이 마구 두근거렸다.
“가서 사인해 달라고 할까?”
잡지에서나 보던 얼굴들을 실제로 볼 생각을 하니 아직도 꿈을 꾸듯 믿기지 않았다. 놀라운 일은 계속 일어났다.
우선 루호.
모두에게 랭킹에 오른 사실과 계산에 대한 문자를 보내자마자, 루호에게서 이런 답장이 왔다.
[저도 랭킹에 올랐어요.]
100명 중 100위인 나보다는 무조건 높겠구나.
루호의 랭킹은 95위. 활동 재개한 지 반년 만에 이룬 쾌거다. 더 놀라운 것은 장마리에게서 온 문자였다.
[향자 언니는 91위가 됐어요.]
최향자, 결국 올랐구나. 생각해 보면 드래건 사냥의 공로는 당연히 최향자의 것이었다. 게다가 검은 곰의 명성은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으니, 오히려 좀 늦은 감이 있다.
두 사람 다 나보다 높다. 하지만 별 상관없다. 전국의 헌터 중 100위에 든 것만 해도 마음이 풍족하다.
아저씨는 아예 전화를 주셨다.
“끌끌끌! 그럼 뒤풀이는 네가 쏘는 거냐?”
“아니요. 아저씨가 쏘셔야죠?”
아저씨는 살짝 격양된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네. 이번 사냥의 에이스는 아저씨니까요.”
다들 각자의 위치에서 최고의 역할을 해 줬지만, 누가 뭐래도 에이스는 아저씨였다.
당장 아저씨가 살린 사람 수만 봐도 결과는 명확하다. 그리고 아저씨의 치료비용은 추가 계산을 해야 한다. 그러니 더더욱 아저씨가 쏘셔야 한다.
“약은 녀석.”
“누구한테 많이 배웠거든요.”
“그래. 알았다. 그럼 다음에 보자. 몸조심해라.”
“아저씨도요.”
랭킹 모임. 어서 빨리 그날이 왔으면 좋겠다. 일단 그전에…….
“은행으로!”
빨리 대출금을 갚아서 이자를 최소화해야 한다! 서둘러 도착한 버스에 올라탔다.
이번 사냥으로 랭킹에 오르긴 했지만, 금전적으로 볼 땐 사실상 손해였다.
여태까지 저축한 돈이 2천만 원으로 바뀐 셈, 결국 이번 달에도 월세에서 전세로 옮기긴 힘들 것 같다.
“헤헤헤.”
며칠 전 나이트윙 사냥 동영상을 트튜리팟에 업로드, 현재 인터넷 반응이 아주 뜨겁다.
현재 조회 수 천육백만.
덕분에 다른 영상 조회 수도 상당히 늘어났다. 이번엔 그 얄미운 적지형 놈 댓글도 없다.
“응? 잠깐만…….”
이번에 랭킹 모임에 나가면 그 망할 적지형을 보게 되는 건가?
“헉!”
그건 미처 생각지 못했다. 아무리 적지형이 성질 머리 나쁜 양아치라도 어엿한 랭킹 헌터. 괜히 얼굴 마주쳤다가 두들겨 맞을 수 있다.
“후후후. 나인 줄 모르면 그만이잖아?”
거기엔 무려 100명이나 되는 헌터가 모인다. 즉, 그 100명이란 인파에 몸을 숨기면 장땡!
며칠 후. 택시에서 내려 협회 건물을 바라봤다.
위풍당당한 한국 지부! 쓸데없이 비싸게 지은 교외의 빌딩이자, 직원들의 출퇴근 파워 고통!
지상에 있는 손님용 주차장엔 벌써 자동차 몇 대가 주차되어 있었다.
모임 시간은 오전 10시.
현재 시각 오전 9시 30분.
완벽한 도착 시간이다.
일단 루호를 기다리며 주차장의 차들을 구경했다.
“와!”
직각으로 도배된 고급 세단, 뚜껑이 없는 스포츠카, 쓸데없이 큰 외제 지프, 머플러를 무슨 뿔처럼 화려하게 튜닝한 픽업트럭.
평범한 자동차가 보이지 않는다. 은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와, 도대체 돈을 얼마나 벌기에 다들 차가 뻔쩍뻔쩍하냐?”
저 차 한 대가 내 전 재산보다 비싸다. 그 중 가장 비싸 보이는 차 앞에서 절로 발걸음이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