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61화
“자네가 오늘 우리를 지원하러 나온 ‘김 상팔자가 개 팔자’인가?”
대뜸 말을 걸어오는 낼모레 환갑, 길국. 참고로 길국은 땅벌에서 가장 긴 경력을 가진 보조 헌터다. 서류에 실린 사진처럼 별 모양 안경을 쓰고 나름 유행에 맞춰 옷을 입고 있다. 흰색 와이셔츠에 청바지가 깔끔해 보여서 보기 좋았다.
그나저나 남의 이름을 막 부르시네.
“하하하!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마세요. 길국 할배가 원래 그래요!”
유쾌하게 떠드는 청년.
반바지만 입은 장달이 길국과 어깨동무를 하며 말했다. 길국은 나이에 맞게 ‘허허’ 웃었다.
“흥!”
우리 뒤에서 헛기침에 가까운 콧소리가 들려온다.
소리의 근원은 내 또래의 여성, 공미. 얜 정말 얼굴만 내놓은 채 강철판이 달린 갑옷을 입고 있다. 심지어 전신 일체형이라 관절 부위만 다른 소재로 이어진 형식이다. 저건 그냥 놀이동산 인형 옷이나 다름없다.
엄청 덥겠다! 안 그래도 오늘 날씨가 좋아서 더 더울 텐데…….
“공미는 말수가 좀 적어요. 그래도 착한 아이예요.”
장달이 황급히 공미를 소개했다.
지금 상황으로 봐선 차라리 말이 없는 쪽이 더 나을 것 같다.
공미는 장달의 윙크에 얼굴을 붉히더니 고개를 돌렸다.
박자공은 마지막으로 주아란을 가리켰다.
“주아란이란 아이입니다. 아직 18살밖에 안 된 아이인데, 이번 헌터 시험에 합격한 수재지요.”
“네. 그렇군요.”
저 새내기랑 똑같은 정식 헌터 경력을 가진 저한테 지금 배우셔야 하거든요? 이 사람들, 나에 대해선 하나도 모르고 있구나.
하하하,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대뜸 아란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에요, 아란 양.”
어디, 뭐라고 하나 보자.
설마 대놓고 면상에 발차기를 날리지는 않겠지.
아란의 대답은 간단했다.
“어.”
하하. ‘오랜만이에요.’에 대한 대답으로 ‘어.’라……. 설마 아직도 날 치한으로 여기는 건가? 내 누명은 그때 다 벗겼잖…….
아니구나. 안구가 범인인 것은 나 혼자만 아는 거였지. 사실상 뇌 내 망상이나 다름없는 진실이었다.
대충 인사를 끝내고, 우리는 2급 사냥 구역 정문 앞에 섰다. 땅벌의 장비나 복장으로 봐선 이들이 왜 밑바닥인지 매우 잘 알 수 있었다. 당장 무기만 봐도 팀장인 박자공은 무슨 육각 방망이를 들고 있다.
당신이 무슨 ‘암행어사 출두요!’ 하면 어디선가 홍길동처럼 나타나는 사람이야? 그딴 걸로 어떻게 싸워요?
장달은 더하다. 이놈은 맨손으로 싸우려 한다. 얜 어떻게 살아 있는 거지? 우스갯소리처럼 ‘노출도가 방어력’인 거냐? 넌 남자잖아? 그 말은 여자한테만 적용되는 거라고! 플롯아머라도 입고 있냐? 너 중요 캐릭터야?
점점 내 자신이 한돈 아저씨처럼 느껴진다. 내가 이러려고 의뢰를 맡았나, 하는 자괴감이 든다.
공미는 갑옷을 입었고, 거기에 강철판으로 만든 방패를 들고 있었다.
사실 겉으로 보기엔 얘가 제일 낫다. 이게 정석인데! 이게 최소한이란 말이야!
길국은 큰 배낭을 메고 있는데, 아마 짐꾼 역할을 맡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 팀의 경우 자기 짐은 자기가 챙기는 반면, 땅벌의 경우에는 소지품 정도를 제외한 대부분의 짐을 길국이 챙기는 방식. 실제 전투 인원이 아니라면 장비에 크게 구애받진 않지만, 그래도 위험한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치곤 너무 무방비다.
주아란은 맨손이지만, 괜찮다.
