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70화
“크윽!”
공중에 매달린 김여개를 등에 짊어지고는 천천히 발을 움직였다.
상체는 정면을 향해 90도로 눕히고, 다리도 살짝 구부린 상태.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옆구리에서 흐르는 피가 펌프로 퍼 올린 것처럼 쭉쭉 쏟아졌다.
“하아……. 아저씨만 계셨어도…….”
어떻게 괴물을 사냥하러 왔다가 사람 손에 죽을 뻔하냐?
미치겠네.
“사람이 가장 무섭다더니…….”
미스터 블레이드도 그렇고, 김여개도 그렇고……. 죽은 사람만 불쌍하다.
그렇게 그날의 사냥은 마무리되었다. 제시간에 사냥 구역에서 나온 우리는 즉시 경찰에 신고, 구급차에 실려 주차장을 떠났다. 우리가 타고 온 밴은 협회에서 빌린 것이기에 협회에 연락해 소정의 벌금을 지불한 대신, 협회 측에서 회수했다.
땅벌 사건으로 난 한 가지, 아주 중요한 교훈을 배웠다.
아무리 만만한 괴물, 날로 먹는 사냥이라도 동료 간의 호흡이 맞지 않으면 소용없다는 것.
헌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실력이 아니라 협동심이었다.
“내가 두 번 다시 이런 일 하나 봐라. 이런 일을 하느니, 차라리 한돈 아저씨 엉덩이를 닦아 드리는 게 낫지.”
병원으로 가는 구급차 안에서 이를 갈며 맹세했다.
옆구리에 난 상처는 구급대원의 응급처치와 H력을 이용한 신체 능력 강화로 잘 아물어 가고 있었다. 병원에 도착해서 가볍게 꿰매면 끝, 입원까지 갈 상처는 아니었다. 그것은 아란이나 공미도 마찬가지. 다만 공미와 김여개의 경우 심리적인 부분에 대해 검사를 좀 받아야 할 것이었다.
헌터로 먹고살려면…… 수도 없이 겪어야 할 일이다.
***
“남장을 하는 데 딱히 이유는 없어요. 그냥…….”
유정은 두건을 벗으며 머리칼을 보여 줬다.
단정한 단발머리. 머리카락 관리를 잘했는지 광채가 쫘르르 흐른다.
“그게 마음이 편해요.”
“그럼…….”
뭐였더라? 트랜스젠더?
“성정체성에…….”
이런 이야기는 참 조심스러워진다.
유정은 단번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전 여성이 맞아요. 남성에게 호감도 느끼고요. 그냥…… 남성처럼 입는 걸 좋아해요.”
남성처럼 입는 것을 좋아하다가 남성 행세를 하게 됐단 건가.
어렵네.
이성도착증?
대다수 일반인의 지식은 트랜스젠더와 게이 정도. 하지만 이 분야도 파고들면 엄청나게 복잡하다.
겉모습과 내면, 그리고 사랑하는 대상과 정체성. 이 네 가지에 따라 사람은 천차만별로 나뉜다.
내 결정은 곧 나의 정체성이고, 나의 행동은 곧 남이 나를 정의하는 기준이 된다.
결국 자신을 만드는 자는 자기 자신뿐이다.
난 그냥 티셔츠에 청바지.
유정은 상의에 브이넥셔츠와 은 목걸이. 하의에 브라운면바지와 징 박힌 벨트를 입고 있다.
참고로 신발은 리본 모양으로 끈을 묶은 캔버스화.
진짜 모델 같다. 루호랑 같이 세워 놓으면 여자들이 줄줄이 쓰러져 나갈 비주얼이다.
“혹시 남장하는 것이 예전 자격 취소와 무슨 관련이 있나요?”
우리는 시내 조용한 카페 구석에 앉아 진솔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오늘만큼은 사람 암 걸리게 하는 인간들 없이 성숙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유정은 커피에 입도 대지 않은 채 그냥 바라만 보며 말했다.
“남장 여자는 다들 이상하게 보니까, 그냥 남자인 척하면서 살았어요. 남장 여자보단 여성스러운 남자가 형편이 낫거든요.”
그건 그렇겠지. 근데 나 뒤에서 은근 욕 많이 했는데…….
기생오라비라고.
“팀원 한 명에게 들키고 말았어요. 항상 얼굴에 미소를 지고, 모두에게 친절한 좋은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너무 방심하고 말았죠.”
