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27화
‘대단하다!’, ‘한국에 이런 괴물이?’, ‘영상에 나오는 여자들 누구?’, ‘이런 미친! 누가 찍은 거야?’ 등등.
실로 뿌듯하기 그지없다.
“응?”
중간에 한 줄.
딱 한 줄짜리 댓글이 눈에 거슬린다.
[많이도 죽었겠네. 이래서 초보자는 함부로 나대면 안 됨. 화질 구린 것 보소. 쓰레기들. ㅋㅋㅋ]
한글.
게다가 닉네임이 낯이 잊다.
[적지형]
흠, 만약 이 적지형이 내가 아는 그 적지형이라면…….
상당히 짜증나는 상황인데?
적지형. ‘적’이 있는 ‘지형’이란 뜻이 아니라 엄연히 사람 이름이다.
헌터 협회 한국 지부 선정 헌터랭킹 100인 중 87위. ‘폭발대제’란 팀에 소속된 헌터다. 이 폭발대제란 팀도 상당히 강하기로 유명한 팀이다.
“흠, ‘초보자는 함부로 나대면 안 됨’이랑 ‘쓰레기들’이라…….”
그 자리에서 죽어 간 이들을 직접 본 사람으로서 그냥 지나치기 힘든 도발.
어느새 댓글 삭제 버튼으로 마우스 커서를 움직인다.
“삭제!”
잘 가라, 적지형! 네 이름을 잊지 않겠다!
다른 업로더의 영상도 확인. 카리는 여전히 새로운 업로드가 없다.
역시 이일과의 방송에서 무슨 일을 당한 것 같다.
이렇게까지 업로드 주기가 긴 적은 없었는데…….
좀 걱정이 된다.
“죽진 않았겠지?”
살짝 그런 생각이 든다.
사실, 사냥 구역에서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이상한 일은 아니다.
“새로운 영상이라…….”
책상에 올려 둔 휴대용 카메라를 만지작거린다. 손전등 크기의 촬영 도구 주제에 화질은 웬만한 전문 촬영 장비 뺨친다.
역시 과학의 발전은 무시무시하다.
“하아.”
내일 모레, 드디어 정식 헌터 자격시험 날이다.
한돈 아저씨한테 뭣 좀 물어볼까?
하지만 아저씨는 지금 금살모사의 알을 팔러 다니느라 바쁘다.
아저씨 말에 따르면 구매자를 몇 명 만나 봤는데, 다들 날강도 같은 인간들이라 팔지 않았다고 한다.
요즘은 전화도 잘 받지 않는다.
루호는 시골에서 여전히 요양 중. 하지만 매일 메신저로 안부를 묻고 있다. 가시거머리 사냥 이후 조금씩 체력 단련을 하는 모양이다.
“루호한테 물어볼까?”
시험 일정 자체는 간단하다.
오전엔 쪽지 시험, 오후엔 실기 시험. 그리고 다음 날 최종 면접을 통해 합격자를 가려낸다.
딱히 정해진 합격자 수는 없지만, 여태까지의 통계로 볼 때 최종합격자 수는 두 자리가 안 된다.
그야말로 극악의 난이도.
아무리 인력이 부족해도 시험만큼은 허투루 하지 않는 것이다.
하긴, 이런 목숨 거는 일을 할 사람을 뽑는 자리에서까지 비리가 생기면 그거야말로 진짜 세기말이지.
용기를 얻기 위해 통장 잔고를 확인한다.
아아. 사랑스러운 0의 향연.
내 통장에 0이 이렇게 많이 있는 게 얼마 만일까?
사랑스럽다. 역시 돈은 많고 볼 일이다.
두둑해진 통장 잔고.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흐뭇한 표정을 짓는 나.
드래건 사냥과 아저씨한테 받은 임상 시험 보수가 내 전 재산이다.
흐뭇한 시간을 보내던 중, 트튜리팟 알림창이 모니터에 떴다.
누군가 방금 새 댓글을 단 것이다.
히쭉 웃으며 댓글을 확인했다.
[감히 내 글을 지워? 너도 친구들 곁으로 보내 줄까?]
아무리 요즘 업로더들 사이에 고소가 유행이라지만, 이건 너무 노골적인데?
대놓고 ‘고소해 주세요!’잖아? 고소가 뉘 집 장난인 줄 아나? 고소하는 것도 힘들다고! 돈도, 시간도, 정신력도 많이 든단 말이야!
삭제.
이런 건 상종 안 하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롭다.
삭제하기 무섭게 바로 또 댓글이 달린다.
이놈, 실시간으로 도발 하냐?
[지우지 마라. 시발, 너 내가 누군지 알아?]
