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30화
팝콘을 먹어야 하나, 아니면 가서 뭐라고 해야 하나…….
저거 함부로 끼어들었다간 뼈도 못 추릴 텐데?
옳고, 그름이 아닌 힘의 논리, 저기에 이성은 없다.
그저 내 편, 네 편만 있을 뿐.
진영의 논리란 참 어처구니없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틀린 것을 알 수 있는데…….
청년은 거의 울기 일보 직전, 청년을 둘러싼 사람들 옆으로 아까 그 세 명이 보인다.
뭐야? 그럼 또 누명 씌운 거야? 도대체 범인은 누구야?
이 나쁜 연쇄 추행마!
넌 내가 꼭 잡고 만다. 비록 우리 할아버지가 꽁지머리 고등학생 명탐정이 아니고, 또 내가 나비넥타이 맨 안경잡이 소시오패스 초등학생도 아니지만…….
그래도 잡고 만다, 한돈 아저씨의 이름을 걸고!
“그만해요!”
청년의 심정이 어떨지 이해가 갔기에 결국, 나서고 말았다.
젠장, 아는 게 무섭지.
“넌 뭐야?”
“군중의 정의로운 맛을 보여 줄까?”
“시위대의 폭력은 합법이거든!”
아니거든!
사람들은 이렇다 할 처리 없이 그저 청년과 날 비난하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폭력으로 인해 사태가 커질 경우 시험에서 받을 불이익을 두려워해 직접적인 접촉은 하지 않았다.
일단 청년의 몸에 슬쩍 손을 댔다. 그리고 H력을 흡수하는 것과 동시에 청년의 결백을 확인했다.
“비켜!”
“싫습니다요!”
일촉즉발의 대치. 지금 나와 청년은 폭풍에 둘러싸여 있었다.
“집합하십시오!”
청년의 상의가 눈물로 다 젖을 때쯤 돼서야 직원들은 자유시간의 종료를 알렸고, 사람들은 욕설을 뱉으며 흩어졌다.
결국 끝까지, 그들은 나서지 않았다.
직원들은 나와 청년의 시선을 피하며 무대 위에 올랐다.
“바쁘신 와중에 이렇게 아침 일찍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합격자 명단을 스크린에 띄우겠으니, 명단에 이름이 없으신 분들은 돌아가 주시기 바랍니다.”
스크린을 가득 채운 영상에는 필기시험 합격자의 이름이 적혀 있다. 응시자들은 저마다 희비를 교차하며 소리를 질렀다.
“김상팔, 김상팔, 김상팔…….”
명단의 중간까지 확인한 결과, 내 이름이 없다.
역시 너무 가증스럽게 쓴 게 티가 났나? 크윽, 이럴 줄 알았으면 너무 싹싹하게 쓰지 말걸!
역시 사람은 고집…….
어?
“하하…… 있……어!”
끝에서 두 번째.
떡하니, 김상팔이라 쓰여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역시 세상은 더럽고 치사한 곳이야.
만세!
내 성이 김 씨임에도 끝에서 두 번째란 뜻은 내 성적이 그만큼 나쁘단 거겠지?
뭐, 오후 실기 시험에서 어떻게든 만회하면 중간으로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우선 합격했단 사실만 생각하자.
첫 계단을 오르는 데 성공!
불합격자들이 슬금슬금 발표장을 빠져나갔다.
합격자는 응시자 전원 중 10분의 1정도.
발표장은 첫 시험으로 금세 한산해졌다.
“그럼 오후에 있을 실기 시험을 보기 전에 점심시간을 갖겠습니다. 합격자들껜 저희 쪽에서 도시락을 제공해 드릴 것이니, 무대 앞으로 나오셔서 줄 서 주세요.”
오예! 공짜 도시락이라니?
허겁지겁 무대 앞에 가 줄을 섰다.
기꺼이 받아 온 도시락은 딱 봐도 ‘밥 많이, 반찬 조금.’의 메뉴.
음, 갑자기 예비군 훈련받을 때가 떠오른다. 내가 가던 예비군 훈련장에서 주던 도시락이 딱 이렇게 생겼었지.
난 그걸 ‘탄수화물 중독자용’이라고 불렀다.
“국물이라도 주지. 밥 먹다가 질식하겠네.”
자리로 돌아와 젓가락으로 밥을 한 움큼 퍼서 입에 넣었다.
불만스럽지만, 그래도 입안에 탄수화물이 들어오니 자동으로 턱과 혀가 움직인다.
일찍 일어나느라 아침밥을 굶은 상태, 역시 시장이 반찬이다.
반찬은 김치, 콩자반, 멸치볶음, 그리고 김!
밥 세 덩이에 반찬 하나씩 먹으니, 정말 훈련받는 기분이다.
