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28화
다행히 넘어지진 않았지만, 허공을 허우적대는 폼이 스스로 생각해도 민망했다.
아저씨는 배를 잡으며 웃었다.
“끌끌끌! 좋았어. 잘하면 ‘툼과 젤리’에서 한 자리 맡겠는걸?”
거기에 돼지는 안 나오거든요? 툼과 젤리를 모욕하지 마세요!
30바퀴.
아저씨와 내 거리가 반 바퀴 정도 멀어졌다. 아저씨는 조금도 속도가 줄지 않았다.
그에 비해 난 지금 전력으로 뛰고 있다!
50바퀴.
상황은 처절하다. 난 아저씨에게 한 바퀴 이상 뒤처져 있다.
아저씨가 날 뒤에서 추월할 때 느낀 굴욕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아저씨가 좀 괴짜 같은 구석이 있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너무 사람을 약 올린다.
“끌끌끌! 뭐하는 거야? 그래 가지고, 시험에 붙겠어? 노력만 해선 안 돼! 성과를 내야지. 노력 없는 성과는 사기지만, 성과 없는 노력은 미련하다!”
정답만 말씀하시는군요.
딱히 반박할 말이 없다.
70바퀴.
정신이 좀 혼미하다.
사실 100바퀴 달리기는 가끔 체력 단련으로 했던 운동이다. 하지만 그건 적절한 속도를 유지한 장거리 달리기의 일환. 지금 난 단거리 달리기에서나 할 법한 전력 질주 중이다.
이건 미친 짓이다! 내가 무슨 마라톤 전투 승전보 전하러 가는 전령이냐?
90바퀴.
내가 너무 뒤처졌는지, 아저씨가 내 속도에 맞춰서 뛴다.
우리는 나란히 달리며 남은 10바퀴를 채웠다. 하지만 100바퀴에서 걸음을 멈출 때조차 아저씨는 땀을 흘리지 않았다.
“끌끌끌. 어떠냐? 생각이 좀 확고해졌냐?”
아저씨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흙바닥에 그냥 엎어져 헉헉 숨만 쉬는 것으로도 벅차다.
아아, 졸려.
그냥 이대로 자고 싶다. 찝찝하지만, 씻을 기운조차 없다.
“이게 바로 무능력자와 능력자의 넘을 수 없는 벽이다.”
똑바로 드러누워 하늘을 올려다봤다.
수직으로 똑바로 뜬 태양.
하늘 위 유일무이한 존재.
그 찬란함에 눈이 부시다.
태양은 빛난다.
그것은 사실이며, 진리.
태양이 빛난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태초로부터 ‘한결’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태양을 의심하는 이는 없다.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
나도 저렇게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고 싶다.
난 보조 헌터다. 그리고 지금 정식 헌터에 발을 디디려 한다.
너무나 도달하고 싶은 곳. 그리고 온전한 내 힘만으로 다다르고 싶은 곳. 그러나 능력을 쓰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는 곳.
이것이 지금의 내 현실이다.
모순으로 싸울 수 있을까?
“뭐야? 아직도 우물쭈물하는 거야? 이런 세상에……. 우리 팀장이 이렇게 꼴통일 줄은 미처 몰랐군.”
아저씨는 배낭에서 생수병을 꺼내 내게 던졌다.
잔뜩 지친 상태에서도 날아오는 생수병은 감지, 가볍게 낚아챘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생수병을 따 안에 든 물을 한 번에 비워 냈다.
“끌끌끌! 어떠냐? 맛있지? 목마른 놈은 물 한 컵을 간절히 원하고, 배고픈 놈은 밥 한 공기에 영혼을 팔지. 그게 세상이다.”
아저씨는 내 옆에 철퍼덕 앉았다.
“원하는 걸 가지는 게 나쁜 걸까? 그건 아니지! 욕망이란 본래 순수한 거야. 문제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지! 목적이 옳다고 더러운 수단을 선택하면 그 즉시 수단이 목적을 더럽히는 법. 그렇다면 반대는 어떠냐?”
아저씨의 설교를 들으며 빈 생수병을 찌그러뜨렸다.
세상 일이 생수병과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반대도 물론 나쁘지. 하지만 결과적으론 인정받을 확률이 커. ‘악법도 법이다.’란 말도 있으니까……. 정치인들과 기업가들이 어떻게 세습을 하겠냐? 세상은 필요에 따라선 굽힐 줄도 알아야 하고, 피할 줄도 알아야 해. 신념은 업적을 쌓지만, 아집은 피를 흘리거든.”
