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24화
나도 처음엔 돌아갈 생각부터 났다. 하지만 갑자기 돌아가기 싫어졌다.
이 기념비적인 사냥을 멋지게 장식하고픈 마음이다.
우리와 등 껍데기가 있는 곳은 앞뒤가 뚫린 넓은 통로.
전진, 후퇴 모두 양호하다. 길 양쪽엔 수풀과 나무가 있어 여차하면 우회할 수도 있다. 어차피 가시거머리는 피 냄새와 진동에 민감하니, 숨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작전을 세우죠. 전 싸우고 싶어요.”
“예?”
“뭐?”
루호와 아저씨는 서로 마주 보며 놀랐다.
충분히 예상한 반응. 내가 생각해도 무모한 짓이다. 하지만…….
해볼 만한 싸움이다.
“가시거머리는 한 번 배를 채우면 잘 움직이지 않아요. 뼛조각 상태로 볼 때 거북악어를 잡아먹은 지 반나절에서 하루 정도 됐을 거예요. 시간은 충분해요. 게다가 녀석을 해치우면 보상도 상당할 거고요.”
아저씨는 배낭을 내려놓고 털썩 땅바닥에 앉았다.
“끌끌끌! 미친 팀장이로군. 하지만 존중해 줘야겠지. 어쩌겠나, 우리 팀장인데……. 가시거머리는 엄청나게 먹어 치우니까, 배 속에 다른 괴물의 부산물이 들어 있을지도 모르겠군. 흠……. 루호는 어떻게 할 거냐?”
나와 아저씨는 함께 루호를 바라봤다.
루호는 아저씨를 따라 그 옆에 앉았다.
“팀장을 따라야죠.”
“좋아, 좋아. 이걸로 우리 셋 다 미친 게 됐군. 끌끌끌.”
아저씨는 배낭에서 보온병을 꺼내 뚜껑에 차를 따랐다.
김이 솔솔 올라오는 뜨거운 차를 홀짝이는 모습에서 처음으로 아저씨의 연륜이 보이는 것 같다.
청년을 나무에 기대어 내려놓은 후 손바닥으로 그의 뺨을 쳤다.
두어 번 짝짝 때리니, 청년의 눈꺼풀이 움찔거린다.
“일어나세요. 그쪽 힘이 필요해요.”
청년은 스르르 눈을 뜨며 날 쳐다봤다.
아까보다 훨씬 생기가 넘치는 눈동자.
다행히 청년은 아까처럼 날뛰지 않았다.
역시 매가 약인가. 청년을 향해 씩 웃었다.
“난 김상팔이라고 해요. 나이는 29. 보조 헌터 일을 하고 있죠. 그쪽은요?”
청년은 옆으로 눈을 흘겼다. 옆에는 아저씨와 루호가 앉아 있다.
역시 두 사람을 경계하는 모양.
난 안중에도 없다.
“호…….”
호?
호 씨가 있나?
“호……규.”
“훼에에엣!”
아저씨가 마시던 차를 루호에게 뿜었다. 졸지에 가만히 있던 루호는 뜨거운 물로 세수를 하게 되었다.
“끌끌끌! 뭐야, 얜 또 호구야? 끌끌끌!”
한돈도 만만치 않거든요? 누가 누굴 보고 비웃어요?
아저씨한테 뭐라고 한마디 하려는 찰나, 루호가 나 대신 움직였다.
“조용히 하시죠.”
루호가 두 눈을 부라려 아저씨를 째려봤다.
무표정했던 루호의 얼굴에 노골적인 분노가 아른거리자, 지켜보는 나까지 두려워진다.
“험, 험. 알았다.”
이번엔 순순히 입을 다무는 아저씨.
루호한테 물을 뿜은 게 미안해서일까?
어쨌든 이제 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눌 게 되었다.
“호규 씨? 나이는……?”
호규는 조심스레 나이를 밝혔다.
목쉰 소리가 염려스럽다.
“23입니다.”
루호와 동갑.
“오호! 그래요? 아직 어린 나이에 대단하네요.”
호규는 특별히 대꾸하지 않았다.
좀 더 직설적으로 물어볼까?
“그런데 여긴 무슨 일로 들어온 거죠? 왜 혼자 정문 앞에 쓰러져 있었어요?”
“제가…….”
호규는 머뭇거렸다. 그리고 좀처럼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제가…….’라? 자기가 뭘 했다는 걸까? 아니면 다른 정체가 있는 건가? 왜 말을 하지 못하지?
