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화
005화
머리가 어지럽다.
“너무 그렇게 생각할 거 없어. 그냥 내가 소일거리 삼아 하는 거니까.”
아저씨는 주머니에서 손을 빼내 앞에 내밀었다. 그리고 손을 활짝 펴 손바닥 안을 보였다.
“이건……?”
아저씨의 손바닥에는 각각 다른 색의 알약이 놓여 있었다.
오른손에는 노란색, 왼손에는 초록색.
이거 표절 아니야?
원래는 빨간 약하고 파란 약이잖아!
“먹어, 걱정은 하지 말고. 그냥 간단한 테스트야.”
이건 누가 봐도 수상하잖아. 오백이냐, 목숨이냐의 선택인 건가?
이럴 줄 알았으면 공부나 열심……히는 개뿔!
공부는 아무리 해도 안 된다.
안 될 놈은 안 돼!
“그렇게 간단하고 안전한 테스트라면 직접 실험하셔도 되잖아요?”
뭐라고 대답하나 들어 보자.
조금이라도 당황하거나, 말을 얼버무리면 즉시 여기서 도망치자.
자, 어서 대답해라. 이 드워프 아저씨!
“내 몸으로는 실험할 수 없어. H세포가 없는 사람이 필요하거든.”
아하!
그렇구나.
그런 거라면…….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다. 이렇게 또 호구가 되는 건가? 하지만 포기하기엔 조건이 너무 좋다.
“약을 먹으면 일주일에 걸쳐 천천히 변화가 나타날 거야. 그걸 확인하게 해 주면 돼.”
아저씨는 밤거리로 시선을 돌리며 내 선택을 기다렸다.
사뭇 진지해진 아저씨의 얼굴을 보니, 조금은 안심이 된다.
“그럼…….”
난 덜컥 두 개의 알약을 모두 집어 입안에 넣었다. 내가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알약의 외관이 꼭 콩사탕처럼 생겨서?
“웩!”
하나는 오줌 맛이고, 다른 하나는 곰팡이 맛이다.
어떤 색이 무슨 맛인지는 생략한다.
이건 생체 실험을 떠나서 굉장히 기분이 더럽다.
내가 어떻게 오줌이랑 곰팡이의 맛을 구분할 수 있는 거지?
아저씨는 양손이 빈 것을 확인하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상팔이 자네, 꽤 욕심이 많군. 설마하니 천만을 꿀꺽할 줄이야.”
“네?”
혼나는 게 아니었어?
게다가 얼마……라고?
천만?
하나에 오백이니까, 두 개면 천만인 건가?
일주일에 천만이면 완전 횡재잖아!
감격스러워 눈물까지 고일 정도다.
아저씨는 내 어깨를 토닥였다.
“그럼 일주일 뒤에 보자고. 이건 내 명함이네. 일주일 뒤에 여기로 전화하게.”
아저씨는 선뜻 계약금이라며 그 자리에서 흰 봉투를 주셨다.
빳빳한 새 돈.
그것도 전부 오만 원짜리다. 갑자기 아저씨 얼굴이 꽃미남처럼 보이는 착각이 든다.
명함에는 ‘한손’이란 이름과 함께 주소와 집 전화번호가 있었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은 휴대전화 번호가 없다는 것. 그렇지만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다.
“그럼 다음에 보세, 상팔이. 아, 그리고 한 가지!”
아저씨가 갑자기 생뚱맞은 말을 한다.
“아까 그 건달, 그놈 말투가 가짜라는 거 아나?”
“예?”
정말 뜬금없다.
아니, 헤어지는 마당에 갑자기 웬 말투 타령?
“그놈 사투리, 그거 다 가짜야. 연기하는 티가 너무 나더라고. 알고 있었나?”
“아니……요.”
“그래? 하여튼 사투리에 대한 편견이 문제야! 표준어 쓰면서 나쁜 짓 하는 놈들이 얼마나 많은데…….”
아저씨는 고개를 저었다.
잠시 당황하다가 아저씨를 따라 똑같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그렇게 고개를 저으며 헤어졌다.
“들어가세요.”
90도 인사.
아저씨는 저 멀리 사라진다.
참으로 이상한 밤이다.
며칠에 걸쳐 경험할 일을 이렇게 짧은 시간에 경험하다니…….
게다가 손에는 무려 백만 원이 든 돈 봉투!
횡재일까, 또 다른 개고생의 시작일까.
모든 건 일주일 뒤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이 돈으로 밀린 공과금이랑 집세 좀 내고, 나머지는…….
