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화
008화
길이 약 3m.
흔히들 채찍이라 부르는 물건. 내심 제대로 된 무기를 기대했는데, 실망이다. 보조 헌터를 하면서 나름 여러 무기를 잡아 봤지만 채찍은 처음이다.
“이건 정말로 망했다.”
이런 흐물흐물한 걸 어떻게 쓰지?
날 바라보는 이일의 시선이 따갑다.
“네 취향이냐? 아님 그걸로 목매달아 줄까? 히히히!”
이일은 고개를 꺾으며 새삼스레 몸을 풀었다.
표정은 이미 날 열 번은 더 죽은 것 같다.
“내가 적당히 할 거란 생각은 버리는 게 좋아. 난 한 번 눈이 뒤집히면 부모도 못 알아보거든.”
이일이 손을 주무르자 ‘우두둑’ 소리가 들렸다.
그냥 지금이라도 무릎 꿇고 사과할까? 그러면 열 대에서 다섯 대로 깎아 주지 않을까? 뒷목으로 식은땀이 흐른다. 폭력과 마주하는 일은 언제나 끔찍하다.
이젠 정말 이걸로 해 보는 수밖에 없다.
채찍은 어떻게 쓰는 거지? 일단 휘둘러야 하나?
손잡이를 흔드니 진동이 끝까지 전해지며 채찍이 꿈틀거렸다.
정말 이걸로 공격이 가능한 거야?
이일은 채찍을 흔드는 내 모습에 버럭 화를 냈다.
“이 자식, 장난도 정도껏 해라!”
이일의 우렁찬 고함이 벽에 울려 고막을 때린다.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
“죽여 버리겠어. 너 같은 쓰레기는 그냥 여기서 사라…….”
있는 힘을 다해 휘두른 채찍이 허공을 가르며 헤엄친다.
빠르게, 그리고 부드럽게 움직이는 채찍.
그 끝이 살아 있는 생물처럼 움직여 이일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묵직한 혓바닥을 휘감아 옴짝달싹 못 하게 붙잡았다.
당혹감.
우리는 만나고 나서 처음으로 한마음이 된 것 같았다. 혀를 휘감은 나도, 혀를 휘감긴 이일도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왜 안 빠지냐?
채찍을 당겨 어떻게든 혀에서 떨어뜨리려 했다. 그러나 당기면 당길수록 채찍 끝이 혀에서 떨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혀를 조이며 달라붙었다.
이일은 입에다 손가락을 넣어 혀와 채찍을 떼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과도하게 붙은 근육으로 인해 팔을 구부리는 것에 한계가 있었고, 평균 이상의 손가락 굵기에 세심한 동작이 불가능했다.
상황을 모르는 제3자가 본다면 그냥 구토를 하려고 입에다 손을 쑤셔 넣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눈에는 눈물이 고이고 이마엔 식은땀이 맺힌다.
벌려진 입에서 나오는 헐떡이는 숨소리.
처음엔 흥분으로 씩씩거리던 이일도 상태가 지속되자 태도가 바뀌었다. 이일은 옹알거리는 소리로 내게 부탁했다.
“싸려져.”
“뭐라고요?”
“싸려져. 제바. 내가 자모 해써.”
못 알아듣겠다.
지금 상황 때문이 아니라 진짜로 뭐라는지 모르겠다!
혓바닥이 정말 중요하긴 하구나.
“저도 놔드리고 싶긴 한데요. 이걸 놓으면 어떤 분이 절 열 대나 때린다고 했거든요.”
“아냐. 아 그애.”
이일은 혓바닥이 허락하는 한 최대한 크게 고개를 저었다.
이일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에 마음이 약해진다. 아주 쪼끔.
“그럼…….”
순순히 손에서 채찍을 놓았다.
채찍이란 본래 당기면 조여지는 물건.
푸는 방법은 느슨하게 하는 것뿐이다.
이일은 느슨해진 채찍을 조심스럽게 건드려 입에서 빼냈다.
겨우 채찍의 끝이 입 밖으로 나오고 쩍 벌려진 입안으로 퉁퉁해진 혀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럼 전 이제 가 봐도 되죠?”
슬며시 게걸음으로 골목을 빠져나가려 했다. 그러나 이일은 잽싸게 몸을 움직여 내 옆을 가로막았다.
“젠장!”
속 좁은 인간.
한 입으로 두 말 하냐?
이일은 내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아섰다.
입을 꼭 다문 모습이 참 졸렬하다.
이일은 흐뭇한 얼굴로 내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번개처럼 날아든 펀치.
눈 깜짝할 새에 내 몸이 날아가 골목 끝에 처박힌다. 처음 한두 번 맞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위력에 눈앞이 캄캄해진다.
