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7화
017화
주문은 아메리카노 두 잔, 당연히 계산은 내가 했다.
우리는 이목이 닿지 않는 구석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래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야?”
“뭘, 까, 요?”
아저씨는 뒤통수를 긁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알았어. 돈 말하는 거지?”
아저씨는 배낭 속을 뒤져 흰 봉투 하나를 꺼냈다.
천사백이 든 것 치곤 두께가 매우 얇지만, 원래 겉보단 속이 중요한 법.
“여기.”
아저씨가 봉투를 내밀었다.
공손히 두 손으로 봉투를 받아 내부를 확인했다.
“안 떼먹었어.”
아저씨의 말처럼 안에는 수표가 들어 있다.
수표는 난생처음 만져 본다.
이런 건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상상 속의 물건인 줄 알았는데…….
감동이 밀려온다.
천만 단위가 세 장.
응?
왜 세 장이지? 천사백일 텐데?
내 이상을 눈치챈 아저씨는 코끝을 손가락으로 긁었다.
“끌끌끌. 천사백은 내가, 나머지 천육백은 최향자가 준 거야. 네가 한 사람 몫을 아주 톡톡히 했다고 말하더군. 그래서 자기 몫에서 일부 뗐다고 하더구나.”
최, 최향자! 향자 누나! 누님!
역시 그냥 입만 더러운 사람이었어!
‘알고 보니, 좋은 사람’ 패턴!
매일 아침마다 걸레로 양치질을 해도 이렇게 마음씨가 고우시다니……!
난 내가 싸운 걸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다 보고 계셨구나! 아아.
아저씨는 어깨를 으쓱였다.
“자. 그럼 이제 이걸로 우리 볼일은 끝난 거지? 그럼…….”
아저씨는 의외로 신속히 자리를 뜨려고 했다.
할 말이 많은 난 재빨리 아저씨를 붙잡았다.
“잠깐만요.”
“왜?”
“이걸로 끝이에요? 그냥 이게 다예요? 뭔가 더 해 주실 말씀 같은 거 없으세요?”
아저씨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없는데? 나한테 넌 그냥 실험체 A거든. 무슨 할 말? 혹시…….”
아저씨는 다시 자리에 앉아 내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네가 나한테 요구가 있는 거 아니냐? 한 번 높은 경지를 밟아 보니, 또 밟고 싶은 거겠지?”
순간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딱히 그럴 생각이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저씨의 말을 듣자 갑자기 마음속에서 뭔가 꿈틀거린다.
이게 뭐지?
“괜찮아. 원래 사람은 모두 다 개자식인 거야. 다 자기 자신을 위해 일을 벌이지. 끌끌끌.”
아저씨는 목소리를 낮추며 내게서 머리를 뗐다. 그리고 단숨에 자기 앞에 놓인 아메리카노를 들이켰다.
“크아! 역시 맛없어. 도대체 이딴 걸 왜 돈 주고 사 먹나 몰라. 이거 그냥 커피콩에다가 물 탄 거잖아?”
그냥 커피콩에 물 탄 거면 커피가 아니라 ‘콩물’이라 부르겠죠?
다음엔 그냥 미숫가루를 사 드려야겠네.
“그래서 뭘 하고 싶은데?”
“그게…….”
사실 아저씨에 대해선 잘 모른다. 하지만 아저씨와의 첫 만남, 부탁, 도움, 실력으로 볼 때 실력 있는 헌터였음이 분명하다.
내가 배우고, 가르침을 받아야 할 상대인 것이다.
“정식 헌터가 돼서 팀을 꾸려 보고 싶어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동료가 되어 주실래요?”
음, 좀 뜬금없나?
아저씨 입장에서는 매우 실례되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어떤 사정으로 헌터 일을 쉬고 계신지도 알아야 한다.
“흐음…….”
아저씨는 팔짱을 낀 채 입을 다물었다.
만나고 난 이후 가장 심각한 얼굴이다.
그래도 고려는 해 주시는 건가?
혹시 몰라 살짝 기대해 본다.
“흐음, 하긴 네 덕에 약의 효능을 알 수 있었느니…… 조금은 내가 손해를 봐도 되겠지…….”
“그러면?”
“단, 한 가지 조건이 있어.”
“좋아요. 뭐죠?”
일단 대답해 본다.
아저씨가 요구한 일 중에 쉬운 일은 하나도 없었지만, 반대로 헛수고였던 일도 없었다.
“협회에 팀을 등록하려면 적어도 3명 이상이어야 하지. 나 말고 남은 한 사람은 결정했나?”
