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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드헌터 김상팔-18화 (18/250)

018화

018화

암컷인지, 새끼인지 사슴 머리에 뿔이 없다.

사슴은 개집에서 나와 마당 입구에 서서 날 노려봤다.

꼭 개처럼 낯선 이를 경계하는 것이다. 하지만 무미건조한 눈과 침묵으로 일관하는 태도가 그보다 훨씬 위협적으로 다가온다.

일단 조심스레 사슴에게 다가갔다.

사슴은 날 피하지 않았다.

“우쭈쭈쭈, 착하지?”

사슴에게 손을 내밀었다.

사슴을 개 취급하는 게 좀 기분이 묘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해야 할 것 같다.

사슴은 천천히 주둥이를 뻗어 손 냄새를 맡았다.

사슴의 콧김이 느껴지며 온기가 전해진다.

오오. 이게 바로 교감!

어린이동물원에서나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왠지 기분이 좋다.

사슴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갑자기 입술을 올리며 길고, 날카로운 이빨들을 드러냈다.

야, 너 풀 뜯어 먹는 애가 왜 송곳니가 있니?

너 무늬만 사슴이냐? 혹시 사슴이 아니라 고라니인 건가?

참고로 수컷 고라니에게는 긴 송곳니가 있다.

“차, 차, 착하지? 차, 차, 차…….”

사슴은 천천히 몸을 뒤로 당겼고, 그것은 금방이라도 뛰어든다는 것을 의미했다.

엥?

사슴은 벌떡 몸을 일으켜 두 발로 섰다. 그리고 앞발을 주먹처럼 휘둘러 발굽으로 내 양쪽 볼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라이트급 복서의 재빠른 잽.

사슴의 연속 잽에 쉴 새 없이 고개가 도리도리한다.

이, 이게 무슨…….

발굽 동물의 필살기인 뒷발차기에 비해 형편없는 위력이지만, 대신 기분이 더럽다.

“멈춰, 백구!”

집 안에서 들려온 목소리.

사슴의 잽이 즉시 멈춘다.

사슴은 잽싸게 본래 있던 개집으로 들어갔다.

저거 혹시 개가 사슴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는 건가?

“들어오세요.”

날 불러 준 목소리에 감사하며 순순히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으로 들어가는 날 향해 사슴이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집 안은 외형만큼이나 깔끔했다.

대부분 스테인리스와 유리로 이루어진 가구들.

바닥엔 먼지나 얼룩 하나 없다. 마치 막 지은 새집 같다. 집 안 어디서도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손님은 간만이군요.”

흰색 가운, 정확히는 환자복에 가깝다.

그것 외엔 특별히 몸에 걸친 게 안 보인다.

단정하게 정돈된 머리는 가운만큼 잡티 없는 흰색. 하지만 그 아래 얼굴이 너무나 아름다워 잠시 정신을 뺏겼다.

마치 밤하늘에 뜬 달빛으로 조각한 것 같다. 특히 눈빛은 얼음처럼 차갑고, 분위기가 깊다.

“앉으시죠.”

조루호는 자신이 앉은 소파의 맞은편을 권했다.

일단 조루호의 지시에 따라 공손히 소파에 앉았다.

소파의 쿠션은 그다지 푹신하지 않은 촉감.

분위기 탓인지 발목 아래로 한기가 느껴지는 듯하다.

“무슨 말씀을 하러 오신 건지는 짐작이 갑니다.”

응?

난 아직 말도 안 꺼냈는데…….

“죄송하지만 돌아가 주시죠. 전 이제 사냥 따위 하지 않습니다.”

“이유를 들어 봐도 될까요? 앞날이 창창하던 분이 왜 갑자기…….”

“그걸 왜 당신한테 이야기해야 하죠?”

조루호의 얼음장 같은 태도.

말 속에 날이 서 있다.

“저기, 과자 같은 건 없나요?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려면 뭐 좀 씹을 게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설마 손님을 그냥 이대로 쫓아내진 않겠죠? 물 한 잔도 안 주고 쫓아내는 겁니까?”

“뻔뻔하군요.”

응, 그래요.

조루호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어딘가로 향했다. 그리고 금방 작은 쟁반에 과자를 담아 왔다.

“잘 먹을게요!”

“그것만 드시고, 가 주시죠?”

포장을 뜯고 과자를 입에 넣었다. 버스를 오래 탄 탓에 마침 배가 출출하고, 걸어오느라 살짝 지쳤던 상태였다.

