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화
007화
간만에 열의가 솟았다. 그리고 그 열의는 최향자와 만나기로 한 약속장소로 가는 동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가는 동안 내 능력 수치를 확인.
[이름 : 김상팔 / 성별 : 남 / 나이 : 29세]
[힘 : 10 / 속도 : 10 / 지구력 : 10 / 기술 : 10 / H력 : 0 / 기타 : 10]
와아.
진짜 딱 일반인에서 조금 높은 수치네. 이러니, 만날 피똥을 싸지.
이 수치는 어디까지나 편의를 위해 지정된 것이라 수치만으로 판단하기엔 조금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힘이 10인 내가 힘인 5인 다른 사람에 비해 숫자는 2배일지언정, 실질적으로 2배나 강한 것은 아니다. 그냥 ‘더’ 강한 것이다.
맨 뒤의 ‘기타’ 수치는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 모르겠다.
***
검은 곰, 최향자.
여자 헌터 가운데 가장 호전적인 성격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소문이 워낙 많아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는 타입.
실력은 물론이고 겉모습만으로 웬만한 남자는 쫄아 버린다고 한다.
최향자가 이끄는 ‘검은 과부들’의 팀원들도 그 팀장만큼 무서운 소문이 많다.
상대 남자를 고자로 만들었다든가, 발가벗겨서 전봇대에 매달았다든가, 알몸 사진을 인터넷에 유포한다든가…….
하나같이 무시무시한 것뿐이다.
약속 장소로 가는 버스 안.
주말이라 그런지 버스 안은 사람으로 붐볐다. 따스한 날씨의 영향으로 버스 내 사람들의 몸에서 분비된 땀 냄새가 버스 안을 가득 메웠다.
“지독하다.”
서서 가는 1시간.
다행히 버스가 정류장을 거칠 때마다 사람의 수가 줄었다. 그리고 약속 장소 바로 전 정류장에서 한 남자가 버스에 올라탔다.
“앗!”
나도 모르게 그 남자를 보고 소리를 질렀다. 다른 승객들은 휴대전화를 보거나 딴 짓을 하느라 남자에게 무관심했다.
상처투성이 얼굴.
붕대를 감은 팔과 다리.
방송 중에 난입한 괴물이 상당히 강했던 모양이다.
바로 ‘무쇠주먹’ 이일이었다.
헌터 협회 한국 지부에서 정한 ‘헌터 랭킹 100인’이란 것이 있다.
국내에서 활동하는 수많은 헌터 가운데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
이 안에 드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부와 명성을 쌓을 수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정식 헌터의 세계.
나 같은 보조 헌터에겐 다른 세상 이야기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이일이란 헌터는 홀로 사냥하는 스타일을 고집하면서 한때 100인에 든 적 있는 실력자였다. 하지만 지금은 방탕한 생활로 인해 100위에서 밀려난 상태.
방송에서 이일이 한 만행이 생각나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강간범이다!”
나도 내가 잘못했음을 안다.
성추행범한테 강간범이라니…….
정말 못할 짓을 해 버렸다. 양심에 가책이 느껴졌다. 나도 내가 왜 개소리를 지껄인 건지 잘 모르겠다.
이건 흡사 강도한테 테러리스트라고 한 거나 다름없다.
강간범.
이 말에 버스 안 모든 이들의 시선이 이일에게 딱 꽂혔다. 그리고 몇몇이 이일을 알아봤다.
사람들의 입에서 도미노처럼 말이 튀어나온다.
“강간범이라고?”
“방송에 나온 이일이잖아?”
“방송에서 강간을 했다고?”
아니요. 강간은 안 했어요. 그냥 성추행만 했어요.
성추행이 성폭행을 지나 강간이 돼 버렸다.
제발 거짓을 퍼뜨려 주지 말아 주세요. 사실을 말해도 명예훼손인데, 이건 아주 날조잖아요!
정정당당하게 거짓과 날조로 승부하는 건가?
“강간범 이일이다!”
“저 사람이 강간범이야?”
“저 사람이 강간 전과 10범이래.”
“희대의 강간마라며?”
“저 사람, 여혐이래.”
“저 새끼 지명수배자야!”
“테러리스트가 버스에 탔다고?
아니야!
어떻게 이 좁은 버스 안에서 이렇게까지 와전되는 거야!
사람들의 조롱은 쉼 없이 이어졌다.
망했다.
이일의 분노는 전부 나에게로 향했다. 이일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고갯짓을 하며 따라서 내리라고 지시했다.