저래서 분위기메이커 부류를 조심해야 한다. 앞에선 웃으면서 친분을 조성하지만…… 뒤는 구릴 수 있다.
“역시 사람이 무섭더라고요.”
유정은 손에 쥔 두건을 꽉 쥐어짰다.
“처음엔 돈을 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줬죠. 그런데 액수가 점점 커지더라고요.”
웃는 얼굴로 협박하고 돈 달라고 한 건가.
“그러다가 나중에는 절 원하더라고요.”
응? 뭐, 뭐라고!
잠시 이야기가 멈췄다. 말하는 유정도, 듣는 나도 쉽지 않은 주제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유정의 마음이 정리되길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그래서……?”
유정은 깊은 한숨을 내쉰 후 말했다.
“능력을 써서 공격했어요. 의사 말로는 반년간은 누워 있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자격이 취소된 건가요?”
“네. 협회 측에 사실을 말하니까, 자격을 취소하는 선에서 마무리를 지어 줬어요.”
여기까지만 들으면 협회가 일처리를 참 잘한 것처럼 들릴 것이다. 그러나 망할 협박범 녀석은 다쳤단 이유만으로 패스. 즉, 이 일은 단순히 유정의 자격만을 취소한 것으로 끝난 것이다.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들어 사건을 최소화한다.
당하는 상대가 일이 커지길 원하지 않는 만큼, 일이 커질 경우 양쪽 모두 출혈이 큰 만큼 효과적인 일 처리다.
가장 빠르게 은폐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 역시 협회는 썩었다.
“한동안 집 안에 틀어박혀서 숨만 쉬고 있었어요. 더 이상 살기 싫었거든요.”
유정은 천천히 머리를 만지며 다시 두건을 둘렀다.
“며칠 후 한돈 씨에게 연락을 받았어요. 한돈 씨랑은 전에 몇 번 일해서 연락처를 교환했었거든요.”
또 아저씨? 은근 마당발이시네.
“그때 한돈 씨가 해 주신…….”
이야기? 조언? 경험담? 교훈? 위로? 상담? 가르침?
“욕들이 아직도 귓가에 선해요. 정말로…… 태어나서 그런 살의를 가져 본 건 처음이었어요.”
뭐지? 예상하던 전개가 아닌데?
유정은 두건을 단단히 맸다.
“정말, 세상에 존재하는 욕은 다 들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모욕적인 건 처음이었어요. 여성으로서, 그리고 한 사람의 생명으로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죠.”
와, 도대체 무슨 소리를 들은 걸까? 이런, 킹 오브 진상.
“그래서 당장 방에서 뛰쳐나가 한돈 씨를 만났어요. 그리고 복날에 개 패듯 패 드렸죠. 잘근잘근…….”
‘잘근잘근’을 말할 때 평소의 유정 얼굴이 아니었다. 언제나 차분한 유정의 얼굴이 저렇게까지 일그러진 것은 처음 봤다.
“마, 많이 힘드셨겠네요.”
협박에, 협회에, 아저씨까지.
“아니요. 덕분에 개운해졌어요.”
엥?
유정은 이제야 커피 한 모금을 들이켰다.
“한돈 씨가 그랬어요. 세상을 좋아할 수 없다면 차라리 미워하라고요. 그래야 계속 살아갈 수 있고, 계속 살아갈 수만 있다면, 언젠가 다시 좋아질 수 있대요.”
“그랬군요.”
“그 뒤에 둘이서 제가 때린 팀원의 문병을 갔어요.”
아직 끝이 아니야?
“아직 조금 더 반성이 필요해 보여서 한돈 씨와 둘이서 잘 ‘훈육’했죠. 다행히 이번엔 말이 잘 통해서 원하는 결과를 얻었어요.”
죽였나?
“그럼 지금 그 협박범은……?”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유정은 환한 미소로 답했다.
“헌터를 그만두고, 다른 일을 찾았어요. 워낙 성격이 좋은 사람이라 인맥이 많더라고요. 금방 옮겨서 저도 내심 놀랐거든요. 참 다행이죠?”
아예 말살시켰구나. 웃는 유정의 얼굴에서 사악한 기운이 느껴졌다.
뭐, 그래도 살인은 안 했으니 다행인가?
