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37화
“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대놓고 말씀하시는 거 아니에요? 본인이 듣기라도 하면…….”
“괜찮아.”
안 괜찮거든요? 그런 논리라면 우린 그냥 미친놈 투(TWO)가 되거든요?
아저씨는 어깨를 으쓱였다.
“욕한 게 아니라 별칭을 말한 거야. 최향자가 ‘검은 곰’이라고 불리듯이 갈리란 여잔 ‘미친년’이라고 불리거든. 심지어 본인도 별로 싫어하지 않아. 그래서 다들 그냥 그렇게 부르지.”
“정말요?”
심각하게 의심쩍은데…….
까딱 잘못했다간 저주 걸린다고요?
“갈리는 아주 강력한 능력을 써. 구체적으로 어떤 능력인지는 잘 모르지만, 일단 능력을 발동하면 대상이 무력화되지. 가끔 사람한테도 능력을 쓰는데, 그게 어마어마하다더군. 그래서 다들 ‘미친년’이라 부르면서 두려워해.”
“두려운데 별명을 ‘미친년’이라고 붙였단 말이죠?”
아저씨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대답했다.
“뭐, ‘미친개’ 같은 뉘앙스인 게지.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으니까, 그런 식으로 분풀이를 하는 거야. 비겁하게 말이야.”
대단하신 분이 용케 여태껏 정식자격을 안 따고 계셨네?
다음으로 8등.
이번엔 아저씨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8등인 신인성이란 놈은 정보가 많지 않아. 이름처럼 신인인데, 주로 다른 헌터들한테 속거나 이용당했다더구나. 별명이 ‘바보’야. 왕바보!”
“좋은 사람이란 거죠?”
이런 망할 세상에서 좋은 사람은 귀하다. 이왕이면 인성과 실력 둘 다 있으면 좋지만, 그런 사람은 아주 드물다.
“실력은 어때요?”
“나쁘지 않아. 8등이란 성적도 그렇고, 능력도 강력한 편이야. 듣기론 H력을 태운다고 하던데? 위력이 꽤 괜찮나 봐.”
갑자기 머릿속에 어느 폭탄 머리랑 ‘테러’가 떠오른다. 이젠 우리나라도 테러의 위협에서 안전하지 않은 것 같다. 언제, 어디서, 누가 폭탄을 터뜨릴지 알 수 없다.
9등은 바로 나, 김상팔. 그리고 마지막 10등은 주아란. 아란에 대해선 아저씨도 아는 것이 없었다.
정말로 완벽한 신예, 순백의 신인이다.
아저씨와의 대화가 마무리되고 누군가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김상팔 씨?”
티라노의 발톱.
이따가 추가시험 볼 때도 인형 탈 쓰고 하는 걸까?
대팔을 바라보고 있자니 궁금증이 샘솟았다.
“무슨 일이죠?”
일단 최대한 진지하게 목소리를 깔았다.
혹여 아저씨가 특급 민폐 발언이라도 할까 염려된다. 하지만 굳이 그것을 티낼 필요는 없다.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상팔 씨 정도면 충분히 합격하고 남을 겁니다.”
응? 웬 덕담?
갑자기 긴장감이 확 풀렸다. 일단 인상을 쓰며 대팔의 말에 반박했다.
“등수로만 보면 제 자질은 밑에서 두 번째예요. 여유 부릴 틈 같은 것은 없습니다. 집안, 학력, 능력 무엇 하나 남보다 나은 게 없는 이상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수밖에요.”
“그건 무능한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무능한 사람들은 언제나 조건을 탓하죠. 설사 합격 정원이 단 한 명뿐이라고 해도, 거기에 들면 되는 겁니다. 그걸 못 해내는 인간은 그냥 주제 파악을 못 하는 거죠. 이상만 높고 능력은 낮은 사람은 참 꼴불견이거든요.”
티라노는 손톱을 꼼지락거렸다.
아저씨는 김대팔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는 벌써 합격한 것처럼 지껄이는구먼.”
“전 합격할 겁니다. 반드시……!”
김대팔의 선언에 아저씨는 콧방귀를 뀌며 트림, 동시에 하체로도 진짜 방귀를 뀌었다.
진정 가지가지 궁극의 민폐를 불러오는 분이시다.
직원이 무대 위로 올라 추가시험의 내용을 상세히 설명했다.
시험의 당락을 결정지을 운명의 추가시험은 바로 ‘격파’였다. 구경꾼과 참가자를 포함한 15명은 3층 연습장으로 이동. 그곳의 링을 중심으로 빙 둘러앉았다.
“끌끌끌. 5일장에서도 안 하는 차력쇼를 협회에서 다 보여 주네?”
아저씨와 난 맨 앞줄에 앉았다.