예시가 좀 극단적이긴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검에 신념을 담아 싸운다고, 검이 총과 대포를 이길까? 검을 고집하는 건 좋아. 자기 고집을 지킬 실력이 된다면 좋겠지. 하지만 아니라면…….”
“알았어요. 무슨 말씀 하시는지 전부 이해했어요.”
아저씨는 운동장이 떠나가라 크게 웃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날 일으켜 세웠다.
“그럼 한 걸음씩 밟아 볼까?”
“그러죠.”
아저씨는 강하게 아지랑이를 피웠다.
조심스럽게 아저씨의 몸에 손을 댔다. 그러자 아저씨의 H력이 내 몸으로 빠르게 침투, 내 몸의 H세포를 깨웠다.
응?
뭔가 이상하다.
아저씨의 H력이…… 계속해서 들어온다.
아저씨가 억지로 밀어 넣고 있어?
“끌끌끌! 어디 한번 끝장을 보자고! 네 능력의 끝을 보는 거야!”
내 능력의 끝?
그게 뭐지?
내 몸에서도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아저씨와 내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지랑이가 대기를 흔드는 것을 시작으로 지면을 뒤흔든다. 우리를 시작으로 구덩이가 생기고, 구덩이가 조금씩 커져 간다.
“아, 아저씨. 이, 이건……?”
아저씨는 미친 듯이 웃었다.
마치 당연하다는 얼굴, 흥미진진한 표정이다.
아저씨와 내 떨림으로 운동장 전체가 갈라졌다.
거대한 지진이 일어나 폐교의 건물까지 무너지는 건 아닐까 염려스러울 정도. 하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몇 시간 뒤.
석양이 지는 하늘, 폐교 건물의 그림자가 운동장에 드리웠다.
“그만하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
“네.”
완전히 방전된 우리는 온몸을 축 늘어뜨린 채 폐교를 나왔다.
땀에 절여진 몸이 천근만근으로 무겁다. 그래도 마음은 개운하다.
고민을 이렇게까지 깔끔하게 날린 건 처음.
스케일링을 받은 치아 같다.
시간이 지나면 또 썩어 들겠지?
“내일 시험 잘 봐라. 응원하러 가지 않아도 되지?”
“네. 걱정 마세요. 준비는 완벽해요.”
모든 게 끝났다.
이제 남은 일은 겪는 것뿐!
***
회사에 사표 내러 가는 회사원, 학교를 전복시키려는 고등학생, 김 마담을 만나러 가는 할아버지, 바람 난 영감을 미행하는 할머니.
저마다 희망과 꿈에 부푼 가슴을 안은 채 사람들은 정류장으로 들어온 버스에 몸을 실었다. 물론 거기엔 나도 껴 있다.
버스 안은 언제나 그랬듯이 만원. 아줌마들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빈자리에 가방을 던지거나 엉덩이를 들이밀었다.
거기에 대항해 노인들은 바통 터치라도 하듯 저마다 짝을 지어 빈자리를 넘겨주었고, 누군가 노약자석으로 다가온다 싶으면 헛기침과 재채기로 쫓아 버렸다.
그야말로 치열한 전장, 이것이야말로 순수한 약육강식!
“진정한 태곳적 자연이 여기 있구나! 역시 사람이 제일 무서워.”
버스 손잡이를 잡으며 노인과 아줌마의 수완에 감탄했다.
제아무리 무한한 체력을 지닌 고등학생, 불굴의 정신을 지닌 회사원, 반강제 알코올 중독인 대학생일지라도 인생의 무게로 터득한 지혜 앞에선 무력한 것이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빈자리는 쳐다보지도 말아야겠다.
버스는 종점을 향해 달렸다.
도중 사람이 많이 내렸지만 아직도 10여 명 정도 남아 있는 상태.
다들 연령대가 젊은 것으로 봐선 나와 같은 목적인 모양이다.
“종점, 헌터 협회 한국 지부에 도착했습니다! 다들 내리세요.”
기사의 말에 모두가 우르르 버스에서 내렸다.
벌판 한가운데 위치한 헌터 협회 빌딩.
무려 50층 높이에 건물의 사면이 유리로 덮인 디자인이 허허벌판의 성처럼 주변을 압도하고 있었다.
건물을 올려다보니까 몸서리가 쳐진다.
“고소공포증 있는 사람은 위에서 못 버티겠는걸?”
이름 아침임에도 1층 로비에는 어마어마한 수의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인 풍경은 시장 바닥 이상으로 혼란스러웠다.
잠시 흥분을 식히기 위해 루호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대박. 사람 짱 많아!]
부지런한 루호는 즉시 답장을 보냈다.
