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5화
015화
진짜 버려지는 거야? 이런 배은망덕한 연놈들 같으니!
여전히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어떻게든 내가 여기 있단 걸 알리지 않으면 진짜 버려질 판이다.
내 눈엔 너희가 보이는데, 너희 눈엔 내가 안 보이니?
박유화가 최향자에게 귓속말로 무어라 하는 게 보였다. 그러자 최향자의 시선이 내 쪽으로 향했다.
오오! 박유화 님! 드디어 절 발견하신 겁니까요? 어서 절 구해 주십시오. 안 그러면 죽을 때까지 원망하겠습니다! 죽을 때까지 얼마 안 남아서 원망을 많이 못 하겠는 게 흠이지만…….
장마리도 날 바라봤다. 그리고 최향자에게 물었다.
“제가 업을까요?”
“아니. 치료는 끝났어. 가서 깨워.”
박유화가 손뼉을 치며 지껄였다.
“발로 차도 돼?”
저 악마!
최향자는 거기에 한술 더 뜬다.
“그래도 안 일어나면 오줌이라도 갈겨.”
무슨 언 발 녹이냐? 난 사람이야. 아직 시체 아니라고!
박유화가 가까이 오자 부릅뜬 눈으로 반겼다. 그러나 소용없는 짓.
박유화는 능청스럽게 말했다.
“보조 헌터 아저씨? 보조 헌터, 아, 저, 씨! 일어나세요. 얼른!”
일어났잖아! 이 간신배, 역적 같은 계집애!
박유화는 킥킥거리며 발로 내 옆구리를 툭툭 찼다.
내가 축구공이냐? 나 갖고 독수리 슛이라도 쏠 거야? 아니면 허깨비 슛이나 총알 슛?
점점 차는 세기가 강해진다.
“일어나라니까? 왜 이렇게 안 일어나는 거야?”
너, 내가 못 일어나는 거 알면서 그러는 거지? 내가 이렇게 두 눈 똑바로 뜨고 있는데, 나한테 무슨 억한 심정으로 이러는 거야?
‘어? 정신은 들었는데, 왜 못 일어나지?’가 나와야 정상 아니야? 너 사실은 그냥 내가 쭉 못 일어나길 바라는 거지? 그런 거지?
박유화의 장난이 폭행이 되어 갈 때쯤 장마리가 다가와 박유화를 말렸다.
“그만해.”
“에엥? 조금만 더 하면 안 돼?”
안 돼! 안 된다고! 내가 죽는단 말이야!
“안 돼.”
“너무해.”
네가 제일 너무해!
박유화는 풀이 죽어 일행 쪽으로 떠났다. 장마리는 나와 눈을 마주치며 고맙게도 말을 걸어줬다.
“혼자 일어설 수 있겠어요?”
아니요.
여전히 목소리가 안 나온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눈을 깜빡이는 것뿐, 부정의 표시로 눈을 한 번 크게 깜빡인다.
다행히 장마리는 내 말을 알아들었다.
“이젠 정말 가야 해요. 제가 업어 드릴게요.”
오, 하늘이시여. 감사하옵니다. 이런 칙칙한 동굴 속에 천사를 보내 주셨군요.
장마리는 손쉽게 날 업었다.
여자한테 업히려니 왠지 좀 쑥스럽다. 하지만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다.
장마리의 꽁지머리가 걸을 때마다 흔들려 콧잔등을 간지럽게 했다.
모두들 철수를 시작했다.
이번 사냥은 상당한 희생을 감안하더라도 꽤 성공적이라 할 수 있다.
6급 동굴에서 서식하는 놈이니, 아마 협회에서 주는 현상금도 몇 억은 될 것이다. 거기에 드래건에게서 채취한 부속물을 팔면…….
나한테 떨어지는 돈도 상당할 게 분명하다.
원래 보조 헌터는 정식보다 절반 이하를 받는 게 일반적. 그러니 죽은 헌터들 몫을 감안하면 최대 천?
아무리 짜도 몇 백은 될 것이다. 월 백만 원이 고작인 내 평소 수입을 생각하면 눈물 나게 고마운 금액이다.
정식 헌터들이야 몇천만씩 받아도 치료비, 검사비, 수리비, 구입비, 구인비 등으로 상당 부분 돈이 나간다.
그런 것을 감안하면 차라리 내 쪽이 더 속 편할 것이다.
한돈 아저씨한테 한턱 톡톡히 내야겠다.
음, 어쩌면 내 몫을 좀 떼어 드려야 하나?
아저씨한텐 받아야 할 돈도 있으니, 그래도 상관없을지 모르겠다.
철수는 순조로웠다.
우리는 동굴 산을 나와 정문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죽은 이들을 기리며 일동 묵념.
그 후 짧은 작별인사와 함께 각자의 차량에 올라탔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도 여전히 내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다행히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건 그것대로 문제였다.
망할 박유화가 날 갖고 논 것이다.
그것도 고통에 신음하는 날!
“하하하! 이것 봐, 언니!”
박유화는 내 옆구리를 집요하게 찔러 댔다.
