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47화
아저씨는 어깨를 으쓱이며 무대 쪽을 가리켰다.
“대충 정리됐지.”
“어?”
무대 주변에선 미스터 터틀이 합격자들의 합공을 받고 있었다. 다들 언제 겁을 먹었냐는 듯 무섭게 덤벼들고 있었다.
미스터 터틀은 H력으로 만든 방어막 같은 것으로 사방에서 날아드는 공격을 막는 데 전전긍긍했다.
“네가 미스터 타이거를 쓰러뜨리고 나서 다들 용기를 얻은 모양이더군. 무슨 미친놈들처럼 싸우는 꼴 좀 봐라. 재밌지? 인간이란 참 단순한 거야.”
아저씨는 배낭에서 같은 내용의 문서 여러 장을 꺼내 기절한 사람 한 명, 한 명의 지장을 찍었다.
문서에는 치료술 및 의학적 행위에 대한 비용과 그에 해당되는 모든 활동의 동의 여부가 적혀 있었다.
아저씨는 머릿속으로 치료할 사람들과 치료 규모에 따른 소득을 계산하느라 바빴다.
이야, 완전 도둑놈이네?
하여간 돈 버는 데에는 천재적인 분이다.
“어디 보자, 이 친구는 골절, 이 친구는 과다출혈, 이 친구는 타박상, 이 친구는 발기부전, 이 친구는 습관성 지루, 이 친구는 습관성 탈골, 이 친구는 전신 찰과상, 이 친구는 성기 파열상, 이 친구는 내상과 안구손상이군. 끌끌끌! 월척이군, 만선이야!”
분명 아저씨의 치료술은 남다르다. 실력도 좋고, 경험도 풍부하다. 하지만 이런 아저씨의 모습 때문에 아무도 아저씨를 팀에 껴 주지 않는 것이다.
탐욕과 이기심, 그리고 기회주의적인 수전노. 어쩌면 나도 아저씨에게 이용당하는 것인지 모른다. 그래도 난…… 그런 아저씨가 썩 마음에 든다.
아저씨가 H력을 쥐어짜내 모든 이들을 치료하는 동안 합격자들은 미스터 터틀을 구석으로 몰았다.
결국 미스터 터틀은 미스터 타이거를 놔둔 채 혼자 천장에 난 구멍으로 도주했다.
그렇게 상황은 종료.
부상자들은 아저씨에 의해 완치되었다. 아저씨는 마지막으로 남은 환자인 미스터 타이거의 상태를 살폈다.
“이 녀석도 회복시켜야 하나? 흠……. 악의 조직한테 청구서를 보내면 입금을 시켜 줄지 모르겠네? 플레잉한테 어떻게 연락한다?”
미스터 타이거는 심장과 양팔에 난 구멍, 그리고 그 구멍으로 인해 심장이 충격을 받아 당장에라도 심박이 멈출 수 있다는 점을 제외하곤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원래 체력이 워낙 좋은 편이라 치명적인 부상에도 잘 버티고 있었다.
“이 녀석은 다른 특별한 부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심장에 구멍이 뚫린 것 정도니까……. 아마 괜찮겠지? 끌끌끌! 어차피 현상금은 ‘죽어도’ 나오니까!”
죽어도 나와?
아저씨의 발언이 거슬린다.
아저씨는 기절한 부상자 셋을 삼각형으로 모양으로 눕혀 놓은 후 세 사람의 손을 서로의 사타구니 중앙에 올렸다.
“이게 바로 진정한 삼각관계지. 끌끌끌! 이래서 여자들이 삼각 로맨스라면 사족을 못 쓰는 건가?”
이, 이 아저씨. 갑자기 미치셨나? 그나저나 죄수고릴라를 어떻게 처리하신 거지? 아저씨 능력은 치료라서 해치우려면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을 텐데?
상황이 정리되고, 외부의 손길이 미칠 때쯤 내 궁금증이 풀렸다.
날뛴 죄수고릴라는 총 20마리. 발표장 밖에 있던 녀석들을 제압한 것은 놀랍게도 내가 아는 사람들이었다.
“형!”
“어? 루호?”
어머나, 세상에?
루호가 왜 여기에? 죄수고릴라를 처리한 것은 바로 루호와 김익조였다. 루호는 날 끌어안으며 기뻐했다.
“다행이에요. 형이 무사하실 줄 알았어요!”
“여긴 언제 온 거야?”
계속 생각하던 루호가 보이니까 나도 참 기쁘긴 하다. 그런데 얘가 어떻게 여길 온 것인지 정말 궁금하다.
