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화
020화
일단 굴욕적으로 웃었다.
조루호의 힘, 분명히 전해졌다!
H력이 몸 안에 스며든 게 느껴진다. 하지만 극히 소량.
극히 짧은 접촉 시간 때문일까? 아니면 조루호가 극단적으로 조절하고 있는 건가?
아프다.
손등에 구멍이 뚫린 것 같다. 피가 흐르고, 통증에 살이 떨린다. 하지만 아프고 괴로울수록 웃는다. 그리고 어금니가 깨질 정도로 악다문 입꼬리를 올린다.
괜찮아, 할 수 있어. 이제 절반이야!
그렇게 스스로 달랜다.
조루호는 내 눈을 피해 탁자를 바라봤다.
아직 내 손등이 탁자에서 떨어지지 않은 상태.
보란 듯이 힘을 줘 손을 떼어낸다. 그리고 손등을 돌려 조루호에게 보인다.
“후우.”
조루호의 입에서 한숨이 나온다. 내 손등은 탁자와의 충돌로 엉망진창, 너덜너덜하다 못해 뼈가 보일 정도다.
조루호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제 그만두시죠.”
“기권하는 겁니까?”
내 질문에 조루호는 할 말을 잃었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내 자신이 참 답이 없다.
철없는 어린애의 생떼보다 무서운 ‘철든 어른의 아집’이다.
조루호는 망설였다.
그것은 동정, 내 손등에 대한 걱정이었다. 더욱이 자신이 내 손등을 상처 입혔단 사실이 더욱 심란할 것이었다.
후후후, 내가 원하던 바다.
“다음!”
호기롭게 손등을 털어 피를 튀겼다.
핏방울 몇 개가 조루호에게 튀어 조루호의 흰옷에 붉은 꽃을 피운다.
조루호는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탁자에 팔을 올렸다.
아지랑이는 계속 피어오른다.
일곱 번째 팔씨름.
역시나 또 조루호의 승리다. 그러나 이번엔 마음이 약해진 조루호의 팔이 내 손등을 천천히 누른다.
H력이 전해 오는 상태라면 이렇게 오랫동안 승부를 내는 게 좋다.
여덟 번째, 아홉 번째, 그리고 열 번째.
계속 내 손등을 염려한 봐주기가 계속된다. 하지만 내 눈치 때문인지 능력 발동은 유지.
조루호의 이마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역시 그렇구나.
겨우 팔씨름 몇 번에 땀이 난다는 것은 조루호에게 슬슬 무리가 오고 있단 증거.
조루호의 약점이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내 오른손도 상황이 좋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다음!”
“그만두시죠. 그 손으로 더 이상 팔씨름을 했다간 오른손을 영영 못 쓰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어! 계속해!”
팔을 세워 조루호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조루호는 미간을 찌푸리며 순순히 손을 잡았다.
지금 조루호는 심적으로 많이 괴로울 것이다.
약자를 괴롭히는 기분, 누군가를 진정으로 파괴하는 느낌. 제정신이라면 이런 게 즐거울 리 없다.
“이길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왜 고집을 부리시는 겁니까?”
“포기할 수 없으니까!”
“의지만으로는 넘을 수 없는 벽도 있습니다.”
이젠 설득하는 건가?
나도 모르게 피식 소리가 새어 나온다.
“네가 자신의 어려움 때문에 헌터를 포기했다고 해서 다른 사람도 그럴 거라 생각하지 마!”
조루호의 두 눈이 커지며 얼굴이 붉게 변했다.
정곡을 찌른 모양이다. 창백한 얼굴이 분노로 물들자, 무슨 사과가 익어 가는 걸 보는 것 같다.
분노로 조절이 안 된 H력은 용솟음치듯 쏟아져 조루호의 온몸을 뒤덮었다.
조루호가 금방이라도 내 목을 졸라 버리는 환상이 보인다.
“김상팔 씨.”
무거운 음성이 탁자를 가로지른다. 냉정한 녀석이 정색을 하니, 정말 차갑다.
“장난은 정도껏 치십시오.”
“난 항상 진심이야. 그쪽이야말로 그만 도망치고 현실을 직시하지 그래? 언제까지 이런 시골에 숨어 지낼 생각이지? 평생 사슴 밥이나 주면서 살 거야? 천재로 컴백할 건지, 영원히 조루로 남을 건지는 당신 선택이야. 난 당신이 천재로 돌아올 거라 믿어. 조루호 씨.”
