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59화
유니콘과 말은 흡사하지만, 엄연히 종 자체가 다르다.
괴물은 그저 괴물. 외모만 비슷할 뿐 완전히 차원이 다른 존재다. 애초에 동물과 괴물이 공존할 수 있단 사실도 굉장히 희귀한 경우다.
“그렇다면…….”
유니콘은 인간 외에게는 적대적이지 않은 건가?
마침 실험할 수 있는 능력자도 한 명 있는데…….
해 볼 수밖에 없다.
“루호야.”
“예? 왜, 왜요?”
내 뜨거운 눈길에 루호가 흠칫 놀라며 얼굴을 붉혔다.
응?
놀라는 것까지는 이해하겠는데, 얼굴은 왜 붉히니?
“날 믿고 한번 시도해 줄래?”
내 생각을 루호에게 말했다.
어차피 이렇게 기어선 별 희망이 없다. 설사 무사히 도망친다고 해도 나머지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린 채 그냥 놔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참고로 이곳은 전파도 안 통한다. 망할 유니콘들에게 잠재적 스트레스를 줄 수 있단 이유로 이곳은 무려 ‘전파 청정 지대’다!
루호는 고민할 틈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어요. 전 형을 믿어요.”
루호는 즉시 전신에서 아지랑이를 뿜어냈다.
루호가 능력을 발동하자 유니콘들은 즉각 반응, 기껏 벌려 놓은 거리를 쫓아와 우리를 찾아냈다.
“하앗!”
루호는 능력을 발현해 몸을 거대한 흰 사슴으로 바꿨다. 5급의 유니콘이 부럽지 않은 위풍당당한 모습. 우릴 위협하던 유니콘들도 갑자기 변한 루호의 모습에 당황스러워했다.
“아참! 내가 꾸물거릴 때가 아니지.”
루호의 능력지속은 고작 3분.
서둘러야 된다. 황급히 사슴이 된 루호 몸에 손을 대어 루호의 H력을 흡수, 나도 H력을 전개하여 능력을 발현했다.
흡수한 H력이 온몸을 돌면서 마치 엔진이 작동하듯 순환한다.
“우와아아…… 악!”
내 몸이 점점 부풀어 오르더니 어느새 털북숭이로 뒤바뀌었다. 손발엔 발굽, 머리엔 뿔, 엉덩이엔 꼬리가 자라났다.
“와!”
말 그대로 짐승이 된 것이다. 기어서 본 세상은 생각보다 그렇게 나쁘지 않다. 고개를 위로 치켜들 수 없단 점만 빼면 오히려 두 발로 설 때보다 나은 것 같다.
뭔가 안정감이 느껴진다.
“돌진!”
사슴으로 변했어도 루호와의 의사소통엔 문제가 없다.
우리는 유니콘들을 우회, 녀석들의 반응을 예의 주시하며 네 사람의 뒤를 쫓았다. 내 예상대로 유니콘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으며 무신경하게 서 있었다.
“잘된 걸까요?”
“나도 잘 모르겠어. 일단 산 것 같다. 어서 다른 사람들한테 가자.”
시간 제한.
루호는 능력을 풀고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유니콘들과는 이미 상당한 거리를 벌린 뒤. 나는 루호를 등에 태우고 위풍당당하게 숲속을 나아갔다.
작은 숲이라던 주인의 말이 무색하게 숲속은 제법 넓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더욱 수풀이 우거져 있었다.
“아저씨! 향자 누님! 박유화! 어디 있어요?”
“다들 대답해 주세요!”
우리는 열심히 숲속에 소리를 질렀다. 사슴으로 변했음에도 사람의 말을 하는 데 전혀 지장이 없었다.
“끌끌끌!”
아저씨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최향자와 박유화는 무사할까? 또 유정은?
서둘러 수풀을 헤치며 소리가 난 곳으로 향했다.
40여 마리의 유니콘에게 둘러싸인 네 사람. 아저씨와 박유화는 여유 만만하게 유니콘들을 후리고 있었고, 유정과 최향자는 그런 두 사람 뒤에 숨어 있었다.
“끌끌끌! 이렇게 순한 애들이 뭐가 무서워?”
“호호호! 그러게요.”
둘이 은근 재수 없네.
무슨 강 건너 불구경하시나? 그런데 왜 두 사람한텐 유니콘들이 안 덤비지? 도대체 ‘특성자’의 기준이 뭐야?