누가 부른 걸까? 분명 외부와는 연락이 두절됐을 텐데?
루호는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형이 절 부르셨잖아요? 계속 머릿속에서 형 목소리가 들렸어요. ‘루호야, 도와줘!’라고…….”
내가? 불러?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지? 텔레파시라도 통했단 건가? 내 능력은 H력을 흡수하는 걸 텐데?
머리가 또 어지럽다.
“한돈 아저씨완 복도에서 만났습니다. 혼자 죄수고릴라 2마리를 쓰러뜨리셨더라고요. 남은 녀석들은 저와 김익조란 분하고 정리했습니다.”
겨우 둘이서 죄수고릴라를…… 그것도 한 마리가 아니라 여러 마리를 정리했단 것. 역시 루호는 나와 차원이 다르다. 특이 체질만 아니었다면 절대 나와 같은 팀에 있지 않을 것이다.
행운이라고 해야 하나?
살짝 자괴감이 든다.
상황이 제대로 수습된 것은 그로부터 30분 뒤였다.
정식 헌터 자격시험 때문에 한국 지부에는 최소한의 인원만 출근한 상태였고, 그나마 출근한 인원들은 대부분 최고층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저층에서 대기 중이던 인원들은 모두 미스터 타이거와 미스터 터틀, 그리고 죄수고릴라에게 처리당했다. 전파는 사전에 차단된 상태인 것으로 밝혀졌다.
시험은 중단되었고, 부상자들은 모두 응급차에 실려 갔다. 대부분 아저씨에 의해 치료됐기에 목숨은 건졌지만, 그래도 제대로 된 치료는 받아야 했다.
아저씨는 경찰들을 데리고 다니며 싸움의 정황을 설명했다. 나와 루호는 아저씨 뒤를 쫓으며 아저씨의 한심스러운 창작에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바로 여기서 내가 사람들에게 말했지. ‘포기하면 안 돼! 우리는 싸워야 해!’ 그러니까 사람들이 ‘아니, 이런다고 하늘에서 돈이 떨어집니까, 아니면 쌀이 떨어집니까? 우리가 왜 그 악명 높은 플레잉과 싸워야 하죠?’라고 말하지 않겠나? 끌끌끌! 간신히 잘 설득해서 놈들과 일전을 벌였지. 다행히 연습장 안에 무기가 마련되어 있었거든.”
경찰은 아저씨 말을 상당히 신뢰하는 분위기였다.
“그렇군요. 선생님 성함은……?”
경찰의 물음에 아저씨는 멋쩍은 듯 코를 긁었다.
“그냥 한돈이라 알아두게.”
“예?”
경찰은 ‘아니, 지금 이 양반이 장난하나?’란 표정을 지었다. 결국 보다 못한 김익조가 나서서 경찰을 다른 곳으로 보냈다.
아저씨는 퉁명스럽게 김익조에게 말했다.
“거 참! 사람이 기분 좋게 이야기 좀 하려는데. 이러기야?”
김익조는 뒷짐을 지면서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역시 대단하시군요. 이번에는 분명 협회가 신세를 졌습니다. 협회를 대표해 감사드립니다.”
아저씨는 코를 긁던 손가락을 접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고는 주먹을 쥔 손을 등에 대고, 김익조와 똑같이 뒷짐을 졌다.
“너무 고마워하지 마. 나중엔 서로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
“너무 섬뜩한 소리군요, ‘선생님.’”
김익조의 입에서 나온 ‘선생님’ 소리에 이서현은 흠칫 놀랐고, 박장은 안경을 고쳐 썼다.
물론 나와 루호도 놀라긴 마찬가지다.
어떻게 아저씨가 김익조한테 선생님이 되지?
예의상 그렇게 부르는 게 아니다. 지부장 다음가는 김익조가 그럴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설마……?
“두 분…… 사제 관계이신가요?”
나도 모르게 두 분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러자 박장이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며 작게 말했다.
“그렇다네. 더 이상은 묻지 말게. 김상팔 씨.”
이서현은 손으로 쩍 벌어진 입을 가렸다.
아무래도 두 분 사이를 알고 있는 것은 박장까지인가 보다.
루호가 날 뒤로 밀며 두 사람에게서 떨어뜨렸다.
아저씨와 김익조는 서로를 째려보며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눈싸움을 벌였다. 한 번도 깜빡이지 않은 눈은 잔뜩 빨개져 보기 안쓰러웠지만, 두 사람은 살기등등한 눈으로 부들부들 떨리는 눈꺼풀을 억제했다.