얜 이미 헌터 자격시험 때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으니까. 사실 이 중에서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아란이 유일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김여개. 의외로 무기는 좋은 것을 쓰신다. 양손잡이인지 허리에 두른 가죽 띠 양쪽에 나이프가 달려 있다. 게다가 자세히 보니, 옷 위로 속에 입은 방호복의 형태가 보였다. 움직일 때 소음이 없는 걸 보면 상당히 비싼 물건이다.
뭐, 이 정도면 합격점.
애초에 나도 정식 헌터 경력으로만 보면 새파란 초보인데…….
크윽, 보조 헌터 경력을 괜히 써 냈나? 그래도 보조 헌터 경력까지 합치면 나도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다.
그저 인정을 못 받을 뿐이지…….
“그럼 출발하죠. 가기 전에 한 가지 말씀드릴 게 있는데요.”
철문 앞에서 땅벌에게 다짐을 받았다.
“상황이 벌어지면 반드시 제 지시에 따라 주세요. 어쨌든 제 도움이 필요하다고 부르신 거잖아요. 그렇죠?”
협회에서 날 높게 평가하는 걸까?
땅벌은 순순히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런 이의가 나오지 않으니까 오히려 더 불안하다.
“그럼, 출발!”
박자공이 철문 앞 관리기에 정보를 입력했고, 약 5분에 걸쳐 문이 열렸다.
오늘의 목표는 바로 ‘군단개미’의 체액이다. 군단개미의 체액은 달달한 맛과 향이 나기에 향미료로 두루 쓰인다.
가격은 싼 편. 손쉽게 대량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력 없는 헌터 팀에게 있어 나쁘지 않은 부산물이다.
군단개미의 집으로 향하는 동안 난 주아란에게 슬쩍 말을 걸었다.
“아란 양.”
아란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랍쇼? 얘가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말을 씹어?
“아란 양!”
한 번 더 아란을 불렀다. 그러나 아란은 여전히 나와 시선을 마주치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노골적인 무시, 슬슬 열이 받기 시작한다.
“주, 아란아란아란……!”
무한 아란!
“왜요!”
아란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내 사타구니 사이를 걷어찼다.
와, 양아치네. 이런 망할 자손파괴범. 내 후손들한테 무슨 일 생기면 무조건 네 탓이야!
사타구니를 양손으로 감싸며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내가 갑자기 멈추자 다른 사람들은 재빨리 주변을 경계했다.
“무슨 일입니까? 혹시 괴물이 나타났나요?”
박자공은 육각 방망이를 들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길국은 괴성을 지르며 땅바닥에 엎드렸다.
“난 맛없어! 난 맛없어! 난 맛없어!”
길국의 고함에 덩달아 다른 사람들까지 혼란, 다들 저마다 개소리를 지껄이며 허둥지둥했다.
“우리 집안이 어떤 줄 알아? 전화 한 번이면 너희 다 불바다야!”
김여개의 목청은 남들의 2배. 근데 왜 뜬금없이 집안 이야기? 괴물한테 굽실거리라고 하는 건가?
설마…… 진짜 사모님이야?
그나마 공미와 장달은 침착한 편이다.
물론 두 사람도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긴장하긴 마찬가지다. 오히려 이 5명에 비하면 가장 어린 아란은 조용히 수풀을 주시하고 있다.
하긴, 애초에 자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 당연히 침착하겠구나.
아오!
“하하하.”
난 억지웃음을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날 바라보는 땅벌의 시선이 따갑다. 자기들도 대충 눈치챘겠지. 지금 상황이 서로에게 엄청 쪽팔린 것을…….
“하하……. 그, 그냥 한번 해 본 거예요. 예, 예행연습으로…….”
하하하.
다른 정상적인 팀들이었다면, ‘야, 이 미친놈아!’ 하면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았겠지?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땅벌은 정상적인 팀이 아니었다.
“그런가요? 하하. 역시 능숙한 분은 다르시군요.”
박자공은 그냥 사람 좋은 아저씨 웃음으로 넘어가 주었다. 그러나 박자공의 웃음 뒤로 김여개의 말이 날아왔다.
“꼴에 사람 갖고 노는 거야? 휴우! 팀장이 무능하니까 별일을 다 겪네! 이런 천한 것들하고 취미생활을 하는 내가 미쳤지.”
어지간히 팀장한테 불만이 많으신가 보네. 그럼 팀에서 나가면 되지 않나? 하긴, 내가 볼 때 김여개는 여기 말고 다른 곳에선 안 받아 줄 것 같다.