기죽지 않고 차분히 맞선다. 애초에 상대를 무시한 쪽은 내가 아니라 조루호 쪽이다.
열한 번째.
조루호는 여전히 H세포의 힘을 쓰면서도 이번엔 쉽사리 승부를 내지 않았다.
“이유가 뭡니까?”
똥줄 타며 끙끙거리는 와중에 조루호가 물었다.
“이유?”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지극히 당연한 질문.
어쩌면 가장 먼저 나와야 할 이야기.
“난 어릴 때부터 헌터가 되고 싶었어. 내게 있어 헌터는 세계를 지켜 주는 수호자이자, 영웅이었거든. 하지만 고등학생 때 받은 H세포 검사에서 내겐 헌터의 자질이 없단 걸 알게 됐지. 그 뒤론 방황의 나날이었어.”
조루호는 화가 좀 누그러지며 내 이야기에 집중했다. 물론 그러면서도 팔에 준 힘은 조금도 풀어지지 않았다.
“난 당신이 가진 고민이 뭔지 정확히 몰라. 하지만 어렴풋이 짐작이 가. 당신한텐 당신 나름대로의 고민이 있을 거야. 천재라는 이름의 무게, 주변의 시선, 그리고 책임감과 죄책감. 하지만 난 이렇게 말하고 싶어.”
내 말에 너무 몰입하다 못해 살짝 얼까지 빠진 조루호의 얼굴.
참 멍청하게 잘생긴 얼굴이다.
“어리광 부리지 마! 그딴 배부른 고민 따위도 감지덕지할 사람이 세상에 넘쳐! 나도 그랬었지.”
“그랬었다?”
조루호의 중얼거림이 끝나기 무섭게 나도 숨겨 둔 발톱을 드러냈다.
H세포 대 H세포.
온몸에 힘이 넘친다!
조루호는 내 몸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에 입을 쩍 벌렸다.
“당신…… 어떻게…… 아니, 그전에…… 어째서?”
“왜? 난 이러면 안 돼? 나같이 별 볼일 없어 보이는 놈이 이런 힘을 가진 게 놀라워?”
기울던 팔이 조금씩 일어섰다. 조루호는 내 능력 발동에 놀라 제대로 반격하지 못했다.
“이상하군요. 분명 평범한 육체일 텐데…….”
처음으로 내 의지로 조루호의 팔을 밀어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승부에 조루호는 정신을 되찾았다.
“당신…… 정상이 아니군요.”
어느 쪽을 말하는 거야? 몸? 아니면 정신? 난 지금 양쪽 모두 비정상인데?
“지지 않아!”
랭킹 1위.
어렴풋이 꾸었던 꿈.
지금 그것이 내 손아귀에 쥐여진 것 같았다.
조루호는 사시나무처럼 떠는 내 팔을 바라봤다.
내 오른팔은 이미 한계의 상태. 상처도 상처지만, 너무 과도한 힘이 실려 있다.
조루호의 눈동자가 번뜩인다.
그것은 결심. 뭔가 각오를 굳힌 눈이다.
조루호는 입술을 깨문 채 과격한 몸놀림으로 내 팔을 꺾어 버렸다.
열한 번째 패배.
내 피가 콸콸 쏟아졌다.
조루호는 내 손을 탁자에 처박은 것으로도 모자라, 내 팔을 나뭇가지 꺾듯 부러뜨렸다.
“읍, 으으으윽……!”
H세포의 회복 능력을 뛰어넘은 고통.
심장이 한 번 뛸 때마다 핏줄기와 함께 말할 수 없는 통증이 넘쳐난다.
눈물과 콧물이 흐르고, 눈앞이 흐려진다. 너무 강렬한 쇼크. 지독한 고통에 온몸의 신경이 녹아내린다.
“그만두죠. 이런 걸…… 대결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이 자식!
애써 괜찮은 척 왼손을 들어 보였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아직 한 손 남았어. 마무리 지어, 남자답게!”
조루호는 단숨에 탁자 위로 상체를 뻗어 내 멱살을 잡았다.
우리는 서로 붉게 물들며 말없이 서로를 노려봤다.
“제길…….”
먼저 시선을 돌린 쪽은 조루호였다.
하하하. 처음으로 이겼다.
눈싸움이지만…….
“소중한 동료가 저 때문에 하마터면 죽을 뻔했습니다. 전 천재가 아닙니다. 전 불량품입니다. 제 몸은 3분 이상 H력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랬군. 역시 그런 거였어!