“잘 들어요. 우린 도움이 필요해요. 저 앞에 있는 건 가시거머리란 괴물인데, 상당히 강하거든요. 우리 힘만으로는 조금 부족할 거 같아요. 호규 씨는 H세포를 다룰 줄 알죠? 만약 우리를 도와준다면 우리가 얻을 보수에서 공정하게 몫을 나눠 줄게요. 어때요?”
“보수요?”
역시 사람을 설득하는 데 돈이 최고다. 돈이야말로 가장 객관적이며, 이성적이고, 보편적인 수단. 돈에는 악의도, 선의도 없다. 단지 액수만 있을 뿐.
“네. 약속드리죠. 녀석을 해치우면 정확히 4등분할 거예요.”
호규는 자신의 목을 만지며 망설였다.
목쉰 것 때문에 망설여?
이상하다.
“좋아요. 하겠어요.”
호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간단한 악수를 나누며 웃었다.
“좋아요. 이제부터 우린 동료예요. 서로 뒤통수치는 일은 하지 말도록 해요. 알았죠?”
호규가 또 날뛸까 염려가 되지만, 지금은 안전한 것 같다.
아저씨와 루호의 반응을 살피니, 두 사람도 호규를 아군으로 삼는 데 반대하는 눈치는 아니다.
“좋아요. 한편이 됐으니 알아야겠는데, 그쪽 능력이 뭐죠? 어떤 식으로 싸워요?”
“비명이요.”
뭐?
비명 지르는 게 능력이라고? 설마 지금 내가 성악가랑 팀 먹은 건가?
이건 정말 예상 못 했는데…….
우리가 열심히 싸우는 동안 뒤에서 우리 힘내라고 노래라도 불러 주는 건가?
이왕이면 투란도트에서 나온 ‘공주는 잠 못 이루고’가 좋은데…….
예전에 ‘갇탤런트’란 프로에 나왔을 때 엄청 유행이었지. 나중엔 개나 소나 불러서 노래 자체가 무의미해진 게 흠이지만…….
비슷한 사례로 ‘지―금 이 순간, 마법처럼―!’이 있다.
“사자후 같은 건가? 꽤 괜찮네. 끌끌끌!”
아저씨의 말이 내 뒤통수를 갈겼다.
아, 그런 거구나. 그런 거라면 엄청 도움이 되지. 사자후가 그거잖아?
소리 질러서 그 힘으로 충격을 주는 기술.
“그런데 목이 쉰 상태에서 제대로 소리를 낼 수 있을까요?”
루호의 날카로운 질문.
즉시 호규를 바라본다.
호규는 내가 자길 바라보는 이유를 이해한 것인지 얼른 입을 열었다.
“싸, 싸울 수 있어요. 보, 보여 드릴까요?”
근데 왜 말을 더듬죠?
“하하하. 확인하는 건 사양할게요. 젖 먹던 힘까지 가시거머리한테 써야죠.”
괜히 또 소리 질러 보라고 했다가 정말로 목이 잠기면 엄청나게 곤란하다. 전력이 줄어드는 일은 조금이라도 줄여야 한다.
“지금 소지하고 있는 무기가 있나요?”
“아니요. 제 짐은 전부 잃어버렸어요.”
형식적인 질문에 형식적인 대답.
뭐, 딱 예상한 것이다.
“그럼 어떤 무기를 다룰 줄 알죠?”
“뭐든지요. 전에 있던 팀에서 쭉 공격을 맡았어요.”
“그래요? 잠시만요.”
아저씨와 루호에게 다가가 조그마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무기 남는 거 있어요? 아무거나?”
“없다.”
“없는데요.”
이런…….
그럼 내 걸 줘야겠네.
대답을 들은 즉시 호규에게 돌아가 내 정글도를 건넸다. 호규는 살짝 의심스러운 눈길로 날 쳐다봤다.
“빌려주는 거예요. 저도 이거 비싸게 주고 샀거든요.”
호규는 잠시 망설이다가 정글도를 받았다. 그리고 그것으로 자신의 역할과 관계를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기운을 차리기 위해 잠깐 간식을 먹기로 했다.
배낭에서 작은 플라스틱 통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피키츄 돈가스가 들어 있다.
돈가스를 하나씩 집어 팀원들에게 주었다.
“이게 뭐야? 이거, 그거 아니야?”
아저씨가 돈가스를 펄럭이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거 포장마차에서 파는 저질 돈가스잖아? 애들 코 묻은 돈 갈취하기 딱 좋은 그거!”
