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4화
014화
남은 사람은 캠코더로 이 모든 걸 찍는 나뿐이다.
“여기까지인가…….”
갑자기 안구에 습기가 찬다.
젠장, 이렇게 끝나는 건가?
이렇게, 이런 곳에서, 이런 죽음을 맞이하려고 태어난 건가?
나도, 나도 H세포가 있었다면…… 그랬다면 적어도 발버둥이라도 할 텐데……!
아직 산탄이 남았지만 혼자선 아무 의미도 없었다.
놈이 과연 순순히 과녁이 되어 줄 리도 없고, 눈을 공격한다고 해도 더 이상의 피해를 줄 수 있을지도 요원하다.
놈은 괴물이지, 바보가 아니다.
회전의 후유증인지 드래건은 제대로 고개도 들지 못하고 있었다. 놈이 몸을 추스르기 전에 뭐라도 해야 했다.
최향자.
지금 나랑 제일 가까이 있으면서 가장 몸 상태가 양호한 헌터.
내가 최향자를 업고 방벽까지 가서 치료를 받게 하면 역전할 수 있을까?
아니. 불가능해.
자세히 보니, 드래건은 지금 여유를 부리고 있다.
정말 이를 악문다면 어지러움 정도로 주춤하진 않을 것이다. 처음 잠깐이야 그렇다고 쳐도 이렇게 지속적으로 비틀거리는 건, 심적으로 용납되지 않는다.
놈은 위협이 되는 헌터들을 모두 쓰러뜨렸단 통쾌함에 절대 해선 안 될 짓을 하고 있다.
조금 전 우리가 그랬듯이…….
내가 싸우는 건?
하하하. 그거야말로 미친 짓이다.
나도 한계다. 나도 지쳤다. 나도 할 만큼 했다.
그냥 혼자서 도망칠까?
하하하. 그건 못 하겠다.
이미 발목에 적지 않은 족쇄를 차고 있는데, 이젠 목에도 쇠사슬을 차라고?
악몽 속에 잠기는 건 사양하겠다. 난 잘 먹고, 잘 살자고 이 짓을 택한 것이다.
“으음…….”
최향자가 신음 소리를 냈다.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소리.
즉시 몸을 굽혀 최향자를 흔들었다.
“일어나세요! 제 목소리 들리세요? 최향자!”
최향자만 일어나 줘도 희망이 생긴다. 최향자와 힘을 합칠 수만 있다면 싸울 수 있다!
일어나세요, 용사…… 아니, 검은 곰이여!
안 일어나면 오늘 저녁은 드래건 배 속에서 먹게 될 거예요.
최향자의 눈꺼풀이 뜨였다.
만세!
최향자는 눈을 부릅뜬 채 날 올려다봤다.
“역시…… 남자는 믿을 수 없어. 늘 약해빠져선…… 멋대로…….”
최향자는 몸을 일으키며 대검을 들었다. 그러나 대검이 똑바로 세워지려는 순간 최향자의 입에서 피가 쏟아졌다.
안 돼!
최향자의 몸이 무너지며 또 바닥에 쓰러진다.
꽃을 피워 보지도 못한 봉오리가 떨어져도 이보다 안타까울까.
서둘러 최향자를 부축해 일으켰다. 그러나 최향자는 드래건보다 내가 더 싫은 눈치. 알 수 없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놔! 남자의 손길은 필요 없어. 그런 것 없어도 충분히…… 싸워…….”
최향자의 몸에서 또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몸도 제대로 못 가누면서도 무리하게 H세포를 끌어올리는 것이다. 그러나 한계란 언제나 냉혹하다.
아지랑이는 피어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끊겼다.
최향자는 힘겹게 내 멱살을 움켜쥐었다.
“싸워. 너도 남자라면, 증명해 봐! 남자라면…….”
또 피를 토한다.
바보 같은 여자.
도대체 무슨 사정이 있는 거야?
젠장, 젠장…… 난…….
최향자를 눕혀 놓고 대검을 주워 들었다.
무겁다. 너무나 무거운 검이다.
그런데…….
그런데 내가 한 손으로 대검을 들고 있다!
어떻게 된 거지?
그때 한돈 아저씨가 생각났다.
아, 이제야…… 이제야 발동된 건가?
그렇지만 어떤 능력인지 모르는데……!
지금은 딱,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최향자 같은 능력이면 된다.
힘.
모든 역경을 이겨 낼 수 있는 강인한 힘!
내 속의 나약함, 내 앞의 드래건, 이 모든 것을 이겨 낼 수 있는 힘!