어차피 이번 정거장에서 내려야 하는 처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일의 팔 깁스 안에서 ‘우두둑’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일은 당장 눈에서 불이라도 뿜을 것 같았다. 사람들의 말소리에 최대한 점잖게 있었지만 바로 옆에 선 내 눈엔 본심이 훤히 보였다.
버스가 멈추고, 나와 이일은 버스에서 내렸다. 간절히 최향자의 모습을 찾았지만, 정류장 주변에는 인적 따위 없었다.
이일은 내 멱살을 잡아 그대로 거리 뒤편에 있는 골목으로 데려갔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두 다리가 땅에서 떨어져 별도리가 없었다.
인적이 없음을 확인한 이일은 냅다 날 막다른 골목에 집어던졌다.
이렇게 휘둘러지는 게 얼마만이지?
다섯 살 때 아버지가 놀아 주신 이후로는 처음인 거 같은데?
물론 아버지는 날 죽일 생각으로 던지진 않으셨다.
땅바닥을 구르며 골목 끝에 놓인 쓰레기통에 부딪혔다. 역겨운 냄새와 쓰레기가 몸을 휘감았지만, 충격이 심해 당장 일어서지 못했다.
이일은 팔다리에 댄 깁스를 빼며 몸을 풀었다.
이일의 몸 주위로 은은한 아지랑이가 보인다. 제길, 저놈이 날 아주 죽일 셈이네?
H세포를 전개해서 때리면 최소한 사망이라고!
“내가 왜 ‘무쇠주먹’이라 불리는지 알려 줄까? 난 말이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이 맨주먹 하나만 쓰거든? 그래서 이걸로 절대 일반인을 때리지 않아.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거든. 헤비급 복서나, 이종격투기 선수와 비슷한 처지란 말씀이지.”
응, 그래. 너 잘났다.
“만약 우리 헌터들의 능력이 스포츠에서도 허락됐다면, 기네스 기록 따윈 진작 갈아치웠을 거야.”
대신 일반인의 약물 사용이 합법화됐겠지.
이일은 골목에 놓여 있던 쓰레기통을 때렸다.
대형 수거함은 종잇장처럼 구멍이 뻥 뚫리면서 안의 내용물을 쏟아 냈다.
“제기랄, 어디다 좀 닦아야겠는걸?”
이일은 더러운 웃음을 지으며 더러운 주먹을 나에게 뻗었다. 그리고 내 셔츠에 손을 닦았다.
“안 그래도 기분 꿀꿀했는데, 잘 됐어. 오늘 네가 날 좀 즐겁게 해 줘야겠다. 원래 약한 놈은 강한 사람한테 맞으라고 존재하는 거야.”
이일의 주먹이 뺨을 스친다.
일부러 겁을 주기 위한 행동.
얼마나 빠른지 귓가에 바람이 느껴진다.
젠장, 달리는 자동차 창문에 고개를 내민 것 같다.
“이걸 정면으로 맞으면 어떻게 되는 줄 아냐?”
죽겠지.
백 프로 죽겠지.
안 죽으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모르겠는데요.”
이일이 장난삼아 주먹을 내 코에 댔다.
비겁한 놈.
때릴 거면 그냥 때리든가, 이 따위로 장난을 치냐?
한손 아저씨만도 못한 놈!
“히히히!”
결국 살짝 힘이 들어간 주먹이 복부에 꽂혔다.
그래도 꼴에 프로라고 힘 조절을 하는 게 참 가당치도 않다.
프로답게 굴 거면 처음부터 끝까지 잘 참든가, 이런 부분에서만 프로페셔널하단 게 참 부당하다.
복부 다음으로 뒤통수에 주먹이 내려왔다.
은하수.
그 이름은 참 가슴 벅차고 낯설게 느껴진다.
다이아몬드가 흐르는 강. 무수한 전등이 켜진 밤하늘의 커튼.
여러 가지 형태로 보이면서도 오랜 시간 이어질 단 하나의 존재!
그런 은하수가 벌건 대낮에 보이면 어떻게 된 일인 걸까?
어떤 일이긴 개뿔, 완전 엿 됐다!
눈앞이 핑핑 돌았다. 그리고 손가락, 발가락 끝이 저려 왔다. 하지만 이일의 주먹은 이제 막 시작이었다.
“그럼 지금부터 ‘무쇠주먹’ 님의 특별 레슨이다!”
이일의 경쾌한 올려치기가 턱에 적중.