누군지 알면 고소하기 더 쉬워지겠지. 그러나 알고 싶지 않다. 이런 건 상종해 봤자 마이너스다. 감정적으로, 금전적으로 나한테 이로울 게 없다.
물론 재판 잘해서 돈 좀 뜯어내면 좋은 일이지만, 차라리 그 시간에 부업을 하나 더 하는 게 낫다.
삭제. 또 다른 댓글이 달린다.
[사람 말이 말 같지 않냐? 너 지금 내가 지켜보고 있다.]
뭐래. 삭제.
어디 누가 이기나 해 보자!
[나 진짜 적지형이다. 이딴 영상 올리면서 나 몰라?]
응, 몰라. 삭제.
[한 번만 더 지우면 아이피 추적해서 집으로 찾아간다.]
응, 아니야.
추적? 네 꿈속에서? 삭제. 보안프로그래머는 고스톱 쳐서 따는 줄 아냐? 그게 얼마나 어려운데?
[까불지 마. 영상 보면 대충 각 나온다.]
아차. 이건 좀 섬뜩한데…….
내가 직접 영상에 나오진 않지만, 영상에 나온 다른 사람에게 수소문하면 날 찾는 건 금방이다.
적지형 같은 놈을 적으로 두면 나한테 이로울 게 하나도 없다. 하지만…….
동료를 모욕한 것만큼은 참을 수 없다!
삭제. 흠, 이거 유행어로 밀어 볼까?
[이 개새끼. 지금부터 추적 들어간다. 목 씻고 기다려라.]
삭제.
그 후로 새로운 댓글은 없었다. 다만, 적지형이 날 찾고 있을 거란 생각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댓글 하나에 사람을 죽인다고 협박해? 내가 21세기에 살고 있는 거 맞나? 이게 말로만 듣던 현피구나. 근데 이건 게임이 아니잖아?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하지?
“적지형……!”
정말로 본인이라면 좀 심각하긴 하다.
검은 과부들이 남성 헌터들에게 공포의 대상이라면, 이 녀석은 그냥 모든 헌터의 기피 대상이다.
같은 팀원을 수도 없이 폭행, 거기에 스캐빈저가 아니라 아예 강탈까지 한 전적까지…….
그냥 헌터계의 양아치다.
“내가…… 실수한 건가?”
갑자기 좀 두려워진다.
괜히 도발했나? 으으. 모레 시험인데,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적지형 따위 때문에 시험 떨어지면 안 되는데…….
계속 신경이 쓰인다.
컴퓨터를 끄고 다시 이부자리에 누웠다.
두려움 때문인지 좀 어지럽다. 아직 대낮이지만, 일단 자고 싶다.
눈을 감으려는 순간, 휴대전화가 울렸다.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히네. 누구지?
휴대전화 알림창엔 ‘아저씨’라고 쓰여 있었다.
한돈 아저씨?
얼른 전화를 받는다.
―끌끌끌! 상팔아, 내일 바쁘냐?
아저씨는 자세한 이야기 없이 내일 만나기로 약속을 잡고 전화를 끊었다.
이유는 잘 모르지만, 아저씨 목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한결 편안해진다. 십 년 묵은 체증이 싹 내려간 것 같다.
자고 일어나면, 아저씨와 이야기를 좀 나눠야겠다.
***
다음 날.
나와 한돈 아저씨는 외곽 지역에 있는 폐교에서 만났다.
‘들어가지 마시오.’란 팻말이 무색하게 정문은 활짝 열려 있는 학교.
아저씨는 다 끊어진 그네 앞에서 서 있었다.
“여기다!”
아저씨는 언제나 변함없이 커다란 배낭을 메고 있다.
자기 몸집만 한 배낭이면 무게도 만만치 않을 텐데, 항상 메고 계시는 아저씨 체력이 감탄스럽다.
“잘 지내셨어요?”
아저씨는 폐교 운동장 한 귀퉁이에 있는 벤치를 가리켰다.
우리는 그곳에 앉았다.
“오늘 만나자고 한 이유는…… 이것 때문이다.”
아저씨는 배낭에서 흰 봉투 하나를 꺼내 나에게 건넸다.
봉투 안에는 백색 수표가 4장.
각 수표엔 ‘5천만’이라 적혀 있다.
“끌끌끌, 꽤 괜찮은 구매자를 찾았지! 이 정도면 아주 준수한 거래라고!”
“수고하셨어요.”
아저씨는 수표 한 장을 꺼내 배낭에 쑤셔 넣었다.
수표는 한 사람당 한 장씩. 딱 좋은 분배다.
“다른 녀석들한텐 네가 알아서 나눠 줘라. 혼자 다 꿀꺽해도 상관없지만 말이야.”
아저씨의 음흉한 표정. 그리고 양심을 시험하는 섬뜩한 말.