내 의지를 관철하고, 내 존엄을 지킬 수 있는 힘! 힘!
내가 그렇게나 갖기를 소망했던 것, 내가 늘 갖지 못해 외면했던 것, 그러면서도 남몰래 갈망해 왔던 것!
최향자가 그랬듯이 내 몸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박제가 되어 버린 열정을 태워 활활 타오르는 것이다.
타올라라. 타올라라. 한 번만 더 타올라라. 한 번만 더 타올라 보자꾸나.
왜 내가 헌터의 길에 들었는지, 왜 내가 보조로 일하면서까지 이 업계에서 버텼는지, 이제 그 답을 알아보자!
대검을 양손으로 잡으니, 더 이상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내 몸의 일부 같다.
한 걸음 발을 내디딘다. 그리고 내 발바닥에 닿은 바닥이 움푹 깎이며 내려앉는다.
흙먼지는 일어나려다 풍압에 밀려 빠르게 아래로 퍼진다. 다리에서 느껴지는 짜릿함에 온몸이 경직된다.
드래건도 내 변화를 눈치챘는지 몸을 바짝 세운다.
그래, 마땅히 그래야지!
우린 서로를 마주 본다. 그리고 천천히 서로에게 다가간다.
녀석도 한계, 나도 한계다.
H세포란 게 막상 써 보니 체력 소모가 엄청나다.
앞으로 한 번. 딱 한 번이다.
대검을 높이 올린다. 그러자 드래건도 최고의 무기인 박치기 자세를 취한다.
인간의 무기와 괴물의 무기.
두 개가 서로를 노린다!
처음으로 기합을 지른다. 처음으로 괴물과 승부한다. 처음으로…….
헌터가 된다!
최향자의 대검이 드래건의 머리와 충돌.
서로의 견고함을 자랑한다.
처음은 서로 튕기며 아주 조금 멀어진다. 탄력과 경도의 자랑. 충격과 충격의 상실. 손가락에서 팔, 그리고 어깨를 통해 머리까지 놈의 모든 것이 전해진다.
지지 않아! 질 수 없어! 더 이상 피하지 않아!
곧장 다시 격돌, 마침내 자웅을 가른다.
비늘 가장자리를 깨뜨린 게 느껴진다.
거기서 한 번 망설임. 그러나 낯선 감각을 넘어서서 계속 나아간다.
대검이 머리 살점에 닿을 땐 알 수 없는 쾌감이 솟아올라 흥분을 주체할 수 없고, 드래건의 두개골을 가를 땐 환희에 벅차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뇌수, 체액, 피, 살아 숨 쉬는 놈의 모든 게 나에게 전해진다. 그리고 그 생명, 그 본능, 그 최후까지 하나하나 내 머릿속에 각인된다.
대검이 드래건의 머리를 수직으로 갈랐다. 정확히 머리 아래까지 향하는 검 끝, 드래건은 단말마 하나 없이 죽어 버렸다.
토막 난 부분처럼 신경이 살아남아 또 덤빌까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대검을 드래건의 목구멍에 꽂은 채 나도 뒤로 쓰러진다.
뒤통수가 바닥에 부딪칠 땐 찔끔 눈물이 났지만, 지금은 아픔보단 피곤함이 간절했다.
6급의 드래건.
결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닐뿐더러 하마터면 일행이 전멸할 뻔한 사냥이었다.
조금만…….
조금만 자자.
그렇게 다른 사람들처럼 정신을 잃었다.
***
살아남았단 사실에 기뻐하며 환호성.
사냥에 대한 것도, 돈에 대한 것도 잊은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꿈인가? 생시인가?
스르르 눈이 떠진다.
삶에 대한 감사.
서로에 대한 훈훈함이 동굴에 가득 차 있었다. 한데 모은 손전등과 랜턴이 동굴을 밝혀 눈이 부셨다.
응?
난 일행에서 좀 떨어진 지점에 홀로 누워 있다.
썅.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눈알만 간신히 굴리는 수준.
뭐야, 나 지금 버려진 거야?
이, 이보쇼. 이보쇼, 동료 양반들, 이게 뭔 대우요? 야, 이 자식들아! 목소리가 안 나온다. 젠장, H세포의 후유증인 건가?
열린 귓구멍으로 일행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시체는 각 팀에서 알아서 수습하는 걸로 하지.”
노구의 말에 오시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방벽 뒤에서 미리 준비한 박스형 아이스 캡슐을 꺼내 왔다.
사람을 박스에 담는다는 건 참 서글픈 일이다.