합격자 중 몇몇은 도시락 뚜껑을 도로 닫아서 반납, 그냥 빌딩 내 구비된 식당으로 향했다.
“아, 나도 그냥 식당 가서 사 먹을까?”
절반 정도 먹으니까, 입이 뻑뻑하다.
일단 목이라도 축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정수기로 갔다.
정수기에는 나처럼 물로 밥을 삼키려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앗!”
문제의 3인방도 있다.
세 사람 모두 도시락에 대해 투덜대며 정수기에서 물을 마시고 있었다.
“하하하! 이런 쓰레기 같은 도시락은 처음이야. 이런 건 라스베가스에선 상상할 수 없는 퀄리티라고!”
부로수가 너스레를 떨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하불로는 고개를 돌리며 부로수와 시선을 피했다.
갈리의 섬뜩한 미소.
“흐흐흐. 정말 맛이 없어. 전부 죽여 버리고 싶을 만큼…….”
모두들 갈리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며 애쓴다. 얼굴도 얼굴이지만, 복장도 긴 바바리코트?
하불로는 애써 팝송을 흥얼거리며 두 사람을 무시했다.
나도 할 수만 있다면 귀에다 뭘 좀 꽂고 싶은 기분이다.
무시당하든 말든, 부로수는 불특정다수를 향해 이야기를 이어 갔다.
“내가 어릴 땐 먹을 게 없어서 땅에 떨어진 것도 주워 먹었거든? 생각보다 땅에 떨어진 음식도 먹을 만해. 깨끗이 씻어서 끓여 먹으면 위생적으로도 완벽하지. 여자가 떨어진 거였다면 더러워도 그냥 참았겠지만, 음식은 좀 다르지. 안 그래? 여자랑 음식의 차이는 땅에 떨어졌을 때 여자는 알아서 씻지만, 음식은 내가 씻겨 줘야 한다는 거야. 물론, 난 여자를 씻겨 주는 것도 아주…….”
아, 젠장.
한돈 아저씨가 간절히 보고 싶다. 그냥 아저씨가 떠드는 걸 듣는 게 훨씬 낫겠네.
다른 사람들도 눈살을 찌푸린다.
듣기만 해도 절로 기분이 나빠지는 이야기.
퇴폐적인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는 수위다.
공공장소에서 음담패설을 해도 잡혀가던가?
어차피 경쟁자인데, 그냥 이거 녹음했다가 경찰에 신고하는 게 이득일지도 모른다.
정수기에서 물 한 모금 먹고 다시 돌아와 식사를 마쳤다.
문제의 3인방과 아란도 필기시험에 합격.
오후에 있을 실기 시험에서 실력들 좀 보고 나면 윤곽이 나올 것 같다.
대충 둘러보니 합격자는 약 40여 명. 확실하게 중상위권 이상에 들어야 안전하다. 아니면 다음 시험을 기약해야 한다.
“그럼 이제 실기 시험을 시작하겠습니다. 합격자분들께선 3층으로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직원들은 아까처럼 통로와 계단에 서서 합격자들을 안내했다.
3층에 위치한 방은 연습장.
바닥엔 푹신한 쿠션이 깔려 있고, 방 중앙엔 권투 경기의 링이 놓여 있다.
벽과 천장은 벽지 대신 대리석, 각 구석엔 여러 운동에 쓰이는 기구들이 배치되어 있다.
단순한 훈련부터 연습 시합까지 소화 가능한 만능 공간. 이곳이라면 실기 시험을 보기에 안성맞춤이다.
우리는 링을 빙 둘러서 앉았다. 안내를 하던 직원들은 감시하듯 우리 뒤에 섰다.
“그럼 지금부터 실기 시험에 대해 설명드리겠습니다.”
직원 하나가 링 위에 올라 한 바퀴 빙 돌았다.
“참가자께선 둘씩 짝을 지어 링 위에 올라오게 됩니다. 그리고 서로를 ‘사냥’하시면 됩니다. 단, 죽이시는 건 안 됩니다.”
농담?
합격자 몇이 웃음소리를 낸다.
직원은 한쪽 구석에 놓인 진열장을 가리켰다.
“능력을 쓰셔도 되고, 진열장에 구비된 훈련용 무기를 쓰셔도 됩니다. 상대를 사냥할 때 주의하셔야 할 점은 가능한 상처 없이 생포해야 한다는 겁니다. 상처가 적을수록 더 높은 점수를 받게 되실 겁니다.”
서로 죽기 살기로 싸웠다간 둘 다 망한다는 소리네.
흠, 골치 꽤나 썩겠는걸?
압도적으로 강하든가, 아님 뭔가 수를 써야 해.