이런 때에 달달한 과자는 그야말로 꿀맛.

과자가 입에 넣자마자 녹아서 사라진다.

“같이 먹어요! 엄청 맛있네요.”

권해 받은 과자를 반대로 원주인에게 권하는 뻔뻔함!

조루호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아까보단 훨씬 사람답군.

조루호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쟁반에 담긴 과자를 몽땅 먹어치웠다.

이럴 땐 한술 더 뜨는 게 최선이다.

어쩔 테냐!

“어때요? 조금은 대화할 생각이 드셨나요?”

조루호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나랑은 말하기 싫단 건가?

그래도 경찰을 부른단 소릴 안 해서 다행이다. 아마 자존심 때문이 아닐까 싶다.

직접 쫓아낼 수 있는 상대에게 그런 말은 하는 것은 헌터로서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아까부터 계속 절 무시하는데, 제가 누군지는 아시나요?”

일단 조루호의 흥미를 끄는 게 급선무.

어떻게든 대화의 물꼬를 터야 한다. 있는 척, 없는 척을 총동원해서라도 반드시 조루호가 날 다시 보게 할 것이다!

“알고 싶지 않습니다.”

“제 이름은 김상팔이라고 합니다. 제대로 인사드리죠, 조루호 씨.”

“알고 싶지 않습니다.”

“한돈 아저씨께서 그쪽을…….”

“알고 싶지 않습니다.”

“그럼…….”

“알고 싶지 않습니다.”

빙산.

지금 내 앞에 거대한 빙산이 서 있다.

이 산을 넘어가지 못하면 원하는 곳에 다다를 수 없다.

“그건 그렇고, 요즘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

“알고 싶지 않습니다.”

아오!

그냥 내 이야기를 안 듣고 있는 것 아니야?

이 자식, ‘눈에는 눈, 이에는 이’란 거냐? 내가 무대포로 나온다고, 너도 무대포로 나오면 어떻게 하냐!

“그러면 저랑 내기할래요?”

“알고 싶지 않…….”

“지면 당장 여길 나가서 두 번 다시 조루호 씨 앞에 나타나지 않겠습니다.”

조루호의 말을 자르며 재빨리 내 용건을 전달했다.

자신이 말이 끊긴 조루호는 다소 불쾌한 얼굴. 하지만 내 제안이 솔깃한 듯하다.

“뭐죠? 그 제안이?”

좋았어! 제기랄, 해냈다! 한 발짝 내디뎠어!

춤이라도 추고 싶다. 하지만 아직 안심해서는 안 된다.

이제 고작 한 발짝,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그런데 뭐라고 둘러대지?

그냥 나온 대로 지껄인 건데…….

생각해라! 내 머리야, 너만 믿는다!

“그건 말이죠…….”

일단 말을 흐렸다. 그리고 재빨리 눈알을 굴려 조루호와 조루호의 주변을 살폈다.

최대한으로 조루호에 대한 정보를 긁어모아야 한다!

우선, 조루호 본인.

흰머리와 더불어 얼굴이 어둡다.

처음 봤을 땐 분위기가 있다고 느꼈지만, 차분하게 보니 뭔가 병색이 보이는 것 같았다.

복장, 그리고 집 안 상태로 봤을 때 조루호가 아프단 사실이 더 확실해진다.

그다음, 조루호에 대한 사전 정보.

키워드라 할 만한 것은 사슴, 조루, 초대박 신인, 그리고 짧은 활동 기간.

사슴은 아까 집 앞에 있던 걸로 퉁 치고, 나머지 셋으로 생각해 보자.

짧게 활동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건 바로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루호는 업계에서 주목받던 젊은 천재.

고작 6개월의 활동 기간 동안 거의 보통 헌터의 5년과 맞먹을 일을 해냈다.

경력에도 크게 오점이나 이상이 없고, 함께 사냥을 한 헌터들에게도 평판이 좋다.

이런 대단한 재능을 지닌 사람을 좌절시킬 만한 게 뭐가 있을까?

아마도 그건 ‘건강’일 것이다.

우습게 들리겠지만, H세포의 치료술로도 치료할 수 없는 병이 있다.

만약 조루호가 어떤 병에 결려서 요양 중이라면?

하지만 이러면 모순이 발생한다.

왜 조루호는 자신이 아프단 사실을 밝히지 않는 걸까?

아마 나 말고도 조루호를 영입하러 온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만약 조루호가 정말로 이런 사람들이 귀찮다면 왜 솔직히 밝히지 않는 걸까?