처음엔 간지러움에 폭소, 그러나 극에 달한 감각은 즉시 통감으로 변한다.
고문 아닌 고문.
정신이 아늑해질 정도의 혼란이 머리를 가득 채운다.
두고 보자, 박유화! 다른 건 몰라도 이건 꼭 되갚아 주겠어!
묵묵히 운전 중인 최향자는 백미러를 통해 날 쳐다봤다.
“김상팔이라고 했지?”
최향자의 물음에 즉시 박유화의 손짓이 멈췄다.
확실히 최향자의 카리스마는 대단하다. 그리고 처음으로 내 이름을 불러 주니 감격이 북받쳐 오른다.
최향자는 아주 짧은 눈웃음 뒤 눈살을 찌푸렸다.
“영상을 어떻게 하든 그건 네 자유지만, 하난 분명하게 짚어 두겠어.”
영상?
아! 내가 촬영한 것?
다행히 손전등 모양 캠코더는 장마리가 잘 챙겨서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고인에 대한 예의는 지켜. 안 그러면 내가 손수 네 불알 두 쪽을 뗄 거야.”
이때만큼은 내 몸이 움직였다.
다리가 절로 움츠러들며 사타구니를 보호.
장하다, 내 몸이여! 태초로부터 내려온 XY염색체의 본능!
그 뒤 최향자는 묵묵히 운전, 장마리는 피곤에 지쳐 잠이 들었다. 그리고 박유화는 밴에서 내릴 때까지 날 고문하며 즐겼다.
내 몸이 마비에서 풀린 것은 밴에서 내리고 나서 한 시간 뒤.
박유화는 그 한 시간 동안 길거리에서까지 날 괴롭혔다. 어떻게 보면 최향자와 장마리가 떠나고 끝까지 날 지켜봐 준 것. 하지만…….
그래도 너무했다.
한동안 옆구리에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을 것 같다.
너 때문에 옆구리 불감증이 걸려 버렸어, 내 옆구리 책임져!
검은 과부들.
검은과부거미가 모티브겠지만, 이름대로 정말 무시무시한 경험이었다. 이번 사냥으로 많은 것을 배우고, 생각하게 됐다.
이걸로 큰 한 걸음을 내디딜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줄곧 뒷걸음질만 쳤으니 이젠 크게 도약할 때다!
그 전에 우선 보고부터.
휴대전화를 꺼내 한돈 아저씨에게 전화를…….
응? 뭐, 뭐지?
갑자기 뭔가 머릿속에서 떠오른다.
기억?
무작위로 뭉쳐진 아주 짧은 시간.
그것들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다른 사람의 기억인 듯하다.
주인은 누구지?
검은 탱크톱과 검은 가죽 바지.
살짝 앳된 느낌을 가진 여성의 기억이다.
“설마?”
괴력을 쓰는 여성.
여성은 웬 괴물 하나를 요절낸다.
어디서 많이 본 움직임인데?
시각과 청각, 그리고 촉감까지 뭉개지며 기억의 정체가 그 실체를 드러냈다.
“엇?”
죽은 괴물의 뱃가죽이 터지며 그 속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분명 사람의 형상.
여성이 소름을 느끼는 감각이 고스란히 나에게까지 전해졌다.
뭔가 오싹한 기분.
여성은 전신으로 H력을 보내 대비했다.
배 속에서 나온 형상은 여성을 보면서 목을 왼쪽으로 90도 꺾었다. ‘우드득’ 소리와 함께 형상의 머리와 목이 T자 형태가 되면서 형상의 모습이 똑바로 드러났다.
꼭 공포 영화 ‘엑소시슈트’의 주인공 같다.
‘아, 젠장. 들켜 버렸네? 키키키…….’
긴 눈매의 실눈, 눈만큼이나 길게 찢어진 입이 묘한 미소를 짓고 있다.
붕대 틈으로 드러난 얼굴은 창백했고, 체형은 비쩍 말라 길쭉했다.
만약 본을 떠서 가면을 만든다면 할로윈이나 호러 영화에 어울릴 법한 기분 나쁜 얼굴.
얼굴 아래 목부터는 온몸에 붕대를 감았지만, 외모나 체형으로 볼 때 남성인 것 같았다.
‘키키키, 만나서 반가워.’
남성은 손을 흔들었다.
‘누구지?’
기억의 주인인 여성이 공격 자세를 취하며 남성에게 물었다. 남성은 잠시 딴 곳을 보면서 머리를 긁다가 한숨처럼 대답했다.
‘알려 주기 싫은데?’
남성은 목을 원래대로 세우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남성의 어깨, 그리고 가슴의 붕대가 울룩불룩 울렁이기 시작했다.
남성은 가슴을 어루만졌다.
‘자자, 조금만 진정하자고? 키키키, 답답한 건 나도 마찬가지거든.’
여성은 주먹을 내보이며 다급하게 외쳤다.
‘정체를 밝혀! 안 그러면 제압하겠어.’
‘너무 그리 까칠하게 굴지 말자고? 이건 어때? 난 그냥 여기서 떠나고, 넌 남친이랑 저 괴물 새끼를 가지고 가는 거야. 님도 보고, 뽕도 따고. 키키키!’