“히히히!”
얼마나 세게 맞았는지 눈앞이 흐릿하다. 초점이 멀어지고 사물이 뭉개져서 보인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건 청각이 정상이란 것.
이일은 큰소리로 웃어 젖혔다.
“히히히!”
이젠 끝장이다.
뇌진탕이라도 일어난 건지 머리가 어지럽다. 이런 상태론 저항도 못 한다. 귓가에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 어쩌면 이게 내가 이승에서 듣는 마지막 소리일 것이다.
굽이 높은 구두 같은데…….
“응?”
구두?
소리가 점점 커져 온다.
오오. 누군가가 이리로 오고 있어!
시각은 아직 회복 중. 그래서 평소보다 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
이일은 자기 혼자 웃느라 아직 구두 소리를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다.
“뭐야?”
누군가 이일을 뒤돌아보게 만들었다. 뭔가 귀찮은 일을 감지한 이일의 목소리에 잔뜩 짜증이 섞여 있다.
“꺼져! 같이 맞기 싫으…….”
안면에 주먹이 직격으로 꽂히는 소리.
이게 이렇게 후련했나?
십 년 묵은 체증이 싹 내려간다.
바람이 불 정도로 강력한 펀치에 거구의 이일이 쓰러졌다.
“누구세요?”
초점이 맞춰지면서 이일을 밟고 있는 인물의 얼굴이 들어왔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지만 왠지 누군지 추측이 되었다.
검은 가죽 롱부츠, 검은 가죽 바지, 검은 가죽 탱크톱, 검은 가죽 재킷.
과도하게 어깨를 부풀린 재킷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머리가 작아 보인다.
물론 머리도 검은 생머리.
머리부터 발끝까지 블랙으로 깔맞춤이다.
이일을 쓰러뜨린 강력한 주먹, 한눈에 주변을 압도하는 외모.
결정적으로 눈빛!
당장에라도 날 찢어죽일 것 같은 시선이다. 살쾡이 같은 눈동자에 빨려 들어가 잡아먹힐 것 같다.
화장이 좀 진한 것만 빼면 딱히 흠잡을 데 없는 미모의 소유자였다.
최향자.
뒷골목 여자 깡패. 지옥에서 올라온 검은 마녀. 검은과부거미도 씹어 먹을 성깔머리.
소문으로 들은 ‘검은 곰’의 특징과 정확히 일치했다.
최향자는 날 내려다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겨우 이 정도 실력으로 우리 팀에 들어온다고 그랬어?”
아니요. 들어간다고 안 했어요. 그냥 보조로 한탕 뛴다고 했죠.
도대체 아저씨가 날 어떻게 팔아넘긴 건지 나중에 꼭 알아봐야겠다.
“한심하네. 이런 퇴물 하나 제대로 처리 못 하는 헌터라니…….”
최향자는 구두 굽으로 이일의 머리를 돌렸다.
흉하게 내려앉은 이일의 콧등이 곧 다가올 내 처지처럼 느껴진다. 아무리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어도 이일을 한 방에 보내다니, 역시 대단하다!
“한돈, 그 인간 부탁만 아니었어도 너 같은 놈을 받아 주는 일은 없었어!”
일단 받아 주는 거구나.
다행이다. 안도감에 가슴속에서부터 한숨이 새어 나온다.
“한돈이란 게 한손 아저씨죠?”
“그래.”
한돈이라면 그거 한우 비스무리 한 거잖아.
아저씨한테 딱 안성맞춤인 별명이긴 한데, 그래도 좀 너무했다.
그냥 대놓고 돼지라고 부르는 거랑 뭐가 달라?
최향자는 내 덜미를 잡아 단숨에 들어 올렸다.
오늘 참 여러 번 몸이 뜬다.
“일어서. 언제까지 그렇게 기어 다닐 셈이지?”
“놓아주시면 제 발로 설게요.”
“흥!”
툭 하며 몸이 다시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도 맞아서 이젠 떨어진 것 정도론 아프지도 않다.
툭툭 털고 일어나 최향자와 마주했다.
“안녕하세요. 김상팔이라고 합니다.”
“알아. 따라와.”
이 정도면 양반이네.
난 또 다짜고짜 두들겨 팰 줄 알았는데…….
최향자를 따라 골목을 나서자 도롯가에 세워진 검은색 바이크가 보였다.
흔히들 스포츠 바이크 혹은 R차라 부르는 오토바이.
한눈에 봐도 외제 고가품이다. 삼각형의 머리가 날렵해 보이기 그지없다.
최향자는 아무 말 없이 바이크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중립 상태에서 엑셀을 당기자 엄청난 굉음과 함께 뿌연 매연이 압력스팀처럼 뿜어졌다.