저축해야겠다.
***
속이 타고 코가 벌렁거린다.
지금 모니터 화면에 띄워진 영상에 나오는 것은 바로 내가 하려던 TV 프로그램이었다!
제목은, 코리안헌터 24시쯤.
프로그램 형태는 조금 바뀌었다.
녹화가 아닌 생방송, 인터넷을 통한 실시간 송출, 그리고 다큐가 아닌 리포트 방식.
“네! 그럼 이제 한국 최고의 헌터 중 한 분이신 ‘무쇠주먹’ 이일 씨와 인터뷰를 해 보겠습니다. 이일 씨, 안녕하세요!”
자칭 미녀 리포터 카리.
연두색에 왼쪽만 살짝 묶은 머리가 정말 풋사과처럼 보인다.
귀여운 척하며 한껏 애교를 부리지만 얼굴은 그럭저럭. 신인 아이돌이거나, 인터넷 방송 출신인 것 같다.
이일이란 남자는 카리보다 두 배는 거대한 체격을 지닌 근육맨. 그런데 복장이 흰색 민소매 셔츠와 짧은 레깅스. 남성 시청자 안구를 테러할 셈이냐!
두 사람은 숲속으로 보이는 야외에서 접이식 의자에 앉아 있다.
“이 근육 좀 보세요! 소도 때려잡겠는걸요?”
카리가 이일의 팔 근육을 만지며 감탄한다.
멘트가 참 저렴하다.
“크하하하! 뭐, 그렇지! 이 오빠가 언제나 사회 정의 구현과 잡몹 처리에 앞장서고 있거든. 요전에도 웬 드래곤같이 생긴 괴물이 나한테 덤벼들기에 한 방에 때려눕혔지!”
“우와, 대단하시네요. 그래서요?”
뭐?
드래곤같이 생긴 괴물?
괴물 이름도 제대로 모르면서 입만 산 놈이……!
헌터의 기본이 안 되어 있잖아.
차라리 날 취재해라!
“잘 타일러야지! 난 평화주의자거든. 크하하하!”
저절로 이가 갈린다.
장난하냐?
괴물 사냥해서 먹고사는 놈이 평화주의자?
그럼 간디는 폭력주의자냐!
“그렇군요! 참 대단하시네요.”
앗!
이일이 은근슬쩍 카리의 손을 잡는다.
카리는 당황하는 기색 없이 이일의 손을 뿌리치려 하지만 소용없는 짓이다.
이일은 손을 잡은 후 아예 카리를 끌어안는다.
야, 인마! 이거 생방송이야!
“저, 저기…… 이건 좀…….”
카리와 이일 외 다른 남성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마 카메라맨인 것 같다.
“너무 인정머리 없게 굴지 마. 우리 사이의 벽이 허물어져야 진솔한 인터뷰를 할 수 있잖아? 아니야?”
다그치는 이일의 얼굴에 살짝 그늘이 진다.
저거 칼만 안 들었지, 완전 범죄자네?
카메라맨이 당황한 건지 화면이 흔들린다. 그리고 초점이 어긋나면서 흐릿해진 영상으로 울상이 된 카리의 얼굴이 보인다.
“맞잖아! 아니야? 아니냐고? 야! 카메라맨, 네가 대답해 봐!”
“예? 어…….”
“그럼 계속해! 알았어?”
저곳이 만약 진짜 사냥 구역이라면, 카리와 카메라맨은 이일에게 복종하는 수밖에 없다.
단 셋뿐인 공간에선 칼 든 놈이 왕.
사냥 구역은 무법 지대나 다름없다.
이일은 카리를 끌어안은 상태에서 슬며시 가슴 부분에 손을 올린다.
참다못한 카리가 소리를 지르려는 순간 갑자기 영상이 흔들리며 잡음이 울린다.
무슨 진동 같은데?
혹시 울음소리?
카메라의 시야가 돌아가고 초점이 정상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광활한 하늘, 그곳에서 뭔가 거대한 발톱이 카메라를 덮친다.
“도망쳐!”
화면은 하늘을 향한 채 움직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카메라맨이 카메라를 버린 모양이다.
카리의 비명 소리와 함께 이일의 고함 소리가 사태의 심각성을 알린다.
정체불명의 피가 카메라 렌즈에 튀니까, 그제야 현장 영상이 끊기며 물이 졸졸 흐르는 개울 영상으로 바뀐다.
언뜻 본 것이라 확신할 수 없다.