“너무 뜸을 들이지 마시죠.”

흠칫.

조루호가 미간을 찌푸린다. 하지만 여기서 밀리면 안 된다. 이럴 때일수록 오히려 더 세게 받아쳐야 한다.

“하하하. 좀 조급하시군요. 하긴, 조루호 씨가 절 두려워하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제가 너무 배려가 부족했군요.”

“뭐라고요?”

조루호의 어깨 위로 아지랑이가 일었다.

애송이!

조루호의 인상만큼이나 살벌한 능력 발동.

그래, 바로 이거야.

그 대단하신 조루호의 능력을 보고 싶다고! 하지만 아지랑이는 이내 사라져 버린다.

뭐지?

왜 능력 발동을 중단한 거지? 집 안이 엉망이 될까 봐?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

혹시…….

한 가지 가설이 떠오른다. 하지만 확실하진 않다.

만약 내 생각 맞는다면…… 크윽…….

설사 내가 만신창이가 되더라도 확인해야만 한다.

마주 보고 앉은 소파 사이의 탁자.

넓은 면이 유리가 아닌 스테인리스 소재다.

흠, 산 넘어 산이군.

“남자답게 팔씨름 어때요?”

내 목적은 어디까지나 조루호의 영입.

조루호가 다치거나, 내가 다치면 아무 소용이 없다.

팔씨름은 역량 파악에 용이하면서 크게 무리하지 않아도 되는 승부. 또한 내가 자연스럽게 조루호와 몸을 접촉할 수도 있다.

“좋습니다.”

조루호의 순순한 대답.

좋았어!

조루호는 소파에서 내려와 탁자 앞에 자리를 잡았다.

날 향해 뻗은 오른팔. 하지만 난 소파에서 엉덩이를 떼지 않는다.

잠시 고민하는 척하면서 슬슬 시간을 끌었다.

조루호의 진면목을 보려면 최대한 분노하게 만드는 게 제일.

조루호의 눈치를 살피며 쐐기를 박을 최상의 타이밍을 쟀다.

“어……어……어…….”

지금의 내 모습은 스스로 생각해도 참 무례하다.

평소의 나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지만, 이 모든 건 작전. 그만큼 조루호의 가치를 인정하고, 영입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언제까지 ‘어’만 하실 겁니까?”

“어……어……어…….”

방금 전 내 심정을 조금 맛보게 해 주고 싶다.

일방통행인 문답이 얼마나 짜증나는지 한번 당해 봐라!

“진지하게 승부할 마음이 있기는 한 겁니까?”

“어……어……어…….”

조루호의 불만이 노골적으로 얼굴에 드러난다.

슬슬 운을 뗄까?

“어……. 하하하. 그럼 끝장을 보실까요?”

태연하게 소파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조루호를 똑바로 바라보며 오른 팔꿈치를 탁자 위에 올렸다. 하지만 손을 맞잡으려는 순간 조루호가 손을 빼며 물었다.

“끝장……이라니요?”

아아.

마이크 테스…… 아니지, 목청 테스트!

자, 이제부터 약을 팔아 보자.

다소 딱딱하더라도 성의를 섞어 진심을 전하는 게 중요하다.

“들어 보시죠. 오늘날 헌터 협회 한국 지부와 국내 사냥 업계는 계속 침체된 상태를 이어 가고 있어요. 왜일까요? 그 이유는 한국 지부가 부패하고, 업계는 업계대로 인재가 부족하기 때문이에요. 실력은 있지만, 인성이 떨어지는 헌터. 뇌물을 밥 먹듯 먹는 지부. 지부의 비리를 눈감아 주는 관료. 이 삼박자가 오늘날 한국의 위상을 깎아 먹는 주범이죠.”

조루호의 눈살이 스르르 펴졌다. 하지만 여전히 눈빛에 경계심이 섞여 있다.

“협회에서 정한 랭킹에 들어가지 못하면 실력이 있든, 없든 출세할 수 없어요. 그래서 다들 랭킹과 순위에 목숨을 걸죠. 문제는 정작 헌터의 본분인 사냥은 뒷전이 되어 버렸단 거예요. 랭킹이란 게 결국 협회가 자기들 마음대로 정하는 거니까요. 여러 차례, 순위 결정 요인의 공개 요구를 거부하는 건 다 뒤가 구리기 때문이죠.”

사냥 업계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부분에 대해선 이견이 없을 것이다.

특히 젊은 헌터 사이에서 이러한 불만은 극에 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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