“아니요. 일단 정식 헌터 자격부터 따고 천천히 할 생각이었어요. 아저씨는 왠지 지금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갑자기 아저씨 입가에 미소가 만발한다.
음, 저 환한 얼굴을 보니까 불길해지네.
“그럼 내가 한 사람 추천할까? 만약 네가 그 녀석을 팀원으로 끌어드릴 수 있다면, 나도 기꺼이 네 팀에 들어가마. 끌끌끌.”
누굴까?
아저씨가 눈여겨본 사람이라면 보통 인물이 아닐 것이다.
“누군데요?”
아저씨는 배낭에서 수첩 하나를 꺼냈다.
때가 묻고 투박한 검은색 표지.
옆면의 종이 색이 다 바랬으니, 꽤 오래된 물건인 것 같다.
아저씨는 수첩에서 한 장을 뜯어서 내게 건넸다.
“이 녀석.”
난 흥미롭게 메모를 받아 읽었다.
이름, 조루호.
나이, 23.
주소는, 교외 지역이다.
거주 구역 끝자락인 걸 감안할 때 뭔가 사정이 있는 것 같다.
어린 나이에 전원생활은 쉬운 결정이 아니다. 더구나 정식 헌터라면 더욱 의아스럽다.
조루호가 사는 곳은 사냥 구역에서 먼 곳.
홀로 헌터 일을 한다고 가정해도 너무 멀다.
즉, 아저씨처럼 지금은 헌터 일을 쉬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첫 데뷔는 정확히 20살이었지. 그때만 해도 초대박 신인이라고 불린 녀석이야.”
초대박 신인?
음, 그럼 내가 모를 리 없는데…….
이름을 보니, 뭔가 떠오르는 게 하나 있다.
“다른 별명으로는 ‘조루’라고 불렸지. 사실 그쪽이 더 유명했을걸?”
그래. 그 녀석이다. 조루!
3년 전에 꽤 입소문을 탔던 신인 헌터. 하지만 엄청난 기대를 받았던 것과 달리 1년도 못 가 업계에서 모습을 감춘 천재.
동료 여자 헌터에게 망신을 당해 숨어 버렸단 소문이 꽤 오랫동안 돌았었다.
소문이란 게 원래 자극적인 법이기도 하고, 딱히 아는 사이도 아니었기에 딱히 신경 쓰진 않았다.
“서로 잘 아는 사이이신가요?”
아저씨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까딱였다.
“아니. 작년에 한 번 스친 게 다야.”
엥?
딱 한 번? 겨우 한 번 보고 팀원으로 삼자고?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아저씨의 안목이라면 믿어도 될지 모른다.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럼 제가 이 사람을 팀원으로 삼으면 아저씨도 들어오시는 거죠?”
“당근이지!”
말밥이군.
“그런데 아저씨는 왜 H세포에 관한 약을 만드시는 거죠? 이런 대단한 약을 만들 정도면 뭔가 제약회사나 연구시설과 관련이 있으실 것 같은데요?”
아저씨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저씨 얼굴이 어째 밝다. 내 입장에선 꽤나 무거운 질문인데, 아저씨는 아닌가 보다.
“충분히 나올 만한 질문이군. 음, 뭐라고 해야 하나? 그냥 취미생활로 퉁 치면 될까?”
뭐요?
그런 엄청난 약을 만들어 놓고 ‘그냥 취미생활’이라고요?
“그건 그냥 나 혼자 만든 거야. 시설이나 재료는 아는 사람한테 얻어 쓴 것이지. 학자는 아니지만, 내가 원래 호기심이 많거든. 이런저런 일을 벌이기 좋아하지. 그러면서 사람도 사귀고, 재미도 좀 보고……. 님도 보고, 뽕도 따는 거지.”
뭔가 이상하다.
아저씨의 얼굴 어딘가가 부자연스럽다.
혹시 거짓말? 아니면 사실을 말하기 껄끄러우신 건가?
억지로라도 파내고픈 오기가 들지만, 은인인 아저씨에게 무례를 끼치고 싶지 않다.
“‘꿩 먹고, 알 먹고’라는 거죠?”
“그게 그거지. 너 은근히 깐깐하게 구는구나. 너 친구 별로 없지?”
“아저씨는요?”
하하하.
아저씨와 난 천장을 향해 큰소리로 웃었다.
잠시 후 소리에 놀란 점원이 주의를 주러 자리로 찾아왔고, 우린 점원에게 사과했다.
“재미있는 놈이구나.”
“아저씨도요.”
“어린놈의 자식이……! 끌끌끌.”