그저 발톱과 울음소리의 특성으로 보건데, 괴물의 정체는 ‘쌍두하피’일 가능성이 높다.
쌍두하피.
한국에 서식하는 조류형 괴물 중 가장 악질적인 놈이다.
인터넷으로 방금 일어난 일에 대해 검색, 하지만 생각보다 이 방송은 주목을 받지 못한 듯하다.
감감무소식.
결국 카리와 카메라맨, 그리고 이일의 운명은 알 수 없었다.
“지금 내가 남 걱정할 때냐.”
밀린 월세와 세금 정산 후 남은 금액은 10만 원.
그 돈으로 일주일 치 식량과 생필품을 사고 나니 남은 돈은 만 원.
당연히 그 만 원은 저금!
지금 내 주머니에는 땡전 한 푼 없다.
한손이란 사람이 뭔가 수상쩍은 냄새가 나서 나름대로 조사를 했다. 그러나 아는 헌터들과 인터넷, 기타 여러 방법을 총동원한 결과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났다.
마치 투명인간 같다.
혹시 그때 내가 헛것을 본 걸까? 하지만 돈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노란색과 초록색.
두 알약을 먹은 뒤 몸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처음 하루 이틀은 설사와 함께 가벼운 복통이 있었지만, 사흘째 완쾌. 나흘째부턴 그냥 평소와 똑같았다.
정말로 오줌이랑 곰팡이였던 건가? 그냥 미치광이한테 당한 건가?
떨리는 손으로 한손 아저씨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짧은 발신음이 흐른다.
―여보쇼?
지금 막 일어난 듯 기운이 쫙 빠진 목소리.
한손 아저씨다.
우리는 만날 장소와 시간을 정하고는 짧게 통화를 마쳤다.
시내에 있는 조물주 의원.
한손 아저씨는 이곳으로 날 안내했다.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병원엔 다른 손님은 없었다.
“여기라면 믿을 수 있어. 아는 녀석이 하는 곳이거든.”
사람이란 게 참 간사하다.
천만 원짜리 임상 시험을 받으면서 효과가 없으니 제멋대로 안심.
그러면서 대가는 확실히 받고 싶어 한다.
돈은 챙기고, 위험은 짊어지기 싫어하는 것이다.
이기적인 현대인. 똑똑한 욕심쟁이. 자기비하의 호구.
그게 나란 놈이다.
검사는 일반적인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피를 뽑고, 소변을 보고, 엑스레이로 몸 안을 훑었다.
모든 검사가 끝나고 우리는 진료실에서 의사의 설명을 들었다.
드라마에 자주 나오는 단골 장면.
진료실 벽에 걸린 형광판, 그리고 그 위에 걸린 엑스레이 사진.
보통 이런 건 주인공이 암에 걸렸거나, 다른 희귀 질환에 걸렸을 때 나온다.
벌써부터 암에 걸린 건가?
우리는 진료용 의자에 앉은 채 의사를 주시했다.
의사는 사뭇 엄숙한 얼굴로 지휘봉을 들어 흉부 엑스레이 사진의 여기저기를 가리켰다.
“이곳이 검은 게 보이죠? 그리고 이곳은 하얗습니다. 또 이곳은 투명하고, 이곳은 거뭇거뭇하고, 이곳은 빈 공간이며, 이곳은 꽉 차 있습니다. 그리고…….”
마치 카푸치노 거품 같은 설명.
왜 필요한지는 알겠는데, 딱히 없어도 되지 않나 싶다. 하지만 지금 의사의 얼굴이 너무 진지하기에 차마 말을 끓을 수 없다. 게다가 ‘내’ 몸에 대한 설명이기에 더욱 그렇다.
혹시 내가 몰랐던 혹이라도 발견한다면 그거야말로 이 임상 시험의 가장 큰 성과일 것이다.
의사의 얼굴에 그늘이 지고 나와 아저씨는 침을 삼켰다. 잠시 진료실에 긴장감과 함께 고요함이 흘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의사의 입이 벌어졌다.
무거운 음성.
의사는 나와 아저씨에게 차례로 눈을 마주쳤다. 깊고 어두운 눈동자 속에서 뭔가가 번뜩이는 것이 보였다.
무거운 분위기. 마치 막장드라마에서 흔히 나오는 상황 같다.
이제 의사의 입에서 ‘흔한 말기 암입니다.’나, ‘드라마 종영 때까지 안 죽는 희귀병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화에서 허무하게 죽을 수 있습니다.’라는 말이 나오는 건가.
의사의 말이 이어졌다.