아저씨와 내가 입 다물면 알의 거래 가격은 아무도 모른다.
이 아저씨, 이럴 땐 무섭다.
“됐어요. 다들 똑같이 나누기로 했으니까, 똑같이 나눌 거예요.”
봉투를 소중히 외투 안주머니에 넣었다.
심장과 가장 가까운 곳, 여기라면 절대 잃어버릴 일은 없을 것이다.
“끌끌끌! 그래, 시험 준비는 잘 되어 가냐?”
“아……. 사실 그것 때문에 좀 여쭈어보고 싶은데요.”
“응?”
아저씨는 멍한 얼굴로 텅 빈 운동장을 쳐다봤다.
“시험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당장 내일 시험인데, 아직도 결심이 안 서요.”
나도 아저씨를 따라 운동장을 봤다.
휑한 풍경으로 아이들이 뛰어노는 환영이 보이는 듯하다.
고요하고, 쓸쓸하다.
“무슨 결심?”
“능력을 감춰야 할지, 아니면 밝혀야 할지 모르겠어요.”
처음엔 감추는 쪽으로 생각했지만, 과연 내가 능력 없이 시험에 붙을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이 계속해서 날 괴롭혔다. 사실상 무능력자가 자격시험에 통과한 사례는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없었다.
“선택은 네가 하는 거야. 난 감추는 쪽을 추천하지만, 아마 고생 꽤나 할 게다.”
아저씨가 만든 약은 정말 혁신적이다.
이건 세상에 알리면 불티나게 팔릴 물건. 하지만 아저씨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비밀로 하고 싶어 했다.
설사 내가 능력자란 사실을 밝혀도 약에 대해선 숨겨 달라고 당부했다.
물론 나도 약에 대해서 밝힐 생각은 없다. 약에 대해 밝혀지면, 일단 난 실험실에 끌려가 해부당할 것이다.
“하루라…….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지.”
갑자기 아저씨가 푸념 같은 소릴 내뱉었다.
“예?”
내 물음에 아저씨는 실소로 대답. 그리고 벤치에서 일어섰다.
“괜찮다면, 내가 하루 동안 널 단련시켜 주마. 단……!”
아저씨는 검지를 세워 내 코에 갖다 댔다.
“그 전에 결정을 확실히 해야 해. 숨길지, 밝힐지……! 알겠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는 검지와 함께 다른 손가락을 쫙 펴서 내게 내밀었다.
“일어나라. 그럼 우선 가벼운 준비 운동부터 하자.”
우리는 일단 뜀뛰기로 몸을 풀었다.
목표는 운동장 100바퀴!
참고로 난 맨몸이었지만, 아저씨는 배낭을 메고 있다.
내 외투는 벗어서 아저씨의 배낭에 넣었다.
아저씨는 나보다 앞에 서서 뒤로 달렸다.
“자기야, 나 잡아 봐라!”
하하하.
거기 서세요, 잡히면 죽여 버릴 거예요!
우선 능력을 쓰지 않는 방향으로 아저씨를 쫓았다.
아저씨는 능력 발동을 쓴 상태에서 뒤로 달리는 중.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쫓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끌끌끌! 아직은 팔팔하군. 역시 기초 체력이 좋구나. 맨몸으로 구른 덕인가?”
아저씨는 여유만만.
난 애써 괜찮은 척 페이스를 유지한다.
5바퀴.
예전에 지어진 학교라 그런지, 운동장이 꽤 넓은 편이다.
10바퀴.
슬슬 땀으로 옷이 젖는다. 외투를 미리 벗어나서 다행이다.
안 그랬으면, 소중한 돈이 다 젖었을 것이다.
“어떠냐? 아직도 할 만하다고 생각하냐?”
아니요.
처음부터 그런 생각 안 했는데요? 아저씨는 달걀처럼 생겨서 참 잘 뛰시는군요. 설마, 여차하면 구르는 것 아니죠?
15바퀴.
아저씨의 이마엔 땀 한 방울 없다. 역시 H세포가 좋긴 좋구나.
슬슬 쓸까?
고개를 저으며 의지를 다시 다진다.
이 정도로 포기하면 안 돼! 포기하면 그 순간 끝나는 거야.
20바퀴.
아저씨와 내 거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아저씨는 뒤로 달리면서 배낭에 손을 넣어 바나나를 꺼내 먹을 정도로 여유가 넘친다.
바나나를 까먹는 아저씨가 정말 밉다!
“끌끌끌! 이거 먹어라!”
아저씨는 다 먹은 바나나 껍질을 내 바로 앞에 던졌다.
만화나 영화에서처럼 난 바나나 껍질을 밟고 쭉 미끄러진다.
우와……야……놔……이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