유니콘들은 네 사람을 에워쌌지만, 함부로 덤비진 않았다. 아저씨와 박유화는 가까이 있는 유니콘들의 갈기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친근함을 표시했다.
“뭐야? 아무렇지도 않잖아?”
“무사하잖아! 헤헤.”
아오, 얄미워. 둘이 꼭 부녀 같네.
외모는 하나도 안 닮았지만…… 하는 짓은 붕어빵이다.
“지금이 뿔을 자를 절호의 기회 같은데요?”
“하는 수 없지. 얼른 해치우자.”
루호는 내 위에 탄 채 바구니에서 톱을 꺼내 들었다. 아저씨와 박유화도 루호의 준비를 보고는 즉각 동조, 두 사람은 톱을 잡아 들어 유니콘의 뿔에 가져다 댔다. 아저씨 뒤엔 최향자, 박유화 뒤에는 유정이 따랐다.
“그럼 자르겠습니다.”
“그래!”
루호는 떨떠름한 목소리에 비해 아주 손쉽게 유니콘의 뿔을 잘랐다.
유니콘들이 경계하지 않아서일까?
상아 이상의 강도를 지녔던 뿔들은 두부처럼 썰렸다. 아저씨와 박유화의 톱도 마치 푸딩을 자르듯 빠르게 유니콘의 뿔을 절단. 아까까지 우리를 찔러 죽이려던 그 무시무시한 기세는 사라지고 유니콘들은 거의 무방비로 당했다.
특히 박유화는 아예 뿔을 통째로 뽑아 버릴 기세였다.
“호호호! 받아라! 내가 바로 팀 검은 과부들의 에이스인 박유화 님이시다!”
우와, 자기 입으로 자기가 에이스래. 망측스러…… 응?
“끌끌끌! 받아라! 내가 바로 팀 ‘헌터 협회 한국 지부장은 발기부전’의 에이스인 한돈 님이시다!”
누, 누구 마음대로 팀 이름을 그따위로……! 게, 게다가 왜 지부장을 건드려? 이 아저씨가 드디어 맛이 가셨나?
크윽, 역시 한돈 아저씨가 최악이구나. 언제, 어디서든 아저씨가 최악이야. 정말 그 최악성에 박수를 보낸다.
“우와!”
유니콘들은 자신들의 뿔이 잘리든 말든 그냥 아저씨와 박유화에게 머리를 들이밀며 콧구멍을 벌렁거렸다.
모두의 바구니에 뿔이 한가득 담기고, 우리는 서둘러 숲을 빠져나왔다. 아저씨와 박유화는 유니콘들의 호위를 받으며 당당히 숲속을 거닐었고, 유니콘들은 그런 두 사람을 위해 스스로 길에 난 수풀을 뜯고 땅을 다졌다.
최향자와 유정은 기회를 틈타 뒤로 빠져서 유니콘들과 거리를 벌렸다. 다행히 한 번 날뛰어서인지 유니콘들은 그대로 쭉 온순한 상태를 유지했다.
“신기하네요. 유니콘이 저렇게 사람을 잘 따를 줄은 몰랐거든요.”
루호는 아저씨와 박유화의 모습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하긴, 유니콘의 호위를 받는 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한 편의 콩트를 보는 것 같았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도 일이 잘 마무리돼서 다행이야.”
찡긋 눈웃음 지으며 대답했다.
그나저나 난 변신을 오래 해도 몸이 괜찮네?
내심 나도 루호처럼 몸에 부작용이 올까 봐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대로 유니콘들을 이끌며 목장 사무실로 돌아왔다. 주인의 도움으로 진정한 유니콘들은 축사로 보내졌고, 그렇게 우리는 마음 편히 일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응? 저기 봐요.”
사무실에서 커피 한 잔씩 하고 있는 사이, 아저씨는 홀로 목장을 걷고 있었다. 그런데 아직 축사에 들어가지 않은 유니콘 한 마리가 아저씨를 졸졸 따라다니고 있었다.
뭔가가 이상한데?
유니콘은 왠지 풀이 죽어 있는 것 같았다.
유니콘이 풀 죽을 일이 뭐가 있지? 설마 또 방귀 뀌셨나?
“저 아저씨 그새를 못 참고 또 저러네? 참 문제야!”
박유화가 커피에 과자를 찍어 먹으며 한마디 뱉었다. 그러자 최향자가 박유화 머리에 꿀밤을 날리며 침묵시켰다.
“괜찮겠죠?”