“그러고 나서 한돈 씨가 다시 헌터 자격을 따라고 권하더라고요. 그래서 한 번 더 헌터가 돼 보기로 했죠. 더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신가요?”
“아, 아닙니다! 잘 들었습니다.”
팀장으로서 당연히 알아야 할 이야기긴 하지만 이걸 다른 팀원들에게도 해야 할까?
“혹시 불편하시다면…….”
흠칫.
내가 무어라 말하기 전에 유정이 먼저 ‘그 말’을 꺼냈다.
“언제든 팀에서 나가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위로해 줘야 할 상대에게 도리어 위로받다니…….
한 방 제대로 맞았다.
“전 딱히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아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리고……. 진심에는 진심이다.
“제가 꿈꾸는 팀은 누구나 자유롭게 소속될 수 있는 공간이에요. 특이한 체질이어도, 인성이 모자라도, 남보다 소심해도, 남들과 달라도, 나이가 문제 돼도…….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머무를 수 있는 팀을 만드는 거예요.”
물론 나 자신의 개인적인 꿈은 ‘헌터 랭킹 1위’지만, 지금 상황에선 굳이 말할 필요 없다.
지금은 우리 팀의 청사진을 그리는 시간. 팀원에게 집중해야 할 때다.
유정의 눈가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멋져요.”
“가, 감사합니다.”
하하, 어쩌다 하나 얻어걸렸네.
성별에 상관없이 미인에게 칭찬받는 것은 기분이 참 좋다.
유정에게 휴지 한 장을 집어 건넸다.
내가 준 휴지로 눈물을 닦는 유정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참 묘하다. 이젠 기생오라비라고 놀리지도 못하는 게 좀 섭섭한데?
“앗! 꽃미남이다.”
누군가가 달려와 유정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라더니……!
“안녕!”
박유화?
“네가 왜?”
너 따위가 이런 훈훈한 분위기에 왜!
양 갈래 머리에 레이스가 잔뜩 달린 미니 드레스와 가죽 장화. 성격만큼이나 과하게 부담스러운 스타일이다.
박유화는 유정을 끌어안으며 크게 웃었다.
“헤헤헤! 반가워요. 잘생긴 오빠!”
“하하하…….”
유정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눈빛을 보냈다, ‘도와주세요.’라고.
흠, 어떻게 한다? 갑자기 놀부 심보가 발동하는데…….
“김, 상, 팔.”
내 이름을 부르는 무거운 목소리.
박유화 뒤로 최향자가 나타났다.
긴 생머리와 가죽 재킷, 그리고 가죽 바지와 가죽 부츠. 그야말로 인조 가죽의 도배다.
“안녕하십니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최향자에게 90도로 인사를 했다. 고개를 들자, 누군가가 내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오랜만이에요. 반갑습니다.”
깔끔한 말총머리에 검은색 민소매 톱, 그리고 검은색 레깅스와 검은색 운동화. 본인 말처럼 오래간만에 보는 장마리였다.
“반가워요.”
검은 과부들 중에선 장마리가 가장 편하다. 최향자처럼 부담되지도 않고, 박유화처럼 덤비지도 않는다.
딱 중간!
생각지 못하게 검은 과부들 셋이 합석하게 되었다.
테이블에 커피 세 잔 추가.
“우리 이따가 쇼핑하러 갈 건데, 같이 갈래요?”
박유화의 권유.
유정은 흔쾌히 승낙했다.
“좋아요. 팀장님도 같이 가실 거죠?”
유정은 남장 여자, 어쨌든 여성이다. 쇼핑 싫어하는 여자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
“그, 그럴까요?”
이거 딱 짐꾼 될 패턴인데? 여기 지금 여자가 넷, 남자는 하나. 그렇다면 난 4명분의 짐을 들어야 할 운명이다. 게다가 대기해야 할 시간과 지루함은 덤.
“마침 오늘이 무기점에서 대규모 세일을 하는 날이에요.”
장마리가 무표정한 얼굴로 나에게 말했다.
본인 딴에는 좋은 정보라고 해 준 거겠지만……. 조금도 좋게 들리질 않는다. 그 말은 자기들이 평소보다 과하게 물건을 살 것이고, 내가 들어야 할 물건이 그만큼 늘어난단 소리다.
“마침 상팔이를 만나서 다행이야. 짐이 너무 많아지면 어떻게 하나 고민했거든.”
박유화가 흐뭇한 얼굴로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러자 다들 짰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만 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