턱뼈를 타고 올라온 충격에 머리칼이 쭈뼛 선다. 그나마 혀를 물지 않아 다행이다.
만약 혀를 물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이일의 주먹에 맞아 붕 날아갔다.
차라리 이대로 먼 곳에 떨어져 구조된다면 더 바랄 게 없다.
잠시 주변 상황이 보일 정도로 높이 뜬 몸은 지면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충격을 세게 받아서인지 코피까지 터져 나왔다.
급하게 소매로 코피를 닦고, 정신을 차렸다.
내가 떨어진 지점은 거대한 쓰레기 수거함 속.
녹색 쓰레기 봉지들 위로 처박힌 덕에 엉덩이가 까진 것 정도에 그칠 수 있었다.
“약한 놈을 괴롭히는 건 언제 해도 재미있다니까? 이봐! 어서 기어 나와. 안 그러면 내가 쓰레기통 채로 날려 줄까? 그쪽이 덜 지저분할지도 모르겠군. 히히히.”
푹신푹신한 오물더미 위에 앉아 있으니, 오묘한 감촉 덕에 안정감까지 든다.
비록 수거함 밖에 날 잡아먹으려고 버티고 서 있는 탱크톱 핫팬츠 근육 변태가 있지만, 그래도 아직까진 버틸 만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
지난 보조 헌터로서의 경력을 걸고, 저 오만방자한 근육 변태에게서 살아남아 주겠어!
살아만 있으면 내 승리.
사냥할 때랑 똑같아. 살아남는 쪽이 이기는 거야!
이일은 근접전 위주의 실력자.
근육의 상태로 봐선 힘뿐만 아니라 속도도 빠를 것이다.
일단 여기선 경찰에 신고.
그다음엔 경찰이 올 때까지 버티면 된다.
제까짓 게 공권력 앞에서 별수 있겠어?
“별수 있으면, 안 되는데…….”
헌터 중엔 경찰의 진압에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 부류가 있다.
만약 이일이 그런 상대라면 나에겐 최악이다.
경찰로도 안 되면 결국 헌터 협회에서 사람이 출동해야 하는데, 그건 너무 오래 걸린다.
“일단 신고를……. 앗?”
액정이 깨져 있다. 하긴 이런 상황에서 멀쩡하면 휴대전화가 아니라 무전기겠지.
도움을 청할 수 없다면, 끝장이다.
향년 29세. 참 볼품없는 인생이었어.
30은 채우고 죽을 줄 알았는데, 결국 여기까지구나. 하하하.
안녕, 잔인한 세상아.
수거함의 흔들림이 점점 심해지더니 갑자기 한쪽으로 기운다. 아무래도 밖에서 수거함을 통째로 들어 올린 모양이다.
일단 쓰레기를 잡고 버텼다.
45도, 90도, 135도.
기울어짐에 따라 자잘한 쓰레기를 시작으로 커다란 쓰레기 봉지까지 밖으로 떨어졌다.
이 미친놈, 아예 수거함을 뒤집을 속셈이다.
“으아아아…….”
어떻게든 떨어지지 않으려 애썼다.
쓰레기 봉지를 잡는 것으로는 한계.
쓰레기 수거함 안쪽 면 흠집에 손가락을 걸었다.
“껌 딱지처럼 달라붙었냐? 빨리 튀어나와라. 버티면 버틸수록 뒤가 험하다. 지금 나오면 열 대만 때리고 봐주마.”
열 대는 개뿔!
한 대만 제대로 맞아도 요단강인데?
헤비급 복서의 라이트보다 훨씬 강력한 펀치다.
정말 날 죽이려고 작정했구나.
각도가 점점 기우며 손가락이 수거함에서 떨어진다.
엄지, 검지, 중지, 약지…….
발버둥 치려 손가락을 움직이는 그때, 옆에 놓인 쓰레기 봉지들 사이로 뭔가 삐죽 튀어나왔다.
“이건?”
적갈색의 원기둥.
파충류의 비늘처럼 엇갈린 무늬가 촘촘히 이어진다.
소재는 질긴 면, 혹은 부드럽게 만든 가죽.
급한 마음에 일단 붙잡아 매달렸다. 그러나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쓰레기통에 버려져 있는 물건이 내 몸무게를 지탱할 리 없었다.
손에 잡힌 물건과 함께 수거함에서 떨어졌다.
“그건 또 뭐냐?”
이일이 어리둥절해 하는 사이 몸을 일으켜 손에 쥔 것을 확인했다.
“왜 이런 게 쓰레기 수거함에 있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