하하, 갑자기 또 아저씨 생각이 난다.
짧은 해프닝을 뒤로 하고, 우리는 단숨에 군단개미의 집에 도착했다. 군단개미는 일반적인 개미처럼 땅굴을 파서 집을 짓는 습성을 갖고 있다.
대부분의 괴물이 홀로 외롭게 사는 것에 비해 군단개미는 갱벌레처럼 협동을 할 줄 아는 괴물이다. 어쩌면 갱벌레보다 더 체계적인 괴물일지 모른다. 갱벌레는 싸울 때 빼곤 모여 있지 않지만, 군단개미는 다르다.
가장 아래가 졸병 개미, 그 위가 상병 개미, 또 그 위가 장군 개미, 마지막으로 여왕개미다. 참고로 졸병 개미는 2급 최하위 수준의 약골이지만, 상병 개미와 장군 개미는 엄연한 2급 중 상위, 여왕은 3급과 대등하다. 게다가 뭐니, 뭐니 해도 물량. 즉, 개체 수가 무섭다.
“저기 있군요.”
일단 개미집에서 좀 떨어져서 휴식을 취했다. 수풀 속에서 각자 자유롭게 휴식을 취하는 동안 난 망원경을 이용해 개미집을 관찰, 일단 작전을 세웠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정면대결은 승산이 없다. 아무리 약해도 ‘다구리엔 장사 없다.’란 말처럼 쪽수엔 답이 없다. 가능하면 빠르게 체액만 수집하고 빠지는 게 최선이다.
생각을 정리하는 중에 아란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아란의 접근을 본 순간 방어 본능이 작동, 나도 모르게 손으로 사타구니를 꽉 부여잡았다.
“죄송해요.”
“지금 뭐라고……?”
아란은 고개를 푹 숙이며 한 번 더 말했다.
“죄송해요.”
짧은 시간에 참 여러 가지를 느끼게 만드는 아이다.
“뭐……가요?”
짐작 가는 건 몇 개 있지만, 일단 물어보자. 그래도 날 쭉 무시하던 애가 사과를 한 게 어디야?
“전부 다요. 저번에 오해한 것도…… 갑자기 공격한 것도…….”
오오! 감동이다. 아란 입장에선 명확하게 진범이 누구인지는 모를 텐데, 그런 상황에서 범인으로 몰렸던 내게 사과를 하다니!
한돈 아저씨였다면 ‘끌끌끌! 구체적으로 말해야지? 그렇게 말하면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미안한지 모르잖아?’라고 하셨겠지? 그렇지만 난 사과만으로도 충분하다.
난 아저씨랑 다르게 ‘정상’이니까!
“괜찮아요.”
난 아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가끔은 많은 말보다 한 가지 행동이 더 강렬할 수 있다.
“근데 왜 이런 팀에 있는 거예요?”
솔직히 ‘이런 팀’이라고 지칭하는 게 쪼금 죄책감이 들지만, 아란의 실력을 생각한다면 더 좋은 팀에 들어가도 될 것이다.
내 경험상 이런 팀은 얼마 못 가 해체될 확률이 높다. 오죽하면 ‘나’ 같은 사람이 도와주러 오겠는가.
“아무도 오란 데가 없었거든요.”
“하아…….”
안타까움이 벅차올라 한숨을 토했다.
아란은 꽤나 절박한 심정인 듯하다. 하긴, 나도 처음엔 그랬지. 그래도 아란은 나보다 훨씬 사정이 좋다.
보조 헌터로 시작한 내 경우에는…… 첫 역할이 짐꾼 겸 미끼였다.
상상 속 한돈 아저씨가 이렇게 말하며 웃는다.
‘키잡? 철컹철컹?’
닥쳐요! 머릿속에서 아저씨를 지우며 저항하지만, 한돈 아저씨의 개성은 너무나 강력하다.
하지만 질 순 없지!
“받아라!”
상상이었지만, 손바닥으로 힘껏 아저씨 뺨을 후려쳤다.
아저씨는 찌그러진 찐빵처럼 목을 90도로 꺾으며 연기처럼 사라졌다.
‘이런 배은망덕한······!’
죄송해요.
그때 김여개가 나에게 소리쳤다.
“이봐요!”
‘이봐요!’의 뉘앙스가 꼭 ‘야, 인마!’처럼 들린다. 그냥 기분 탓이겠지?
“무슨 일이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