“그럼 첫 번째로 사냥할 두 분을 호명하겠습니다.”
직원은 주머니에서 작은 종이쪽지를 꺼내 이름 두 개를 불렀다.
처음부터 문제의 두 사람, 부로수와 하불로가 링 위에 올랐다.
부로수는 어깨를 돌리며 몸을 풀고, 하불로는 귀에 낀 이어폰 소리를 더 크게 튼다.
둘 다 맨손. 특별히 능력 발동도 하지 않는다.
“아저씨. 노령임을 감안해 자비를 내리지. 가만히 있으면 피 볼 일은 없을 거요.”
하불로가 먼저 부로수에게 말을 건넸다. 그러자 부로수는 고개를 까딱이며 대답했다.
“나도 그러고 싶지만, 내 아랫도리가 워낙 묵직해서 말이야. 애송이들은 감당이 안 될 거야. 특히, 사내자식들한텐 역겹지. 여자들한테야 좋은 일이지만…….”
직원은 링 아래로 내려가 권투 경기용 공을 가져왔다. 그리고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는 사이 큰소리로 외치며 공을 울렸다.
“시작!”
규칙은 간단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잘 오지 않는 싸움.
뭐든 처음이 가장 어려운 법이다.
부로수와 하불로는 서로 간격을 유지하며 링을 돌았다.
서부 영화의 결투. 이종격투기의 시합. 사나이 대 사나이의 싸움!
두 남자가 격돌한다!
“하아아앗!”
“으랏차차!”
두 사람은 서로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거칠게 잡은 양손은 상대방의 벨트와 바지춤을 찢을 기세로 당기고, 우뚝 선 다리는 힘줄을 세우며 체중을 버틴다.
자세가 꼭 씨름 같다?
“사냥을 하라고 했더니, 왜 씨름을……?”
모두들 어리둥절해하며 어설픈 씨름 경기에 혀를 내둘렀다.
뭔가 프로페셔널하곤 상관없어진 광경.
왜 지켜보는 사람이 창피한 걸까? 왜 창피함이 우리 몫이야? 이럴 때 아저씨가 계셨다면 분명 뭐라고 한마디 하셨겠지?
“허이짜!”
하불로는 안쪽으로 다리를 걸어 부로수를 넘어뜨리려 했다. 그러나 부로수는 뒤로 몸을 젖히며 하불로의 수작에서 벗어났다.
“호이짜!”
두 사람의 지루한 씨름에 직원도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시합은 무려 장장 30분 동안 늘어졌다.
“하하하. 어린 친구가 제법이군. 하지만 내 허벅지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아! 이걸로 자빠뜨린 여인이 몇인 줄 아나?”
갑작스러운 부로수의 발언. 하불로도 지지 않고 받아친다.
“오늘, 내일 하게 생겨서 좀 봐드리려고 했는데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하불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둘은 또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하지만 남자 둘이 땀을 뻘뻘 흘리며 서로의 육체를 탐하는 꼴은 별로 보기 좋지 않았다.
“둘 다 말은 청산유수네.”
입으로 싸우세요?
떠든 소리의 반만큼만 싸웠어도 이렇게 지루하진 않겠다!
계속된 짝퉁 레슬링 겸 씨름으로 두 사람은 녹초가 되었다.
물론 가장 지친 것은 보는 사람.
“능력 발동 안 하나?”
부로수가 턱까지 찬 숨을 참으며 하불로에게 물었다.
지치긴 하불로도 마찬가지. 하지만 하불로는 이를 악물며 부로수의 말에 대꾸했다.
“그쪽이 먼저 해 보시지요, 영감님!”
“아재까지는 어떻게 참아 주겠지만, 감히 나보고 영감이라고 하다니…….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겠군!”
드디어 부로수의 어깨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능력자였구나? 하도 똥 폼만 잡고, 능력 발동을 안 하기에 난 그냥 잔챙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이제부턴 덜 지루하겠지?
부로수는 아지랑이를 몸으로 빨아들였다.
“아니?”
부로수의 몸이 풍선처럼 빵빵해지며 링 위에 떠올랐다.
마냥 날아가는 것이 아닌 바닥에서 일정 거리를 유지하는 부유.
부로수는 나긋한 목소리로 하불로를 비웃는다.
“지금의 난 온몸이 탱탱하지. 축 늘어진 게 빳빳해지면 어떤 기분인지 아나?”
“별로 알고 싶지 않군요. 젠장……. 그럼 저도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놀이는 여기서 끝이군요!”
“이제부터 시작이지! 매력적인 여자 엉덩이를 움켜쥘 때처럼 말이야. 하하하!”
응?
저거 설마……!
자기도 모르게 범행을 자백한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