격파 순서는 등수대로. 즉, 내 순서는 9번째다.
“그럼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1번과 2번은 앞으로 나와 주십시오.”
1번 나존귀, 2번 장혁이 앞으로 나왔다.
링 위에 먼저 올라선 직원은 격파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다.
“규칙을 설명하겠습니다. 우선 여러분은 저희가 준비한 제비 중 하나를 뽑습니다. 각 제비엔 저희가 미리 준비한 10개의 격파 대상 중 하나가 쓰여 있죠.”
그럼 10명이 각각 다른 대상을 격파하는 건가? 그런데 그걸로 공정한 검증이 되나?
“지원자께선 자신의 수단을 사용해 저희가 제공해 드리는 대상을 격파하시면 됩니다. 격파 기준은 파손율 50%이상, 기회는 총 3번입니다. 만약 3번의 기회 동안 격파에 실패하시면 실격입니다.”
링 한쪽에 10종류의 격파 대상에 대한 간략한 정보가 쓰인 게시판이 놓여졌다.
[1번, 송판 10장]
[2번, 송판 20장]
[3번, 송판 30장]
[4번, 기왓장 10장]
[5번, 기왓장 20장]
[6번, 기왓장 30장]
[7번, 대리석 10장]
[8번, 대리석 20장]
[9번, 대리석 30장]
[10번, ??]
“이게 무슨 게임이냐? 무슨 난이도 올라가고 자빠졌어? 게다가 송판, 기왓장, 대리석? 이런 건 일반인도 단련하면 다 할 수 있는 거잖아? 이딴 걸로 헌터를 뽑아?”
역시나 아저씨가 한마디.
귀에 거슬렸지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직원이 가져온 제기 뽑기 상자를 쳐다봤다.
티슈갑으로 대충 만들어진 투박한 상자.
저런 것에 합격의 당락이 결정된다는 사실에 왠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럼 1번 나존귀 씨!”
나존귀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리고 살짝 거칠게 상자 구멍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가 뺐다.
“네! 존귀 씨가 뽑은 숫자는 1! 1번이 1을 뽑았군요.”
직원의 말에 아저씨는 건성으로 박수를 치며 야유를 보냈다.
“우와. 1번이 1번을 뽑다니, 정말 기막힌 우연이군. 확률로 따지면 얼마쯤 될까? 허접이 허접을 뽑았으니, 역시 협회는 공명정대하군! 끌끌끌!”
직원은 잽싸게 존귀가 뽑은 종이를 구기며 자신의 뒷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아저씨의 말이 아니더라도 직원의 주머니가 엄청 신경 쓰인다.
곧 1번에 해당하는 격파 대상이 링 가운데로 올려왔다.
“1번은 바로 나무 송판 10장입니다!”
지원자들은 웅성거리면서 설레는 마음에 부풀었다.
“굉장하다. 나도 저렇게 쉬운 게 걸렸으면…….”
“부럽다. 역시 1등은 운도 1등인 건가?”
다들 부럽기 일색. 사실상 합격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존귀는 자신만만하게 링 위로 올라갔다.
아저씨는 살짝 삐딱한 시선으로 직원의 뒷주머니를 노려봤다.
“이젠 하다 하다 별 지랄을 다 하는구먼. 언제부터 협회가 이렇게 타락한 거지?”
나존귀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송판을 내려 봤다.
응?
송판의 상태가 뭔가 이상하다. 보통 격파용으로 놓인 물건은 층층이 쌓지 않고, 중간, 중간 틈을 만든다.
예를 들어 바닥 위 받침, 그 위에 송판을 올리고, 다시 송판 위 양 끝에 받침, 그리고 다시 그 위에 송판을 올리는 방식.
이렇게 해야 격파자의 신체가 크게 다치는 것을 보호할 수 있다. 그런데 추가시험의 격파 배치는 달랐다.
“저거 잘못 때리면 손목 나가겠는데요?”
슬쩍 아저씨에게 물어보니, 아저씨는 배를 문지르며 비웃었다.
“손목뿐이냐? 저거 잘못하면 손가락부터 팔꿈치까지 다 부러질 걸? 너도 조심해라. 보기보다 난이도가 높은 것 같다.”
벽처럼 가지런히 쌓인 송판. 게다가 송판 하나하나의 두께도 일반적인 것과 차원이 다르다. 일반적인 격파용 송판의 두께보다 두 배 이상, 거의 각목의 그것과 비슷하다.
나무토막? 저런 게 10장?
직원은 엄숙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럼 1번 지원자, 준비!”
나존귀의 흐뭇한 미소가 마음에 걸렸다.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역시 돈은 실패를 경험하게 하지 않는다.
“이 정도쯤이야 한 손으로도 충분하죠.”