“아니거든요! 이거 제 단골집에서 직접 만든 수제 돈가스거든요? 드셔 보시면 깜짝 놀라실걸요?”
“돈가스는 튀기자마자 바로 먹는 게 제일인데, 이건 너무 눅눅한 거 아니냐?”
큭, 이 말엔 반박할 수 없군. 하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정말 맛있는 음식은 식어도 맛있다고!
아저씨, 루호, 호규는 피키츄 돈가스를 입에 넣었다. 그리고 내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끌끌끌. 오오! 이, 이 맛은……!”
“맛있네요, 형!”
“우와…….”
셋 다 눈이 활짝 떠진다.
하하하.
나도 자랑스레 돈가스를 입에 넣었다.
음. 좋아.
눅눅하지만, 입안에 넣자마자 후추의 향과 튀김 냄새가 확 퍼진다. 고기는 쫄깃하면서 질기지 않아 씹는 맛이 좋고, 튀김옷은 고기에서 분리되지 않고 함께 씹힌다.
모양이 피키츄인 게 살짝 아쉬울 뿐 맛으로는 역시 최고다.
한 장씩 더 먹음으로써 플라스틱 통은 텅 비었다. 출출한 배가 달래져서인지 다들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슬슬 시작하죠.”
가시거머리는 현재 우리처럼 배가 부른 상태.
소화가 끝나기 전까지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을 것이다. 우린 그 빈틈을 노려 녀석을 등 껍데기에서 꺼내야 한다.
아저씨에게 라이터를 빌리고, 근처에서 나뭇가지를 모았다.
나뭇가지는 두 종류. 젖은 것과 마른 것으로 나누어 모으는 게 중요하다.
불을 피울 땐 마른 가지를 사용.
빠르게 큰불로 만들었다. 그다음 나뭇가지 하나하나에 불을 붙여 등 껍데기 주위로 던졌다.
곧 등 껍데기를 빙 둘러싼 불의 고리가 완성.
가시거머리는 주변이 불바다가 됐음에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 불길이 크지 않기 때문일까?
확실히 이 정도의 불길은 금방 꺼질 것이다.
불이 타오를 때 서둘러 젖은 나뭇가지를 집어넣었다. 그러자 불의 고리는 엄청난 연기를 뿜어내며 순식간에 등 껍데기를 가렸다.
“뒤로 물러서요. 이제 나올 거예요.”
대부분의 생물에게 연기는 참기 힘들다. 특히 연기가 습하고, 뜨겁다면 더욱 고통스럽다. 여기엔 가시거머리도 예외가 아니다. 놈이 거북악어의 등 껍데기를 뒤집어쓴 채 싸운다면 우리에게 승산이 없다. 그러니 무조건 밖으로 꺼내야만 한다.
우와.
내가 지시를 하고 있다!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정말 생각해 본 적 없는데…….
막상 닥쳐 보니, 생각보다 할 만하다.
하도 많이 지켜봐서 그런가?
옛말에도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했으니, 사람인 난 훈장님이 된 셈이다. 물론 그동안 개처럼 일한 건 덤.
다음엔 무기로 회초리를 써 볼까?
호규에게 정글도를 준 다음, 내 손에 들린 것은 조명탄 발사기.
안에는 조명탄 하나가 장전되어 있다. 발사기와 조명탄은 무기로 분류하지 않지만, 자체 성능만 놓고 보면 훌륭한 살상력을 지니고 있다.
일단 발사기에서 사출되는 힘만으로도 충분히 나무판자 정도를 관통할 수 있다. 사람이 맞으면 뼈가 부러질 위력이 있고, 또한 조명탄에 맞을 경우 내부의 화학물질로 인해 명중한 목표물 자체를 태워 버릴 수도 있다.
쉽게 말하면, 다운그레이드 된 소이탄이라 보면 된다. 이는 어떤 상황에서든 불꽃을 피워 자신의 위치를 알려야 하는 조명탄의 필요성에 따라붙은 성능이다.
“저기 아저씨…….”
불안감에 아저씨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모두 긴장하는 중에 갑자기 말을 건 날 보며, 아저씨는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설마 이 상황에서 뜬금없이 키스해 달란 건 아니겠지?”
제가 아무리 상대가 없어도 아저씨랑 하겠습니까?
“그게 아니라……. H력 좀 나눠 주실래요? 만약을 위해서요.”
“오호. 알았다. 키스로 나눠 줄까?”
이 상황에 농담이라니……!
대범하달까, 지독하달까. 물론 저급하단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