유정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어왔다.
“걱정 마세요. 아까 보셔서 아시겠지만, 아저씨는 괜찮아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엥?
유정은 상의가 다 찢겨져 속옷처럼 보이는 탱크톱만 남아 있었다.
물론 남자가 탱크톱을 입을 수 있다. 내가 하는 헌터 중에도 그런 사람이 하나 있고……. 그런데 문제는 탱크톱을 통해 드러난 유정의 ‘굴곡’이다.
남자가, 왜, 위에, 속옷을?
이거 설마……!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로맨스 장르 18번 사골 패턴! 남장을 한 여주인공이 남자들 사이로 들어가서 깽판을 치고, 남자들이 ‘왜 남자한테 끌리지?’란 고민에 빠지다가, 결국 다들 그렇게 ‘경사 났네, 경사 났어! ANG!’ 하는 시츄에이션?
일단 내 셔츠를 벗어 유정에게 주었다. 다들 정신이 없는 상황이라 유정의 ‘위쪽’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감사합니다.”
아, 예.
나중에 이야기합시다. 유정 양.
어느새 아저씨 주위로 또 한 무리의 유니콘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 녀석들은 아까와 달리 굉장히 침울한 표정으로 아저씨의 냄새를 맡고 있었다.
“뭐지?”
심지어 아저씨도 침울한 표정을 한 채 유니콘들 가운데 서 있었다. 아저씨의 슬픔이 전염된 탓이었는지, 유니콘들은 부르르 몸까지 떨었다.
“저것들 왜 저래요?”
박유화의 물음에 주인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을 피하는 주인의 눈동자에도 뭔가 서글픔이 서려 있었다.
“뭔가…… 대답하시기 곤란하신가요?”
응?
갑자기 최향자와 박유화가 귓속말을 나눴다. 그러더니 두 사람의 눈빛이 번뜩이면서 한순간에 표정이 바뀌었다.
빵빵하게 부푼 박유화의 볼을 볼 때 뭔가 웃긴 것을 생각해 낸 모양이다.
음……. 저 상황의 아저씨를 보고 어떤 농담이 생각난 걸까? 나중에 알려 달라고 해야지.
한참이 지나고, 아저씨를 따르던 유니콘들도 축사로 들어갔다. 아저씨는 우울증에 걸린 사람처럼 아무 말도 없이 사무실로 돌아왔다.
“무슨 일이에요?”
아무리 물어도 아저씨는 입을 열지 않았다. 결국 오늘의 일은 이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다 함께 버스를 타고 돌아가는 길. 거기서 난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그것은 예전에 본 어느 코미디 영화였다. 분명 제목이…….
돌연 루호가 말을 걸어왔다.
“‘39살까지 안 해 본 남자’였죠?”
흠칫.
“혹시 너도……?”
생각이 일치한 건가? 하긴, 나도 눈치챘는데 똑똑한 루호가 모를 리 없지. 만약 특성자의 조건이 ‘순결’이라면……. 이건 엄청, 매우, 진짜 웃긴 일이다. 처음 유니콘들은 ‘순결’한 아저씨와 박유화에 이끌려 공격하지 않은 것이고, 그다음 유니콘들은 아저씨의 ‘순결’을 눈치챈 후 충성심을 넘어 동정심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크윽…… 큭…… 윽…… 큭…….”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손으로 입을 막았다.
아저씨라면 충분히 그럴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좀 심한 거 아니야? 덕분에 유니콘들한테서 무사했으니 다행인 건가? 나였다면 절대 다행이라 생각 안 할 텐데?
미친…… 이건…… 정말 말 그대로 대박이다. 아니다, 이건 대박도 아니야. 이건 그냥…… 끝장이다!
확인 차 아저씨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아저씨……. 혹시 혼전순결주의세요?”
크, 큭큭. 내 표정이 너무 노골적이었나?
아, 물론 혼전순결주의를 비웃는 것이 아니다. 그냥 뭐가 됐든, 아저씨를 놀리고 싶을 뿐이다.
아저씨 얼굴에 불쾌함이 잔뜩 올라왔다.
“닥쳐! 난 총각이 아니야, 난 마누라들이 있다고!”
“예? 그럼 결혼하셨어요?”
아저씨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눈으로, 얼굴로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날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고.
잠깐, 지금 마누라‘들’이라고 하셨지?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지상 최대의 수수께끼를 생각하느라 골머리를 썩었다. 그런데 문제는…….
답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