역시 나랑 달리 일찍 일어나는 아침형 인간이구나.
[최선을 다하시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예요.^^]
하하. 지극히 모범적인 답안.
루호답다면 루호답달까?
역시 루호다.
루호의 응원 메시지를 반복해 읽는다. 그리고 그러면서 루호가 들려준 시험 이야기를 상기한다.
루호가 봤을 땐 실기 시험이 정말 적당히 치러졌다고 한다.
지원자가 너무 적어서 그냥 필기랑 면접이 대부분이었다고 하니…….
‘인생은 타이밍이야!’란 아저씨의 말이 정답이다.
예전엔 H세포가 없어서 깔끔하게 체념했었다.
포기한 꿈은 아쉬움으로 남았고, 아쉬움은 자책이 되었다.
과연 저 로비에 H세포 없이 꿈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과연 자신이 그 앞에서 당당할 수 있을까?
살포시 손을 오므리지만, 차마 주먹을 쥘 수 없다.
심호흡.
어제의 교훈을 되새기자.
“가자!”
자격시험 안내책자를 받기 위해 로비로 들어갔다.
뭉쳐 있는 사람들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갈수록 더욱 많은 수의 사람이 나타나 발길을 가로막는다.
어제 특훈의 성과를 시험해 볼까?
나의 진정한 능력! 내 손놀림을 보여 주마!
우선 시선은 천장에 고정. 아닌 척, 모르는 척 연기를 하는 게 중요하다. 거기서 손을 옆으로 뻗는다.
꿈틀거리는 손가락. 그리고 무작위의 먹잇감에 손이 닿는다.
응? 촉감이 좀…….
“꺄악! 치한이야!”
에이, 아니겠지. 촉감이 딱딱했는데?
소녀와 날 중심으로 사람들이 물러선다.
망했다.
확연히 드러난 내 손.
이 몹쓸 손이 소녀의 엉덩이 바로 위에 있었다.
슬쩍 몸에 손끝만 댄다는 것이…….
그것도 하필 여자…….
아오, 왜 시작부터 꼬이는 거야?
“이 사람이 지금 절 더듬었어요!”
정확한 손가락질.
무려 10대로 보이는 여자애가 날 지목한다.
내가 정말 저 애를 더듬은 거야?
제, 제기랄!
철컹철컹만은…….
“아, 아니야!”
마, 맞는 것 같긴 한데…….
일단 나도 모르게 부정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 변태 자식아!”
트레이닝복 차림의 소녀는 시원하게 돌려차기로 내 볼때기를 찼다.
꽃다운 소녀의 체중이 듬뿍 실린 발차기.
고개가 완전히 왼쪽으로 젖혀진다.
허리에 힘을 빼면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 같다.
“분명 내 몸에서 찌릿거리는 느낌이 났거든? 너 맞잖아! 이 치한!”
“아니, 찌릿이라고 말씀하신다면…….”
양심에 찔려서 차마 제대로 항변할 수 없다.
아마도 소녀가 말한 ‘찌릿’은 신체 접촉 중에 일어난 H력 흡수의 감촉.
자신도 모르게 나에게 H력을 흡수당한 것이다.
정말 나인 거야? 누가 아니라고 해 줘!
“무슨 일입니까?”
안내데스크에서 온 직원이 나와 소녀 사이에 끼어들었다.
일단 살고자 하는 심정으로 직원의 다리를 붙들었다.
“억울해요! 난 억울해!”
직원은 날 발로 차 다리에서 떼어 냈다.
생각 외로 과격한 직원의 대처.
확실히 나에게 불리한 상황이다.
“여기 이 아이가 한 말이 사실입니까? 그렇다면 경찰을 불러야겠군요.”
“즈, 증거! 증거를 확인합시다요!”
휴대전화를 꺼내던 직원의 손이 멈춘다.
직원은 주변의 반응을 염려해 나와 소녀에게 조용히 말했다.
“감시카메라로 확인하면 되겠군요. 두 분 다 따라오시죠.”
우리는 모니터룸으로 가 녹화된 영상을 확인했다.
직원 몇몇이 날 향해 손가락질하며 수군거리는 게 들린다.
“아니, 저런 어린 애를 더듬었다고?”
“완전 쓰레기네. 애가 아무리 발육이 좋아도 그러면 안 되지!”
“발육은 별로인데? 저게 어딜 봐서 몸매가 좋은 거야?”
“어휴! 저런 피기 직전의 꽃봉오리가…….”
이 이후론 자체 필터링으로 듣지 않았다.
지금 이 방에 나보다 더 무서운 놈이 있어? 경찰 아저씨, 여기에요! 여기 변태가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