조루란 별명은 그래서 붙은 건가.
팔씨름은 길어야 수십 초. 지금쯤이면 슬슬 한계일 것이다.
“능력을 쓰지 않고도 싸울 수 있잖아?”
“일반인을 상대로는 싸울 수 있겠죠. 하지만 헌터로서는 다릅니다. 천재라는 이름은 언제나 저에게 극한을 요구했습니다. 기대에 찬 시선, 의지하는 동료, 피가 낭자하는 상황. 저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모 아니면 도. 업계에서 도망치던지, 갈 때까지 가던지 둘 중 하나였죠.”
“하하하…… 켁켁…… 쿨럭…….”
비웃음, 그리고 고통에 의한 기침이 뒤따른다.
오른팔이 점점 차갑게 느껴지며 감각이 사라져 간다.
“난 말이지. 어떻게든 이 업계에 남아 있으려고 별짓을 다 했어. 보조 헌터란 이름으로 짐꾼, 미끼, 하인, 카메라맨까지 했지. 모욕을 당해도 좋고, 수입이 적어도 좋아. 그래도 난 헌터가 좋으니까.”
조루호는 갑자기 자신의 옷을 찢어 내 오른팔을 지혈하기 시작했다.
야, 좀 늦었어. 할 거면 좀 진작 해 주지…….
병 주고, 약 주냐?
조루호의 손길을 뿌리치며 이번엔 내가 왼손으로 조루호의 멱살을 잡았다.
“난 당신이 필요해! 이젠 나에게도 기회가 왔어. 나도 제대로 된 헌터가 될 수 있다고. 난 포기 안 해. 수모를 당하든, 죽임을 당하든 상관없어. 그게 내 꿈이야! 난 나와 함께 최고가 되어 줄 사람이 필요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니, 머리가 어지럽다. 안 그래도 오른팔 때문에 기절할 것 같은데, 거기에 혈압까지 떨어지니 정말 죽을 맛이다.
그래도 할 말은 끝까지 하자.
“조루호, 난 네가 필요해.”
조루호는 자조적인 표정을 지었다.
“구급차를 부르겠습니다. 치료술을 할 수 있는 병원으로요.”
조루호가 내 왼손을 풀려고 하자, 난 더욱 힘을 줘 조루호에게 매달렸다.
“아직 승부는 나지 않았어! 난 아직 포기하지 않았어. 자, 계속하자고!”
조루호는 울먹이는 눈으로 날 끌어안았다.
“이제 그만하세요, 제발…….”
음, 이거 왠지 내가 자해 공갈단이 된 것 같네.
조루호의 손길과 따스한 말에 갑자기 졸음이 몰려왔다.
역시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인가?
안 돼…… 아직…… 지금은 안 돼…….
허무하게 쓰러져 탁자에 고개를 처박는다.
귓가에 들리는 조루호의 외침.
날 부르는 건가? 짜식, 되게 다급하네. 점점 귀도 안 들리게 된다. 죽는 건가? 야, 이제 시작 좀 하려니까 죽는 거야?
아……아…….
***
“드세요.”
루호가 건넨 사과 조각을 받아 입에 넣었다.
아삭아삭한 게 제철이 아님에도 참 맛이 좋다.
현재 내가 누워 있는 곳은 조물주 의원의 1인실.
루호와의 팔씨름 중 과다출혈로 혼절, 그 뒤 입원하는 신세가 되었다. 원래는 다른 병원에 입원하려 했는데, 어떻게 알고 나타난 아저씨에 의해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
입원한 지 오늘로 사흘째.
팔에 깁스한 채 풍요로운 생활을 하고 있다.
배고프면 밥 주고, 더러워지면 옷 주고, 어두우면 재워 주는 시간들.
덕분에 내 몸은 너무 과도하게 건강해지고 있었다.
루호는 내가 입원한 뒤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와 간호를 해 주고 있다.
서로간의 호칭은 ‘상팔 형’과 ‘루호.’ 사흘 전 팔씨름 대결은 어물쩍 넘어갔지만, 본래 목적은 훌륭히 완수했다.
지금 루호는 팀원으로서 열심히 내 수발을 들고 있다.
음, 팀원 한 명당 팔 하나라…….
‘하이퍼맨’이나 ‘반도의 자식들’ 정도 되는 규모로 팀원을 모집하려면 내가 몇 번을 죽어야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