“우와.”
이런 바이크면 분명 자동차 한 대 값이겠지?
괜스레 마음이 설렌다. 그리고 최향자의 뒤에 타기 위해 다리를 올리려는데…….
“잠깐!”
“예?”
“넌 걸어와. 내 소중한 흑마에 남자를 태울 순 없어.”
“그건 좀…….”
말이야, 방구야?
자기는 오토바이 타고, 난 뛰어오라는 거야? H세포가 있든 없든 너무하잖아!
이상하게 날 구해 주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평범함의 범주를 초월한 것 같다.
올해 팔자는 정말 개 팔자구나.
“저기 보이지?”
최향자는 멀리 보이는 건물 꼭대기를 가리켰다.
“저기가 우리 사무실이야. 저기로 와.”
“그냥 태워…….”
최향자의 바이크에서 난 굉음이 내 말을 잘랐다. 그리고 소리와 함께 뿜어진 매연이 시야를 가렸다.
귀와 눈이 자유로워진 후 최향자와 바이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최향자가 가리킨 건물까지 도보로 30분.
먼지투성이의 옷을 털어 내며 걸어가기에 안성맞춤인 시간이었다.
깔끔한 외관의 상가 건물은 1층부터 갖가지 가게의 간판으로 가득했다. 불과 30분 거리에 정류장 주변은 인적이 뜸했건만, 이곳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나른한 오후, 한가한 주말.
평범하게 일상을 즐기는 사람들이 부럽다.
쇼핑을 하고 맛있는 것을 먹으며 보내는 즐거움.
보조 헌터로 일을 시작하면서 포기해야만 했던 것들이 눈에 밟혔다.
쥐꼬리만큼 적은 돈을 받으며 버텨 온 나날.
인정받지 못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버틸 수밖에 없던 고집.
평범해지기 위해 평범함을 포기한 셈이다.
참 답이 없다.
“아저씨한테 돈 받으면 제일 먼저 돈가스 사 먹어야지!”
미리 만들어 놓아 기름 범벅인 싸구려가 아닌 그때그때 튀긴 수제 돈가스를 먹어 본 지가 언제인지 모르겠다.
주머니 사정에 따라 입맛을 맞추다 보니 어느새 내가 정말 좋아하는 걸 잊어 가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로 6층에 도착.
이곳은 아래층들과 다르게 대부분의 가게가 헌터 전문이었다.
최향자의 사무실 찾는 것을 잊은 채 잠시 구경 삼매경에 빠졌다. 몇 년간 보조 헌터를 하면서도 한 번도 보지 못한 것들이 가득했다.
응급 치료 상자, H세포 보충제, 세포 활성 보조제, 무선 이어폰 형태의 고성능 무전기, 소형 연발 신호탄, 강철 섬유로 만든 밧줄, 원터치 텐트, 라이터 크기의 고출력 미니 토치, 하루 치 영양분이 든 칼로리 비스킷.
심지어 총까지 있다!
“총!”
무릇 총이라 함은 현대의 죽창.
‘너도 한 방, 나도 한 방’의 진정한 현신.
총기 전문점 유리창은 다른 가게보다 훨씬 두꺼웠다.
손으로 두드려 보니, 두께뿐만 아니라 코팅도 튼튼하게 된 것 같다.
가게 중앙에 놓인 구식 대포를 중심으로 권총, 소총, 기관총, 산탄총 등등 게임이나 영화에서만 보던 것들이 잔뜩 있었다.
“그러고 보니 사냥할 때 총 쓰는 사람을 본 적이 없네? 왜 다들 냉병기만 쓰는…….”
총기 아래 가격표를 보는 순간 모든 것이 이해됐다.
21세기엔 죽창도 돈 없으면 못 산다.
냉병기에 비해 하늘과 땅 차이의 금액.
역시 세상은 돈이 최고다. 정식 헌터들이야 H세포 덕에 초인의 반열에 들어가니 돈은 원하는 만큼 벌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제한적 총기 허가’란 특이한 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일단 원칙적으로는 여태까지 해 온 것처럼 ‘개인의 총기 소지 및 사용’은 불법. 그러나 정식 헌터의 경우에는 자동화기 이하의 총기를 자유롭게 소지 및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 총기를 눈에 띄게 가지고 다니거나, 길거리에서 쏘지는 않고 있다.
협회에서 총기의 사용은 사냥 구역 내부에서만 이루어지도록 단단히 교육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구경하면서 자연스레 최향자의 사무실을 찾을 수 있었다.
최대한 이목을 끌려는 가게들과 달리 사무실은 다른 의미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보였다.
“검은색에 환장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