살기등등하다.
“많이 컸구나? 우리 익조?”
“원래부터 키는 제가 더 크지 않았습니까?”
김익조는 입을 실룩거리며 아저씨를 향해 성큼 한 걸음 다가섰다.
“그만해라, 그 이야기는 많이 들어서 지겹다.”
아저씨도 김익조를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좀 더 듣는다고 통장 잔고가 비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더 듣는다고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잖아?”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큰 걸음을 하나씩 옮겼다.
“뭣하면 제가 드릴까요? 협회 간부가 되면 참 좋답니다. 죽을 둥, 살 둥 하면서 푼돈을 긁어모으지 않아도 되지요.”
마지막 걸음, 그것은 김익조의 차지였다. 김익조는 아저씨보다 훨씬 큰 키를 내세워 아저씨를 위에서 내려다봤다.
둘의 신장 차이는 발뒤꿈치를 들어도 어쩔 수 없다.
“위에 서면 공기가 다릅니다. 언제쯤 아시게 될까요?”
아저씨는 입술을 오므려 뭐라고 실룩거렸다. 잘 들리지 않는 아저씨의 말에 김익조는 아예 허리를 굽혀 눈높이를 아저씨와 맞춰 주었다.
“할 말이 있으시면 당당히 하십시오. 누가 보면 제가 선생님을 겁박하는 줄 알잖습니까?”
“후!”
아저씨는 대뜸 김익조의 눈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김익조는 눈을 꼭 감으면서 눈을 뜬 동안 눈꺼풀 사이에 맺혔던 눈물을 주룩 흘렸다.
“끌끌끌! 넌 아직 나한테 안 돼! 어딜 감히! 어린놈의 자식이……!”
아저씨는 배를 잡고 껄껄 큰소리로 웃었다. 참으로 추하고, 경쾌한 모습이었다.
김익조는 눈을 감은 채 이를 악물면서 잘근잘근 갈았다.
“나이는 제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어쩌라고? 형 대접해 주랴? 우쭈쭈?”
아저씨는 김익조에게서 뒤돌아서서 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박장은 씁쓸한 표정으로 아저씨와 김익조를 번갈아 봤고, 이서현은 김익조의 분노한 얼굴에 놀라 시선을 돌렸다.
나와 루호도 아저씨를 따라 계단으로 향했다.
“아 참!”
아저씨는 걷다 말고 고개를 돌려 이서현을 쳐다봤다.
“사람들 불러오는 데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협회 간부 체력이 그것밖에 안 돼?”
이서현은 김익조의 눈치를 살피며 최대한 부풀려 이야기했다.
“전파가 안 터져서 그랬어요! 계단에는 죄수고릴라들이 있어서 위로 못 올라가지, 아래에는 다른 직원들이 없지, 건물에서 나가서 방해전파가 없는 지점까지 달렸다고요! 저도 최선을 다했거든요?”
아저씨는 엄지를 세우며 윙크를 날렸다.
“그랬구먼. 수고했어, 끌끌끌! 서류 작업만 하는 사람한텐 꽤 버겁지?”
“그, 그래요!”
아저씨는 슬쩍 박장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부탁이 하나 있는데…….”
박장은 흘러내린 안경을 올리며 깜짝 놀라 대답했다.
“넵!”
아저씨는 날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 애송이가 부순 히말라야거북 등껍데기 말인데, 그거 내가 가져가면 안 될까?”
“그, 그건 협회 재산이라…….”
“뭐 어때? 그거 하나 준다고 협회가 망하겠어? 플레잉한테나 망하겠지! 내 말이 틀려?”
아저씨는 태연하게 코를 후볐다.
박장은 곤란함에 땀을 흘리며 김익조를 쳐다봤다. 눈이 붉게 충혈된 김익조는 박장과 눈이 마주치자 얼른 고개를 돌렸다.
무안함?
모르겠다.
김익조는 허공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의외로 쉽게 허락한다?
“그, 그럼 저희가 향후 등껍데기를 보내 드리겠습니다. 선생님 주소는 협회에 등록된 곳이 맞으시죠?”
“끌끌끌! 역시 통이 크군. 그럼, 잘 보내 줘!”
아저씨는 계단을 내려가기 전에 한 번 더 김익조를 돌아봤다. 김익조는 아예 구석을 바라보며 눈을 진정시키는 중이었다.
“어리석은 녀석…….”
아저씨는 서글픈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이런 아저씨의 모습은 또 처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