남친? 누군가가 또 있나? 하지만 시야엔 보이지 않는다. 시야 밖에 있나?
‘그러기 싫은데? 내가 원래 남자 말은 잘 안 듣거든? 네 정체나 밝히시지?’
여성의 끈질긴 질문에 남성은 또 딴 곳을 보면서 인상을 썼다.
‘역시 말귀를 못 알아듣는군.’
뒷목으로 흐르는 한줄기 땀.
여성이 느꼈던 촉각의 기억까지 생생히 전해졌다.
호흡이 가빠진다.
실눈의 남성은 여유로운 척 느긋하게 행동했지만, 자기 혼자 날뛰는 가슴부터 기분 나쁜 미소까지 수상쩍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럼, 하는 수 없지.’
남성은 결정을 내린 듯 고개를 돌려 다른 방향을 쳐다봤다. 그리고 얼굴 넓이만큼 길게 찢어진 남성의 입에서 다음과 같은 말이 나왔다.
‘일단 2급으로 해 볼까?’
남성이 입을 오물거리자 가슴에서 꿈틀거리던 것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가슴과 목이 출렁거리더니, 양 볼이 잔뜩 부풀어 올랐다.
남성은 발아래 동그란 구슬 같은 것들을 토하듯 뱉어 내고는 손으로 입 주변을 닦았다.
‘키키키!’
동그란 구슬들이 금이 가면서 안에서 기어 나온 것은 손가락만 한 크기의 애벌레였다.
하얀색 구더기 같은 형태에 주둥이는 뻥 뚫려 안쪽에 믹서기 같은 이가 촘촘히 박혀 있었고, 검은색 외눈이 주둥이 바로 위에 박혀서 주변을 감지하는 중이었다.
애벌레들은 태어나자마자 주인과 적을 구별하는 듯했다. 그것들은 주인의 명령을 받아들여 천장을 향해 점프했다.
작은 몸집이라곤 믿어지지 않는 엄청난 점프력은 순식간에 바닥에서 천장까지 닿았다.
‘이 녀석들, 작다고 무시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육지의 피라냐라고 불리거든.’
통통 튀던 애벌레들이 돌연 몸을 날려 누군가를 덮쳤다. 그러자 여성은 크게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었다.
여성을 통해 기억을 보던 내 시야에 피가 튀겼다.
누군가 당한 건가?
분노로 인해 여성의 H력이 끓어올랐다.
여성에게도 애벌레가 몰려왔다.
적어도 20마리는 넘을 수의 애벌레가 한꺼번에 덤벼들었다.
여성은 몸을 뒤로 날리며 가장 앞에 있는 한 마리를 주먹으로 때렸다.
빠른 주먹에 애벌레가 톡하고 터져 버리면서 몸 안에 돋은 이빨들이 마구잡이로 주먹 표면에 박혔다.
여성은 주먹 끝에서 따끔한 것을 느꼈다.
‘주먹으로? 재미있군.’
남성은 흥미로운 눈으로 여성의 저항을 관람하고 있다.
애벌레들이 차례차례 터져 죽을 때마다 애벌레들의 이빨이 여성의 양 주먹에 파고들었다.
개중에는 여성의 몸에 달라붙어 살갗을 파먹는 데 성공한 녀석도 있었지만, 그것도 한 입이나 두 입.
여성은 즉각 반응해서 애벌레들을 처리했다.
애벌레가 모두 형체도 알아보지 못하게 당했을 때쯤 여성의 H력이 뚝 끊겼다.
여성은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그대로 양손으로 바닥을 짚고, 무릎을 꿇었다.
‘키키키! 아주 좋아. 훌륭한 싸움이었어.’
남성은 여유롭게 다가와 여성 앞에 섰다.
여성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힘을 쥐어짜내며 어떻게든 일어서려고 했지만, 몸과 H력이 한계인 상태였다.
아무리 힘을 줘도 몸이 그것을 거부했으며 근육이 자기 혼자 이완돼 축 늘어졌다.
‘네가 약한 거니까, 원망 말고 죽어라. 뭐, 금방 죽진 못하겠지만……. 키키키!’
남성의 입이 쩍 벌어지며 그 안에서 애벌레 한 마리가 슬금슬금 기어 나온다.
애벌레는 군침을 흘리며 여성을 향해 점프.
여성은 차마 그 모습을 똑바로 볼 수 없어 눈을 감았다.
기척으로 느껴지는 애벌레와의 거리는 불과 10cm.
여기서 기억이 끊겼다.
“이건 분명…… 최향자?”
최향자의 기억이 왜 나에게? 그리고 이건 무슨 기억이지? 언제야? 천하의 검은 곰이 왜? 그래서 위기에서 빠져나온 건가? 남친이 있었어? 그 남자는 또 뭐야? 이건 뭐야?
머리가 어지럽다.
그래, 일단 아저씨랑 상의해 보자. 한돈 아저씨라면 뭐라도 말씀해 주시겠지.
떨리는 손으로 아저씨의 전화번호를 누른다.
기억의 여파 때문인지 손가락이 천근만근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