하이퍼맨과 빙신연맹은 죽은 동료들의 시체를 모아 아이스 캡슐에 담았다.
누가 누군지도 모르게 섞여 버린 살점과 뼈가 무심한 손길에 의해 옮겨졌다.
혹여 저 속에 드래건의 것이 있는 건 아닐까, 안쓰러울 뿐이다.
시체 담는 일이 끝나고 일행은 현실적인 문제에 집중했다.
가장 시급한 일은 역시 돈.
근데 나는? 난 정말 잊은 거냐? 혹시 나도 아이스 캡슐에 담긴 걸로 치는 거냐?
드래건을 잡는 것까진 좋았으나, 과연 이게 상품 가치가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일단 상단, 하단, 꼬리 끝으로 삼등분이 되었으며, 그중 하단은 완전히 망가지고 말았다.
상단도 머리가 반으로 쪼개지면서 상당 부분 소실. 꼬리 끝에는 큰 구멍이 뚫려 있다.
“이거, 근수로라도 받을 수 있을까?”
노구가 조심스레 말했다.
드래건을 먹을 수 있나? 그런데 먹는다고 해도 이런 지저분한 고기를 과연 사 줄까? 누가 씹다 뱉은 것 같은 상태일 텐데?
“그나마 멀쩡한 부위를 채집해서 가져가죠.”
오시오의 말에 모배구가 거들었다.
“눈 세 알, 혀, 비늘 몇 장, 그리고 내장과 뇌…… 할 수 있다면 척수도 빼 보죠.”
처, 척수까지?
이 사람들, 진짜 프로다.
최향자는 장마리와 박유화를 살피며 무심하게 말했다.
“돈은 걱정하지 마.”
최향자의 말에 잠시 고요가 흘렀다.
세상에, ‘돈은 걱정하지 마.’라니? 저런 멋진 말은 근래 처음이다. 아, 아니구나. 한돈 아저씨가 있구나. 그 아저씨는 잊을 만하면 생각나네.
하여간 참 미친 존재감이다.
“돈은 걱정하지 말라니?”
노구가 한결 밝아진 표정으로 물었다.
“이번 일은 의뢰를 받은 거야. 돈은 협회에서 받기로 했어.”
“오오!”
“역시 검은 곰!”
“최향자!”
일행은 모두 최향자를 우러러봤다.
“그럼 좀 쉬었다 갈까요?”
모배구의 질문에 최향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돼. 드래건이 이 동굴의 주인이긴 하지만 다른 괴물이 없으리란 법도 없어. 대충 쓸 만한 것만 챙겨서 나가야 해.”
“그건 검은 곰 말이 맞아.”
노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하이퍼맨을 다그쳤다.
“일어서! 쉬는 건 이제 충분해. 가서 드래건 시체를 한데 모으자. 해체 작업은 빙신연맹하고 최고의 최고가 할 거다. 우린 그동안 철수준비를 한다!”
“예!”
하이퍼맨이 드래건 시체를 한곳에 모으자 빙신연맹이 회칼 같은 것을 꺼내 필요한 것만 해체했다.
최고의 최고는 일행 사이를 돌아다니며 마지막으로 부상자를 치료, 검은 과부들은 하이퍼맨을 앞세워 방벽 철거를 시작했다.
“거기, 거기! 거기라고!”
박유화의 지적, 장마리의 감시, 최향자의 감독.
최악의 작업이다.
박유화는 그 밉다는 ‘말리는 시누이’의 양 뺨에 쌍싸대기를 날릴 만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하이퍼맨이 불쌍하다.
그런데 나는?
“거기라니까? 그건 부러뜨리면 안 돼! 저건 부러뜨려야 해! 거기가 아니라 저기, 저기가 아니라 거기! 그게 아니라 저거, 저게 아니라 그거!”
박유화의 지적이 이어진다.
공공의 적이 사라지니까, 다시 얄밉다.
역시 적의 적은 아군이 아니라, 그냥 적이다.
사방에 온통 적! 원래 인생이란 투쟁의 역사다.
“남자가 그거 하나 제대로 못 해? 그건 같은 것끼리 모아 놔. 앗, 뭐하는 거야? 그건 거기 두면 안 돼!”
저 사람들이 무슨 아바타냐? 왜 원격 조종하려는 거야?
아니지, 이미 조종당하고 있는 건가.
그런데 나는?
하나둘 철수 준비가 끝나가고 나 혼자만 초조해진다.
그런데 나는? 그런데 나는? 그런데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