“무기나 도구는 사용하지 않는 건가요?”
직원은 살짝 불안해하면서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얼굴 표정이 꼭 ‘이 멍청아! 떠다 줘도 못 먹어?’라고 소리치는 것 같다.
“절 뭘로 보시는 겁니까? 이 정도는 그런 비겁한 방법을 쓰지 않아도 충분합니다.”
우와. 정말, 정말 정정당당하다. 너무 정정당당해서 도덕 교과서에 우수 사례로 실어야겠어. 이완용이 독립운동하는 소리 하고 자빠졌네.
나존귀는 오른쪽 주먹을 꽉 쥐었다. 주변의 이목이 집중됨과 동시에 긴 침묵이 이어졌다. 드디어 운명의 첫 격파! 모두 침을 삼키며 초조히 나존귀의 주먹에 집중했다.
“이얏!”
우렁찬 기합과 함께 나존귀의 주먹이 송판을 때렸다. ‘퍽’ 소리가 크게 울리며 링을 넘어 연습장 전체에 퍼졌고, 모두들 나존귀의 주먹이 행한 일에 놀라워했다.
“세상에나…….”
“아니, 이럴 수가!”
“믿을 수 없군.”
“끌끌끌! 저 녀석, 걸작이구먼! 나 같으면 쪽팔려서 못 서 있다!”
송판 10장은 약간의 미동만 한 채 그 상태 그대로 격파대 위에 놓여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나존귀는 퉁퉁 부어오른 자신의 주먹을 바라봤다. 굳은살 하나 없는 뽀얀 아기 피부가 벌겋게 달아올라 핏줄이 선명했다.
“제기랄!”
나존귀는 굴욕적인 기분을 맛보며 직원을 쏘아봤다. 직원은 대역죄인이라도 된 듯 고개를 푹 숙인 채 나존귀의 시야 밖으로 걸음을 옮겼고, 나존귀는 서둘러 2차 시도를 준비했다.
“이건 나중에 쓰려고 아껴 놓은 건데……. 하는 수 없군요.”
나존귀는 큰 결심을 하며 주먹에 H력을 흘러 넣었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주먹이 밝게 빛내며 링 위를 밝혔다.
“후후후, 어때요? 이게 바로 H력이란 겁니다. 선택받은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진정한 강자의 증표죠. 이 힘 덕분에 학교 다닐 때 꽤 재미있었답니다. 영웅이 되기도 하고, 지배자가 되기도 하고, 왕이 되기도 하고, 때론…….”
“빨리 격파나 해! 여기 너만 똥 싸러 온 줄 알아?”
아저씨의 외침에 나존귀는 잠시 소리가 난 방향을 째려봤다. 순간 아저씨 옆에 앉은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내가 얘기 안 했어! 나 보지 마!
“그럼 제 진정한 힘을 보여 드리죠!”
거친 동작, 그리고 어설픈 타격. 그러나 H력이 담긴 주먹은 나무 송판을 뚫으며 격파대 바닥까지 닿았다. 너무나 위풍당당하고 찬란한 나존귀의 모습에 지켜보던 사람들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야! 정말 대단하다. 겨우 나무토막 부수는데 능력까지 쓰다니, 너무너무 굉장해! 두 번만 굉장했다간 협회를 아주 박살 내 버리겠어? 어휴, 무서워라. 말세야, 말세! 다 했으면 이제 내려와! 뒷사람 생각은 안 하냐? 만성 변비에 치질까지 걸렸냐?”
아저씨의 비아냥거림에 직원은 서둘러 나존귀를 링에서 내려 보냈다. 아저씨는 예상보다 직원의 대처가 신속하자, 혀를 차며 다음 기회를 노렸다.
“아깝다. 선동과 날조로 몰아갈 수 있었는데…….”
난 아저씨의 귀에다 대고 이렇게 속삭였다.
“그만두세요! 최소한 제가 시험을 마칠 때까진 조용히 계셔 주셔야죠!”
아저씨는 마지못해 입을 작게 다물고 무어라 구시렁거렸다. 분명 십중팔구 내 욕일 것이다.
“다음, 2번 장혁!”
장혁이 뽑은 제비는 4번, 기왓장 10장이었다. 금방 격파대 위로 팔뚝 두께의 기왓장들이 옮겨졌고, 장혁은 맨주먹으로 격파에 나섰다. 민소매 셔츠로 드러낸 가슴, 어깨, 팔뚝의 근육이 잠깐의 준비 운동으로 불끈거리며 단숨에 격파대를 집어삼킬 기세를 뽐냈다.
아저씨는 취객처럼 고함을 지르며 했다.
“벗어라! 이왕이면 완전 벗어! 근육 좀 더 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