아저씨는 자리에서 일어나 배낭을 잡았다. 그리고 무거운 배낭만큼 무거운 몸을 이끌고 무겁게 가게를 나갔다.
홀로 남은 난 남은 커피를 홀짝이며 향후 계획에 대해 생각했다.
그동안의 내 인생, 앞으로의 내 인생.
보조 헌터로서의 삶은 차곡차곡 내 안에 쌓여 있다.
이제 그걸 풀어서 세상 앞에 내보이면 된다. 하지만 밑바닥에서 올라가는 것은 순탄치 않다.
그건 밑바닥을 기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안다. 어쩌면 그나마 난 운이 좋은 편일지도 모른다.
헌터의 삶이란 늘 생과 사의 경계선을 걷는 일.
무기력한 보조 헌터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사전 정보 수집과 눈치뿐이다.
남은 커피를 원샷.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를 나갔다.
화창한 햇살이 머리 위로 내리며 눈이 부시다.
하늘을 올려다보기 위해 손으로 눈 위에 그늘을 만든다. 그리고 문득 손바닥을 보면서 생각한다.
내가 정말 할 수 있을까?
“랭킹 1위라…….”
***
도로 옆에 뜬금없이 지어진 모텔에서 걸어 나오다가 아는 사람과 마주쳐 민망해하는 불륜커플.
나무 위에서 도토리를 까다가 자신에게 덤벼든 작은 뱀과 혈투를 벌이는 청설모.
끝없이 솟은 푸른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려다가 송전탑에 부딪쳐 도로 추락하는 까치.
무선 드론을 날리며 놀다가 졸지에 드론 배틀을 시작해 기어코 상대 드론을 추락시켜 폭발시킨 동호회 회원들.
세상은 요지경 속. 혹은 개판 5분 전이다.
정상인 척하면서 비정상이거나, 비정상이면서 정상이거나…….
창문에 고개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한가한 버스는 교외를 달리고 있었다.
버스가 정거장을 지날 때마다 승객들이 하나둘 내렸다. 마침내 버스에는 나와 운전기사 단둘뿐, 버스가 종점에 도착했다.
버스 기사가 ‘내리세요.’라고 알려 줬다.
산과 들이 내뿜는 상쾌한 냄새. 역시 공기는 시골이 좋다.
“아자! 힘내자!”
정신을 차리는 의미에서 휴대전화에 저장한 조루호에 대한 정보를 읽었다.
조루호.
23세.
헌터로 활동한 기간은 약 6개월. 장래가 촉망되던 초대박 신인. 하지만 의문의 이유로 활동을 중단, 현재는 이곳에 내려와 은신 중이다.
아직까지도 많은 이들이 아까워하는 다이아몬드 원석.
지금도 수많은 팀에서 합류를 권하고 있지만, 모두 거절한다고 한다.
급변하고 새로운 사람이 물밀듯 쏟아지는 사냥 업계에서 이렇게까지 지속적으로 주목받는 일은 드물다.
[이름 : 조루호 / 성별 : 남 / 나이 : 23세]
[힘 : 30 / 속도 : 40 / 지구력 : 10 / 기술 : 70 / H력 : 70 / 기타 : 80]
신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높은 수치다.
내 것과 비교하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
약도를 따라 시골 마을에 들어섰다.
마을 중앙에 놓은 팔각형 정자에는 많은 어르신들이 모여앉아 늦은 점심을 먹고 있었다.
역시 시골은 이래야지.
그때 정자에서 누군가가 날 향해 소리쳤다.
“젊은이다!”
어느 할아버지의 함성.
그것을 시작으로 정자 위의 시선이 모여졌다.
“명절날 자식들도 안 오는 이 시골 촌구석에 젊은이가 오고 있어?”
“어쩌면 간첩일지도 몰라! 다들 전화기 꺼내서 111누르라고!”
“아닌 것 같으이. 또 루호네 가는 거겠지.”
이렇게 열렬한 시선을 받는 건 대학교 발표 수업 이후로 처음이다.
그때는 그래도 아는 사람들이 쳐다봤는데, 이렇게까지 모르는 사람의 주목을 받으니 뭔가 쑥스럽다.
어르신들의 뜨거운 시선을 받으며 마을 가장 안쪽에 있는 2층집으로 향했다.
누가 봐도 마을의 다른 집들과는 이질감이 느껴지는 건물.
그냥 거대한 직사각형처럼 보이기도 한다. 왠지 미래 배경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생김새다.
마당도 직사각형.
한쪽에는 비단잉어가 노니는 사각형의 인공 연못이, 다른 한쪽에는 흰 사슴이 개집에 엎드려 있다.
“사슴? 그것도 알비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